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8화
07.
그의 일과는 언제나 불규칙했다. 밤새 장교들과 어울려 진탕 술을 마실 때도 많았고, 밤에 말을 타고 나가 동이 틀 때까지 돌아오지 않을 때도 많았으며, 집무실에 처박혀 밤새도록 음악을 틀어 놓고 양주를 벗 삼아 서류를 뒤적거릴 때도 많았다.
어쨌거나 그의 일과는 종잡을 수 없었고, 그의 행방 역시 늘 종잡을 수 없었다. 디터를 비롯해 요한과 가까이 지내는 몇몇은 그런 그의 특성을 잘 이해했다. 그리고 요새 안 대부분의 사람들, 이를 테면 주방장을 포함한 사용인은 그런 주인의 습성에 많은 불편을 겪었다.
“그 정신 나간 여자를 당장 말려 주셔야 합니다!”
아침나절부터 요새의 주방장이 침실로 들이닥쳐 씩씩거렸다. 이제나 저제나 언제쯤 그를 만날 수 있을까 기다리다가 간신히 잡은 기회였다. 이 기회를 놓치면 또다시 기약 없는 나날을 기다려야만 한다는 생각에 그는 앞뒤 가릴 것 없이 뛰어든 것이다.
요한은 떼어지지 않는 눈곱을 떼려 눈을 비비며 헛기침을 했다. 목이 말랐다.
“뭐라고? 다시 이야기해 봐.”
“그 갈색 머리의 닭 살인광! 그 교활하고 잔인한 여자 말입니다!”
하녀 두 명이 들어와 침실에 드리워진 길고 화려한 커튼을 걷어 냈다. 그러자 정돈되지 않은 요한의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새집을 지은 것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그는 계속해서 제 목을 매만졌고 눈치가 빠른 하녀 한 명이 그에게 재빠르게 물을 건넸다.
“고마워.”
요한은 냉수를 들이켰다. 하녀들은 재빠르게 침구를 정리하고 반짝거리는 스테인 쟁반에 받친 따듯한 커피와 바게트 빵을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주방장은 그동안에도 계속해서 울분을 터트렸다.
“그 빌어먹을 여자가 어찌나 닭들을 괴롭히는지! 닭들이 탈모가 온 데다가! 스트레스를 받아 알도 못 낳고 있어요!”
요한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삼키려다 실패했다. 그는 큭큭거리며 물 잔을 내려놓았다.
“웃을 일이 아닙니다! 소장님! 당장 요리는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빵은 어떻게 만들고, 요리는 어떻게 합니까! 이 성에서 소진되는 계란이 몇 판인 줄 아세요?! 이제 그 미친 여자가 거위까지 거덜 내기 전에 제발 말려 주십시오!”
“죽인 닭은 없고?”
요한이 침대에 놓인 빵을 집어 들며 물었다.
“왜 없겠습니까! 한 마리는 목을 비틀어 놨죠! 그다음엔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닭 목을 제대로 비틀어 놓지도 않았단 말입니다! 얼마나 잔인한 여자인지! 결국 제가 죽여 요리를 했습니다!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하루에 한 마리씩 꼭 그렇게 잔인하게 해 놓아야 하느냔 말입니다! 차라리 목을 잘라 놓는 게 낫다니까요! 그뿐인 줄 아세요? 닭들이 그 여자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이제는 서로를 공격하고 있어요. 다들 피투성입니다! 이러다가 닭장에 산 닭이 한 마리도 없게 생겼다니까요!”
“어쨌든 제대로 죽이지는 못했다는 거로군.”
“이건 죽이는 것보다 더 잔인한 짓입니다! 닭들의 상태를 보셔야 해요! 그 여자는 미쳤어요. 제정신이 아닙니다. 대체 왜 가축들에게 화풀이를 합니까! 그것도 남이 정성스레 키우는 닭을! 그런 여자를 밖에 풀어 두시면 안 됩니다. 이곳에 둘 것이 아니라 어디 수용소에 가둬 버려야 한다고요!”
“그건 안 돼. 그 여자는 따로 쓰일 곳이 있거든. 다만 두 번 다시 식용 목장 근처에는 얼씬도 못 하도록 하지. 맛있군.”
요한이 빵을 들어 보였다.
“네. 마지막 달걀로 만든 빵이거든요.”
다시 웃음이 터져 요한이 큭큭거렸다. 요한이 자꾸만 웃자 주방장도 절대 씩씩거릴 수가 없었다. 그는 크게 한숨을 내쉰 후 딱딱하게 굳었던 얼굴을 풀었다.
“어쨌든, 그래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소장님.”
