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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7화


06. 어둡고 음습한 굴 안에는 쥐가 드나들었다. 몇몇 재소자들은 그들을 애완용으로 길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애완용 쥐에게 살을 뜯겼다. 그만큼 빅토리아 형무소의 환경은 열악했다. 디터는 내내 코를 찌르는 악취에 손수건으로 코를 막고 걸었다. 요한의 정갈한 제복 위로 결로로 인한 물방울이 천장에서부터 툭툭 떨어졌다. 요한이 가는 곳은 형무소의 가장 끝 방이었다. 그 어느 방보다 더럽고, 어둡고, 좁은 방으로 주로 국가에 대한 반역죄나,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 사형수들이 마지막으로 거쳐 가는 장소였다. “넌 여기 있어.” 그는 디터가 저를 따라 들어오지 못하게 한 후 철창문 안으로 들어갔다. 습하고 역겨운 냄새는 한층 더 지독해졌다. 요한은 그 새까만 어둠을 눈으로 훑었다. 물방울 소리, 그리고 음습함에 섞여 있는 거칠고 둔중한 숨소리. “보반.” 사내는 쿨럭거리다가 하데스의 음성을 들은 듯, 궁지에 몰린 쥐처럼 구석으로 파고들며 떨었다. “요, 요한!” “…….” “아니야. 내 말 좀 들어 보게! 나는 아니야! 나는 아무것도 몰라. 나는 정말이지…….” “쉬.” 요한이 그에게 다가서며 달래듯 소리를 냈다. 보반은 그가 자신을 해치지는 않을까 여전히 불안해했다. “당신은 똑똑한 사람은 아니야. 그러나 충직한 사람이지.” “마, 맞아, 나는 충직하네. 나는 언제나, 언제나 공화당과 서기장님을 위해 일해 왔어. 나는, 나는 정말,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네. 결백해. 나는, 나는 결백해.” “당신이 연합군과 내통한다는 것을 또 누가 알고 있지?” “아, 아니야! 아니라네! 나는, 나는 속은 거야! 난 속았다네!” 요한은 군모를 벗고 간수가 미리 가져다 놓은 의자를 끌고 와 보반을 마주 보게 놓은 후 그 위에 앉았다. “비서가 꽤 자주 바뀌더군.” “요한. 요한……. 나는 모르네. 모르는 일이라네.” “어쨌어? 모두 다 죽였나? 죽여서 어디다 파묻었지?” “내 말을, 내 말을 들어 봐, 나는…….” 요한이 장갑 낀 손으로 그를 후려쳤다. 퍽 하고 그가 나자빠졌다. 그의 발과 손목에 채워진 무거운 쇠줄이 철컹거렸다. 쿨럭쿨럭. 보반이 요란하게 기침할 동안 요한은 장갑을 블레이저 자락에 문질렀다. “말했잖아. 당신은 충직하지만 똑똑하지는 않다고. 그러니 내 앞에서 그 멍청한 머리를 굴리려고 하지 마.” “…….” “누구의 뒤를 봐주고 있나? 보반?” “…….” 그는 입을 다물었다. 덜덜 떨면서도 입을 다물어 버렸다. 요한은 블레이저 안주머니에서 구겨진 쪽지 하나를 꺼내어 그에게 보여 주었다. 그것은 보반이 사샤의 코트 안자락에서 꺼낸 밀지였다. 늘 보반은 그런 식으로 쪽지를 받았다. 비서의 오른쪽 코트 안자락을 찢으면 그 안에 밀지가 있었다. “이건 무슨 뜻이지?” 적혀 있는 것은 알아볼 수 없는 알파벳을 나열한 암호였다. 보반은 고개를 저었다. “모, 몰라. 모른다네. 나도 몰라. 나는 그냥 전달자야. 그냥 전달만 할 뿐이야.” “누구에게?” “몰라. 모른다네. 나는 그것을 빅토리아 시내에 있는 공중전화 박스 안에 넣어 둔다네. 내가 하는 것은 그것뿐이야. 정말이야. 그 외에는 아무것도 몰라.” “당신에게 이 일을 시킨 자는 누구야.” “몰라. 정말이야. 정말 몰라. 정말이야.” “모르는 자가 시키는 일을 했단 말이야?” “그래. 그랬어. 그냥 전화, 전화를 받았네. 그는 매번 큰돈을 주었어. 매번…… 나는, 나는, 나는 그렇게 일해야 하는 줄 알았다네. 모두 다 그런 식으로…… 나는 정말이지 이게 국가에 대한 배신이 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네.” 요한이 대꾸가 없자 그는 울음을 터트렸다. “요한. 요한……. 정말이야. 날 믿어 주게. 나는 언제나, 언제나 이 나라와 서기장님을 위해서 일한다네. 나는 아무것도 몰라. 단지 그게 국익에 도움이 되는 줄 알았다네. 그래서 그냥 시키는 대로 했던 것뿐이야. 잘 알지 않나. 나는 늘 의심을 하지 않고 일한다는 것을 알잖아. 내가 충직한 개라는 걸 알잖아.” “…….” 알지. 도첸의 충직한 개. 당신 같은 충직한 개가 이 나라에는 얼마나 많은지. 멍청하고 욕심 많은 자가 어떻게 부유해졌는지. 그런 자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이 나라를 굴리고 있는지. “보반 의원. 이제 당신은 내 애완견이 되어야 할 거야.” “그래! 그럴게! 그렇게 하겠네! 내가, 내가 자네의 개가 되겠네! 다시 내게 기회를 준다면, 도첸을 위해, 서기장님을 위해 내 이 한목숨 바쳐 일하겠네!” “좋아. 