11화 11화
#11
난나는 매음굴에서 살았다. 물론 어릴 때부터 그리 살았던 것은 아니고. 열다섯 이전에는 양친이 그녀의 옆에 있었다. 후락한 마을에 낡은 전원주택이 있었다. 작은 뜰에서 자라는 자두나무만이 볼거리인 그 전원주택은 외조부가 살아 계시던 시절 그의 손으로 벽돌 한 장 한 장 직접 쌓아 올린 집이라고 했다.
난나는 외조부를 본 일이 없었고 모친 또한 소녀 시절 그를 잃었기 때문에 기억이 흐릿하다고 했다. 다시 말하자면, 그 집에 다복함이 존재했던 시절이 그토록 멀다는 이야기였다. 난나는 겪은 적도 없고 경험한 바도 없는 가정의 안락함. 양친의 다정함…….
난나는 세상에 다정한 부모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아버지가 자상할 수도 있다는 것을 스타테이라를 만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러니 난나가 스타테이라의 행복을 얼마나 부러워했겠는가. 난나는 정말로 그녀의 모든 것이 부럽고 질투 났다. 어떤 순간에는 내심 스타테이라 또한 불행해지기를 바란 적도 있었다.
언감생심 그녀와 같은 것을 바랄 수 없으니 그녀 역시 좌절과 슬픔이 무엇인지 알기를. 세상을 온통 뒤덮은 것은 그처럼 찬란한 것들이 아닌 먹구름처럼 어두컴컴하며 끝이 없는 악의들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됐었는데…….’
그러나 아주 진심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스타테이라가 그리되고 나서 난나는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으며 자신을 후회했다. 난나는 정말로 스타테이라가 그리되길 바라서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스타테이라가 너무 부러우니까. 그녀의 고귀함과 부유함은 죽었다 깨어나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저……. 그녀를 감싸고 있는 다정한 세상이 너무도 부러웠을 뿐이었다.
그녀 하나밖에 모르는 아름답고 다정한 약혼자. 자상하고 강인한 아버지. 그녀를 사랑하는 친구들. 아랫사람들에게라면 까다롭지만 하나뿐인 외손녀에겐 더할 나위 없이 지극한 외조부모. 여신을 숭배하는 것처럼 그녀를 떠받드는 사용인들과 영지민들……. 난나는 경험한 적 없는 밝고 따뜻한 세상이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난나는 그녀의 세상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던 소녀였다.
‘아가씨! 부탁, 부탁드려요. 제발, 마차에 한 번만 숨겨 주시면……!’
‘너는…….’
벌써 십수 년은 된 일이 머릿속을 아물거리며 채웠다. 난나가 스타테이라를 만났던 것은 열다섯 여름의 일이다. 난나의 아버지는 마을에서 이름난 술주정뱅이였다. 가난하고 후락한 마을이라지만 그런 인간을 좋아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대저 그런 인간들이 그러하듯 아버지는 한 가지만 하지 않았다.
술을 먹고 아내를 두들겨 패고, 자식들을 향해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아무렇지 않게 손찌검을 했다. 난나 역시 그 손찌검에 입술이 터져도 보고 머리채가 잡혀 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아버지가 그녀를 도박 빚에 팔았다. 한 푼, 두 푼 도박판에 내걸던 돈의 판이 커졌다. 난나는 금을 열 돈 주고도 다시 돌아오지 못할 만큼 거대한 채무로 인해 포주에게 창부로 내다 팔렸다.
‘엄마, 엄마! 나 좀 도와줘!’
난나는 그날 아침을 잊을 수 없었다. 그날로부터 아주 멀리, 전생인가 싶을 만큼 아주 멀리 와 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작고 낡은 전원주택을 둘러싼 음산한 기운은 뼈가 아릿할 만큼 선명했다. 안개가 짙게 끼어 동이 튼 줄도 모를 만큼 흐릿한 날씨였다. 낡은 문이 부서져라 두드리던 장정 둘이 난나의 두 팔을 붙잡았다.
난나는 모가지가 붙잡힌 암탉처럼 푸드덕대며 울음을 터트렸다. 모친은 그때 젖먹이 막내를 엎고 부엌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무표정하게 난나를 돌아보았다. 진작 알고 있었다는 얼굴이었고 난나를 구할 마음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아버지는 그때 침대에서 늘어져라 코를 골며 잠들어 있었다. 난나만 영문을 모른 채 동생들과 모친을 쳐다보았다. 가장 놀란 것은 그녀보다 한 살 어린 여동생이었다. 그러나 그녀 역시 무얼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얼굴로 그녀와 모친을 번갈아 보았다.
‘엄마.’
‘잘할 수 있을 거야. 난나 너는 똑똑하니까. 내가 키운 애들 중에 제일 야무지고 똑똑한 애니까.’
‘무슨, 무슨…….’
난나가 젖은 얼굴로 엉엉 울었다. 싫다고 악다구니를 써도 별수가 없었다. 기어이 장정의 손에 뺨을 한 대 후려 맞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모친은 그 모습을 묵묵히 쳐다보고 있었다. 난나는 그제야 제 처지를 깨달았다. 가족들에게 버려졌다는 것을…….