“내가 한 말은 지키겠어. 약속해.”
“감사합니다. 그럼 좋은 하루 되십시오.”
주방장이 그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나갔다. 침실 문 밖에서 대기하던 디터가 기다렸다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아침부터 난리로군요.”
“웬 미친 여자 때문이지.”
“…….”
요한이 커피를 마시며 농담을 했고 디터는 대꾸하지 않았다.
사샤는 좀 더 진취적인 방향으로 변해 있었다. 뭔가에 몰두하는 시간도 늘어났다. 방 안에만 머무는 대신 그녀는 간호 장교의 동행하에 요새 내의 서고를 찾았고 그 횟수도 점차 늘어났다. 보안을 위해 인적이 드문 밤에만 움직였고 언제나 간호 장교와 동행했다.
다른 책은 아무것도 보지 않고 동물과 사람의 해부학을 다룬 책만을 보았다. 기름 램프 아래에서 책을 찾아보다가 동이 트면 읽지 못한 책을 싸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내내 책만 보았다. 눈을 감고도 동물과 사람의 내장 기관을 그릴 수 있을 때까지 그것을 보고, 보고 또 보았다.
그러며 언제나 닭의 목을 비트는 상상을 했다. 언젠가 분명 잘 비틀게 될 거야. 오늘은 꼭 잘 비틀겠어. 그 생각만 수십 번, 그것이 그녀의 일과였다. 낮에는 책을 보고 밤에는 닭의 머리를 비틀고 다시 책을 봤다. 머릿속에는 온통 살인과 죽음에 대한 열망뿐이었다.
침대에 누워 책을 보다 깜빡 잠이 들었다가 사샤는 인기척에 눈을 떴다. 길고 큼직한 요한의 손이 사샤의 광대뼈 밑에서 책을 빼냈다.
오늘 요한은 군복을 착용하지 않았다. 편안한 리넨 셔츠에 면바지 차림이었다. 군인 같지 않았다. 오히려 전혀 절제할 줄 모르는 방탕한 히피 청년처럼 보였다. 처음 보는 그의 낯선 모습에 사샤는 당황했다. 더욱이 도드라지게 드러난 기다랗고 단단한 그의 목에 여전히 선명하게 찍혀 있는 저의 손톱자국도 한몫했다.
“닭 살인마로 명성을 드높이고 있던데. 점점 영역을 넓혀 가고 있나 보지?”
그는 사샤가 막 보고 있던 거위의 해부도를 보며 비아냥댔다. 사샤는 그의 손에서 책을 낚아채어 베개 아래에 구겨 넣었다.
“닭 목도 제대로 못 비튼다면서 이젠 거위까지 손대시게? 배움이 꼼꼼하다고 해야 되는지 늦된다고 해야 하는지.”
“명분이 없어서 그래. 닭은 당신처럼 죄가 많지 않으니까, 그래서, 망설여지는 거야!”
“그것참 고결한 이유군. 그게 네가 반쯤 닭의 목을 비틀다 만 이유야? 죄가 많지 않으니 목뼈는 반쯤 돌리고 말아야지. 그러면 누군가 불쌍한 닭의 목이 제대로 될 때까지 목에 깁스를 해 주겠지. 척추에 철심도 박아 주고. 매일 마사지도 해 주고 깨끗한 시트에 이불도 갈아 주겠지.”
“…….”
“차라리 닭의 머리를 잘라서 구이통에 처박아 넣는 대신에?”
요한이 비아냥거렸다. 화가 났지만 제대로 반박할 수 없었다. 알아. 그 망설임이 더 잔인하다는 걸 알아. 하지만 어쩔 수 있겠는가, 제 심약한 심성은 겨우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을. 아직도 겨우 그 정도뿐인 것을.
제대로, 딱 한 번이라도 제대로 했어야 했는데, 제대로 한 번이라도 했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그에게 이런 비아냥거림을 들을 필요도 없겠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닭의 목을 제대로 비틀었어야 했는데!
“넌 곧 결혼할 거야.”
그는 뚱딴지같은 말을 했다. 짧고 이해하기 쉬운 단 한 문장을 사샤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잘못 들은 말이 분명해. 내가 들은 그 말이 설마 그 말일 리가 없어.
“뭐?”
“보반 의원과.”
“아니, 내가, 내가 뭘 한다고?”
“너는 보반 의원과 결혼할 거야.”
“…….”