당신이 얼마나 충직한 개가 되는지 지켜보겠어.” 요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한! 요한! 이제 나는 어찌 되는 건가! 나는, 나는 풀어 주는 건가! 요한!” 그러나 요한은 대꾸 없이 그의 방을 빠져나왔다. 디터가 그의 뒤를 따랐다. 요한이 군모를 다시 쓰며 명령했다. “보반을 데려가 치료해. 투옥되어 조사받았던 기록도 모두 지워. 가능한 전보다 멀끔한 상태가 되어야 할 거야.” “네. 소장님.” “차를 대기시켜. 디터. 요새로 돌아간다.” “네.” 디터는 요한을 앞질러 교도소의 복도를 뛰어갔다. 요한은 잠시 자리에 멈추어 블레이저 안주머니에서 종이와 펜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볕이 잘 드는 창가에 대고 재빠르게 글씨를 휘갈겼다.   [빅토리아. 배신자 없음. 안전.]   그러고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봉투에 밀봉하여 교도소 내에 비치되어 있는 우체통에 넣었다. 곧 그 편지는 ‘배달, 반송 불가’ 표시가 찍혀 우체국 안에 머물 것이다. 그 이후에야 제대로 주인을 찾아간다. 요한은 교도소 정문을 나와 디터가 미리 대기시켜 둔 차에 올랐다. 차 안은 침묵 속에 잠겼다. 디터는 차창 밖의 풍경에 골몰하고 있는 요한을 백미러로 가끔 흘깃거리며 운전병이 제대로 주행을 하고 있는지 확인했다. 마침내 창밖에 빅토리아의 시가지를 벗어나는 거대한 형교에 오르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잠깐.” 요한이 멍하게 창밖을 바라보다 말했다. “잠깐 세워.” 운전병은 즉각 차를 세웠고 요한은 디터가 차 문을 열어 주기도 전에 차에서 내렸다. 그는 곧바로 짙푸른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난간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군모와 장갑을 벗고 블레이저와 혁대마저 풀었다. 디터는 사색이 되어 차에서 뛰쳐나갔다. “소장님!” 요한은 난간을 훌쩍 넘어 그 반대편에 섰다. 디터의 얼굴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자못 유쾌해 보였다. 신발을 벗어 난간 안으로 던져 넣으며 그는 디터에게 물었다. “디터! 여기서 수영해 본 적 있나?” 아니, 없다. 어떤 미친놈이 빅토리아 강에서 수영을 하겠나. 이곳은 물살이 빠르고 깊기로 유명한 곳이다. 또, 이 강폭은 어떠한가. 죽을 작정이 아니라면 누구도 이곳에 뛰어들지 않는다. “아니요, 없…….” 그러나 요한은 디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난간에서 손을 놓았다. 그의 몸은 쏜살같이 아래로 떨어져 강물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소장님! 소장님!” 디터는 난간 밖으로 몸을 잔뜩 내밀고 정처 없이 소리만 질렀다. 운전병이 자동차에서 뛰어나왔다. 디터는 난간을 쾅 내리쳤다. “이런, 시발!” 그는 운전병에게는 요한의 옷가지와 신발을 챙겨 오라고 명령한 후 빅토리아 강변을 향해 질주했다. 그러면서 혹시나 강물 밖으로 그의 머리통이 보일지, 혹시나 그가 허우적거리며 구조 요청을 하지는 않는지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가 허겁지겁 강변 뚝방을 미끄러지듯 내려갈 때쯤에서야, 물에 푹 젖은 요한이 무성한 수풀을 헤치고 강물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소장님!” 디터가 다급하게 그를 불렀으나 요한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천천히 강변을 따라 핀 갈대를 매만졌다. 강물을 헤치고 나오느라 체력을 소진했다는 것은 그의 거친 호흡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평온하고 유쾌한 얼굴이었다. 형교 아래로 뛰어내린 것이 아니라 수영장의 다이빙대에서 뛰어내렸다가 올라온 것처럼 말이다. 디터는 가끔씩, 아니 어쩌면 매우 종종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요한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장난처럼 자신의 목숨을 시험하고는 했다. 장교들과 내기를 하며 건물 창문에 매달려 있기도 하고, 리볼버에 총알 하나를 넣은 후 러시안 룰렛을 하기도 했다. 목숨을 가지고 장난을 치면서도 그는 단 한 번도 진중한 적이 없었고 단 한 번도 그 죽음의 도박에서 진 적이 없었다. 그래서 모두가 그를 좋아했다. 그에겐 분명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것이 있었다. 