모친만큼은 다를 줄 알았다. 그녀를 아꼈으니까. 그 나름으로 아낀다고 했으니까. 옆집의 안나는 어머니의 손에 늙은 영감의 첩으로 팔렸다. 그 건넛집인 린다는 제 아버지뻘 남자의 후처가 된다고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난나를 학교에 보내고 싶다고 했다.
지금보다 살림이 조금 더 나아지면……. 네 아버지가 정신을 차리고 나면 그렇게 하고 싶다고. 그리 말하며 자수를 놓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어머니는 마을에서 자수를 가장 잘 놓는 사람이었다. 어딘가의 남작 부인 역시 놀라워했을 만큼 자수 솜씨가 훌륭하여 언젠가는 아버지의 빚을 그 자수 솜씨로 갚은 적도 있었다. 한데…….
‘흐, 흐윽,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난나는 몸을 둥글게 만 채 훌쩍거렸다. 매음굴은 그녀가 살던 마을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포주는 그곳이 위대한 에버하르트 공작의 영지라고 했다. 난나는 그가 누군지 몰랐다. 공작이 무얼 하는 사람인지, 에버하르트가 무얼 하는 가문인지. 아무것도 몰랐다. 그저 높으신 귀족님네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난나는 스타테이라를 만나기 전까지 귀족을 만난 적도 없었다. 그러나 그건 대다수의 평민들이 그랬다. 평민들은 귀족들이 사는 구역에 살 수도, 길을 지나다닐 수도 없었다. 지금도 그랬지만 과거에도 귀족들은 평민의 신분을 구별하기 위해 사는 지역을 비롯한 행색을 지정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행색으로 알아보기도 전에 입만 떼면 그들의 신분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귀족이 쓰는 말과 평민이 쓰는 말이 달랐다. 단어며 악센트며 모두 달랐다. 한데 스타테이라는 그녀를 좋아했다.
그녀가 쓰는 악센트가 귀엽다고 했었다. 그렇지 않으냐고 제 약혼자를 향해 물은 적도 있었다. 난나는 그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순수를. 그 악의 없는 진실한 마음을……. 하여 가끔은 자문했다.
스타테이라를 좋아하는 난나의 마음은 진실했을까. 정말로 그녀를 좋아했을까. 좋아한다고 말했었지만 사실은 좋아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사실은, 사실은 난나는 스타테이라가 부럽고 두려웠다. 스타테이라는 그녀를 두고 자매와 같다고 했지만 자매가 아니라는 사실은 모두가 아니까.
난나는 스타테이라의 아버지나 약혼자와 마찬가지로 그녀가 두렵고 불편했다. 한순간도 편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많은 순간에 그녀는 스타테이라가 가진 것이 눈물 나게 갖고 싶었다. 제 것이 되면 어땠을까 생각한 적도 많았다. 그러니 지금 천벌을 받고 있는 것이겠지. 물기가 마른 뺨을 타고 흘렀다. 어둑한 방을 홀로 밝히는 촛불이 위태로워 보였다. 창이 열린 것도 아닌데 언제든 불이 꺼질 것 같았다.
난나는 밤을 기다리라고 하는 황제의 명령을 기억했다. 어떻게 행위가 끝났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는 헐떡거리며 입안에 고인 정액을 어쩌지 못해 덜덜 떨고 있었다. 속을 게워 내려고 하니 우악스러운 손이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입을 틀어막았다.
난나의 물빛 눈에는 물기가 잔뜩 어려 있었다. 눈두덩과 눈가 자체가 발갛게 익어 색스러웠다. 황후보다는 ‘창부’가 더 어울리는 여자였다. 그는 여자의 드레스 자락을 걷어 올려 여자의 구멍에 쑤셔 박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난잡하게 헤집어, 허연 거품이 질구에 묻어 나올 만큼 파정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공작의 앞에 보여 주고 싶었다. 문득 난나가 공작을 곁눈질했다. 공작은 날카롭게 굳어 있었다. 단단한 목울대가 울렁거리며 관자놀이의 푸른 혈관이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그는 픽 웃으며 난나를 보았다. 난나는 공작을 의식하는지 이런 와중에도 그를 자꾸만 훔쳐보았다.
또다시 심사가 뒤틀렸다. 이게 감히……. 내 앞에서 지난 주인을 신경 쓰기나 하고. 그는 비죽 잔인한 웃음을 흘렸다. 여자의 젖가슴을 움켜잡았다. 그 난잡한 손길에 미간을 좁힌 공작이 ‘폐하.’ 하고 그를 불렀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삼켜.’
‘그만두시죠.’
‘공작이 관여할 바는 아니고.’
‘한때는 제 밑을 닦았던 계집이라고 해도 이제는 황후입니다. 폐하께서 승낙하신 황후시죠.’
에버하르트 공작의 단정한 저음은 매끄러우며 언제나 듣기 좋았다. 그러나 그때만큼은 속이 울렁거렸다. 난나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죽고 싶은 마음을 참았다. 시렁의 지붕을 받친 대리석 기둥에 머리를 박고 싶었다. 진심으로……. 그리하지 못하는 것은 황제가 두려워서는 아니었다.
죽을 것처럼 떨고 있는 그녀를 놓아준 황제가 그녀를 향해 명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