내가, 내가 보반과 결혼을 한다고? 내가? 설마, 그럴 리가. 보반 의원이라니. 그가 어떻게 생겼었더라? 그 이름은 선명하지만 그의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늙고, 배가 나오고, 작고, 뚱뚱하다는 것만 어렴풋이 기억날 뿐이다. 그리고 그녀가 첩자임이 발각된 그날 보반 의원의 집무실에서 들려오던 비명과 고함, 요란한 소리들만큼은 아주 선명하게 기억했다.
“……그 사람. 안 죽었어?”
“안 죽었어, 다만 몸이 좀 상하긴 했지. 너와 비슷해. 발각되고 고문당하고 결혼을 위해 지금은 치료받고 있지.”
“…….”
어째서, 어째서 내가 그와 결혼을 해야 하지? 왜?
“성대한 결혼식을 치르고 모든 매체에 너와 보반의 얼굴을 도배할 거야. 너는 연합군의 변절자이자 신비한 요부, 그리고 더러운 창녀로 유명세를 타겠지.”
“…….”
변절자, 신비한 요부, 더러운 창녀. 그리고 유명세.
“그게 이곳에서의 네 역할이야.”
이것은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공들여 가꾸었던 그 모든 일들. 늘 풀리지 않던 미스터리들. ‘대체 왜?’ ‘대체 그가 왜 저를 죽이지 않고 이런 식으로 보호하는가’에 대한 너무나 분명하고 절망적인 대답이었다. 변절자로, 요부로, 창녀로 그녀를 선전 도구로 사용하려 하는 것이다.
“날 팔아서 사람들의 흥미를 끌겠다는 거야?”
“그래.”
“나를 연합국의 변절자로 만들어서 당신의 인형 노릇이나 하라는 거야?”
“아니. 도첸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라는 거야. 사샤. 대단히 훌륭한 꼭두각시가 되어 주어야겠어.”
“싫어!”
“너에겐 거절할 권리가 없어. 어쨌든 네 목숨은 이제 도첸의 소유가 되었거든.”
“싫어!”
사샤는 강하게 거부했다. 싫다. 절대로 싫다. 내가 어째서 당신들을 위해 원치도 않는 결혼을 해야 하는가. 어째서 당신들의 사욕을 위해 내가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을 하고 그것으로 유명세를 타고 그것으로 창녀가 되고, 요부가 되고, 또한 변절자가 되어야 하는가.
“도첸을 위한 어떠한 일도 하지 않겠어! 나는 당신들이 싫어! 전쟁을 일으키고 내 가족을 죽이고 나를 도망자로 만들었잖아! 절대로! 절대로 싫어!”
“내 알 바가 아니지. 너의 용도는 정해졌고 그걸 결정하는 건 네가 아니라 나야.”
“싫어! 그 남자랑 결혼을 해 인형으로 사느니 차라리 길거리의 비렁뱅이가 되거나 살찐 돼지와 결혼하겠어!”
“내가 너에게 동의를 구하러 온 것 같아? 지금껏 너에게 쏟아부은 돈이 있어, 사샤. 널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재워 준 값은 해야 하지 않겠어?”
이가 갈렸다. 둔해졌던 살인에 대한 통각이 다시 열렬하게 살아났다. 사샤는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원한 적 없어! 네 멋대로 날 살려 두고 먹이고 멋대로 내 머리를 만졌잖아! 거기에 내 의지는 하나도 없었단 말이야! 어떻게 날! 넌 날 이런 식으로 이용할 순 없어! 그 남자랑 결혼을 하느니 혀를 깨물고 죽겠어!”
“징징대는 건 그쯤 해 둬.”
엄격한 어투였다. 사샤는 보란 듯이 제 혀를 빼물고 씹었다. 요한이 재빠르게 그녀의 턱을 움켜쥐었다.
“그쯤 해 두라니까…….”
“으! 으!”
사샤는 눈을 꽉 감고 죽을힘을 다해 그에게 저항했다. 그러나 요한의 악력에 턱은 맥없이 벌어졌고 그는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
“우웁!”
분함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왜! 대체 왜! 왜! 내게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왜!!
“계속 이런 식이면 너에게 약을 투약하는 수밖에 없어. 정말로 살아 있는 인형이 되고 싶어? 눈을 뜨고 있어도 뜬 거 같지 않고 숨을 쉬고 있어도 쉬는 거 같지 않은?”
지극히 차갑고 정치적인 이야기를 그는 냉정하게 뱉어 냈다. 이제 왜 자신을 지금껏 살려 주고 이토록 극진히 보살펴졌는지에 대한 의문은 풀렸다. 알고는 있었어. 날 보살피는 이유가 결코 따듯함이나 상냥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 어떠한 순간에도 고통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들린 적이 있다. 그러고 싶었던 적이 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그 수많은 다정한 말들, 차갑고 거칠고 냉소적인 말들, 그중 어느 한 번 정도는 진심이 담겨 있을 것이라 믿고 싶었던 적. 그래서 고통을 외면하고 망각의 길을 따라 차라리 당신의 충실한 애완견이 되고 싶었던 적. 그렇게 미쳐 버리고 싶었던 적이.
우우. 우우우읍.
사샤가 천 뭉치를 물고 웅얼거렸다. 잘 들리지 않자 요한은 수건을 그녀의 입에서 빼냈다.
“뭐라고?”
“날 이렇게 길들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야. 절대로, 절대로 당신들 뜻대로 되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당신을 위한 달콤한 사탕을 나는 늘 준비하고 있으니까. 다만 아직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지.”
그딴 사탕 필요 없어. 그 사탕은 독이 들었을뿐더러 달콤하지도 않을 것이다. 요한은 달콤함으로 상대를 유혹하지 않는다. 오로지 강압적으로 그것을 목구멍에 쑤셔 넣고 삼킬 때까지 기다릴 뿐이다. 어째서 내가 이런 모욕을 당해야 하는가. 차라리 날 죽였다면, 발각당했을 때 그냥 죽였다면 이런 더러운 꼴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째서. 어째서 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나.
“……왜, 왜 나야?”
왜. 왜 하필 나야. 왜 하필. 어째서 벨은 죽고 나는 살았는가. 어째서 다른 이가 아닌 저인가. 왜. 도대체 왜.
요한은 구겨진 손수건을 털어 제 주머니에 넣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너무나 당연한 것을 묻는다. 왜 하필 너냐고?
“그거야, 네가 아름다우니까.”
너의 그 신비한 눈동자를 좀 봐. 네가 멍하게 나를 응시하는 그 표정을 좀 봐. 너는 가련하고 유혹적이지. 청아하면서도 강렬하지. 백옥 같은 피부에 아이처럼 벌어진 그 도톰하고 헤픈 입술을 봐.
“그것보다 더 타당한 이유가 어디 있겠어?”
사샤는 손톱을 세우고 요한의 얼굴을 긁었던 것처럼 제 볼에 손톱을 세우고 깊이 박았다. 그러나 제대로 생채기를 내기도 전에 요한에게 저지당해 침대에 눌렸다.
“놔! 놔! 이것 놔! 얼굴을 뭉개 버릴 거야! 불로 지져 버릴 거야! 세상에서 가장 추악하고 더러운…….”
요한이 입술을 겹쳤다. 달리 그녀의 입을 막을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가장 간단하고 쉽고 무엇보다 효과가 좋은 방법을 택한 것이다.
생경한 감촉이 입술에 닿자 사샤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거부하려 버둥거렸다. 입안으로 말캉한 무언가가 들어왔다. 소리를 지르며 그것을 밀어내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뭔가가 그녀의 입안을 헤집었다. 아무런 맛도 없는 것이 유연하고 힘 있게 입안에서 움직였다. 정신이 없다가 이내 얼이 빠졌다. 버둥거리는 것도 잊었다. 요한이 부드럽게 입술을 떼어 냈다. 커다란 사샤의 녹색 눈이 혼돈에 금이 가고 있었다. 말간 타액이 사샤의 입술에서 요한의 입술까지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었다.
“이게 무슨 짓…….”
사샤가 욕설을 씹어 뱉으려 하자 요한이 다시 입술을 겹쳤다. 사샤는 있는 힘껏 버둥거렸다. 진이 빠질 때까지 버둥거리다가 끝내 그에게 눌려 옴짝달싹못했다. 굴욕적이었다. 조금 얌전해지는 기미가 보이자 그는 입을 떼어 냈다.
“더 지껄여 볼래? 난 좀 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
사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무방비하게 벌어진 입은 그대로 숨이 멎어 버린 것 같았다. 요한은 침대에서 일어났고 사샤는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기는 그를 넋이 빠져 쳐다보았다. 너저분한 짓을 해 놓고도 그의 얼굴은 단정했다. 은밀한 살덩이, 평생 누구와도 섞어 본 적이 없는 그녀의 공간을 들쑤시고 멋대로 맛보고 나서도 그는 지극히 사무적이고 지극히 이성적이었다.
“오후에 의상실에서 드레스를 맞추러 올 거야. 그다음 날 당신은 보반과 만나 저녁 식사를 할 거고 그다음엔 약혼이 발표될 거야. 신문에 실릴 다정한 사진도 찍을 거고, 그 이후엔 좀 더 너에게 자유를 주지. 사샤. 좀 더 즐길 수 있게.”
“자유…….”
자유라니. 자유라니.
“당신은 나한테 한 번도 그런 걸 준 적이 없어.”
한 번도 자유를 준 적이 없다. 만일 그런 것을 주었다면 사샤는 이렇게 살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벌써, 감옥 안에 갇혀 있을 때 죽었어야 했다.
“나를 어디까지, 어디까지 망가뜨릴 셈이야.”
난 부서졌어. 나는 완전히 부서졌어. 사샤는 멍하게 천장을 보며 읊조렸다.
네가 나를 망가뜨렸어. 네가 나를 부숴 버렸어. 나는 더 이상 미래를 그릴 수 없어. 나는 내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없어. 내가 원하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이 벌어먹을 것들을! 이 더럽고 지저분한 인생을 끝내는 것뿐이야!
사샤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고,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다. 아무것도 느끼고 싶지 않다. 숨을 쉬는 것도 무언가를 보는 것도 무언가를 듣는 것도 하고 싶지 않아. 왜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는가. 왜 살 가치가 없는데도 하루하루 살아야 하는가. 왜, 도대체 왜!
“왜 날 죽이지 않는 거야! 왜! 아파! 아프다고! 아파! 아파…….”
난 아파. 죽을 것 같아. 숨을 쉴 수도 없어. 아아. 왜 고통을 반복해야 하나요.
“차라리 이럴 거면 내 심장을 파내! 내 귀도! 눈도! 모두 다 파내고 잘라! 내 머리를 으깨서 뇌를 꺼내! 필요한 건 내 텅 빈 껍데기뿐이니 차라리 내 영혼을 죽이고 내 육체만 가져가란 말이야!”
사샤는 침대를 쾅쾅 치며 오열했다. 날 죽여. 내 영혼을 이 삶에서 끄집어내 줘. 가슴이 아파. 고통뿐인 심장을 도려내. 제발. 내게 이 넌더리 나는 시간을 멈추게 해 줘.
“그렇게 살아.”
요한은 그녀에게 일말의 동정도 보이지 않는다. 오만하게 서서 사춘기를 겪는 철부지 소녀를 보는 듯, 달콤한 환상에 다만 한때의 치기임을 알려 줄 뿐이다.
“괴롭게, 슬프게, 아프게. 모두가 그렇게 살아. 그러니 너도 죽은 듯이, 심장이 없는 듯이, 아픔이 없는 듯이 인형처럼 살아.”
“…….”
“네 속에 단 한 조각의 뜨거움이 있다면, 그것이 증오든, 복수든, 아니면 살인이든. 단지 그것만 붙잡고 살아.”
“…….”
“그게 내일을 견딜 수 없는 시대를 사는 방법이야.”
비틀린 시대에는 모두 다 옳지 못한 것들을 품고 산다. 뒤틀린 욕망, 희망이 없는 세상을 질주하듯, 삶과 죽음의 경계를 달리며, 그것에 집착하며, 술을 마시고, 즐기고, 성욕을 채우고, 다른 이를 헤치고, 물건을 빼앗고, 인생에 지금만이 존재하는 듯 산다.
“고상한 이념이나, 믿음 따윈 버려. 신은 죽었고 이곳은 수녀원이 아니야. 사샤. 여기는 군인과 총과 무기와 살인이 넘치는 ‘요새’야.”
그러니 살아.
너도 나처럼.
사샤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젖은 눈동자는 올곧고 흔들림 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굳게 다문 입술 안으로 수많은 이야기가 맴돌았다. 증오와 복수의 말들, 슬픔과 구원의 단어들.
사샤는 찰나의 순간 요한의 얼굴이 슬프다고 생각했다. 감정이 없는 그의 얼굴이 슬프게 보였다. 있을 리 없는 그의 감정이, 슬픔이, 그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을 본 것 같았다. 그의 매끈한 눈꺼풀이 명확하게 들리기 전까지 사샤는 분명 그의 얼굴에서 그림자를 보았다. 그 이후엔 오로지 차가움뿐이었다. 굳게 다물린 입이나 단단한 콧날, 선명한 눈동자는 황제를 조각해 둔 석고상과 다르지 않았다.
그는 방을 나갔다. 그리고 그가 나간 후에는 언제나처럼 그가 남긴 말이 떠돌았다. 유령처럼 떠다니며 사샤의 공포를, 그녀의 고통을, 슬픔을, 그리고 도저히 형용할 수 없는 뜨겁고 저열한 감정을 괴롭히고 들쑤셨다.
사샤는 몸을 웅크렸다.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다만 너무도 추웠다. 요한의 유령이 그녀를 맴돌고 있는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