신비롭고 절대적인 무언가였다. 혹자는 그것을 신의 축복이라고 하였고 혹자는 그것을 신의 저주라고 하였다. 그러나 디터는 그중의 무엇도 택하지 않았다. 감히 그럴 수 없었다. 미천한 자신이 정의 내리기에 그는 너무나 컸고 또 너무나 위대한 사내였다. 그를 존경한다. 그의 침묵, 그의 방종, 그의 광기, 그 모든 것을 경외한다. 그는 특별했다. 특별한 사내였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오로지 요한 폰 윌렌도르프의 숭고함. 그리고 지금껏 그의 부하로서 지켜 온 자신의 명예와 긍지였다. 그러니 그가 조금만, 아주 조금만 저 위험하고 멍청한 짓을 멈추어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강물이 생각보다 깊지는 않더군.” 요한은 디터에게 다가와 가볍게 말했다. 매사에 이런 식이다. 그에겐 모든 것이 하찮고 가볍고 쉬웠다. “요 근래에 비가 내린 적이 없잖습니까.” 아마 근래에 비가 내렸다면 분명 요한은 살아 돌아올 수 없었으리라. 디터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요한은 위로하듯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의 얼굴에는 전에 없는 상쾌함과 유쾌함이 스며 있었다. 마치 양수에 들어갔다가 다시 모체에서 태어난 아이처럼 천진하게 웃으며 그는 형무소에서 오는 길 내내 생각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그 여자에게 가 봐야겠어.” 그 여자? “누구 말씀입니까?” 요한은 천천히 대답했다. “사샤 로랑.” 꽤나 낭만적인 발음이 난다. 그 여자의 이름은. *** 벗어 놓은 옷가지와 신발을 챙겨 다시 차에 오르자 요한이 물었다. “그 여자는 어쩌고 있다고?” 디터는 사샤 로랑이 싫다. 그녀가 네르아 출신의 여자라는 것을 안 이후부터는 더 싫었다. 지저분하고 멍청하고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온갖 곳에 꽃과 나무를 심는 것밖에 모르는 미개한 종족. 디터는 그들을 혐오했다. 그저 그들이 싫었다. 이유도 없었다. 막연히 다른 방식으로 살고 말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가진 적대심은 군에 들어와서 훈련을 받고 공부를 하면서 분명한 혐오로 바뀌었다. 그런 종자들은 그냥 어딘가에 가두어 세상에 나오지 못하게 하거나 아니면 죽이는 게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한은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 듯 보였다. 그 발칙하고 얼굴만 반반한 여자를 대체 어떻게 하려고 저러는 것일까. 요한이 그녀를 다른 첩자들과는 다르게 생각하는 것도 못마땅했지만 무엇보다 요한의 지시에 따라 꼬박꼬박 그녀의 소식을 살펴야 하는 제 처지가 가장 못마땅했다. 그리고 가장 힘든 것은 요한에게 그것을 티 낼 수 없는 자신의 처지였다. 요한은 상사였고 무엇보다 도첸 내에서 그의 입지는 막강했다. 그는 첩보 분야 담당 장관 카렐 다음으로 힘이 셌고 라울 서기장이 가장 신뢰하는 내각 조정실의 수석 위원장이었다. 도첸의 군력은 요한을 위주로 돌아갔다. 무엇이든 그의 손을 거쳐야 했다. 게다가 그의 화려한 외모와 언변은 도첸 국민의 절대적인 신뢰와 사랑을 얻고 있었다. 요한은 도첸의 여성들이 가장 사랑하는 남자였고 도첸의 남자들이 가장 되고 싶은 이상향이었다. 그런 그의 심기를 건드려 눈 밖에 나면, 디터는 그의 손짓 하나에도 목숨을 잃을 수 있었다. 그러니 요한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은 단지 충성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다. “팔에 박힌 총알은 잘 빼내어 봉합했고 다른 이상은 없다고 합니다만. 식사는 전혀 하지 못하는 거 같습니다. 먹을 것만 보면 구토를 한다고요.” “정말 손이 많이 가는 종자로군. 여자란 것은.” 요한은 한숨을 쉬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차는 이제 막 요새의 거대한 숲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울창한 숲은 전쟁을 겪어 본 적이 없는 태고의 것처럼 신비로웠다. 어쩌면 회복 가능한 것은 오로지 그것뿐일지도 몰랐다. 자연. 그 외의 것들은 결코 가질 수 없는 기적이었다.   ‘요새’는 오래된 고성이었다. 아주 오래전, 씨족 사회였던 네르아를 통일시킨 최초의 정복자가 스스로를 왕이라 칭한 뒤 지은 최초의 문물이자, 왕정 국가를 상징하는 최초의 성이었다. 왕가는 곧 몰락했지만 화려했던 역사의 흔적은 남아, 서기장은 그 땅을 요한에게 주었다. 그리하여 요새는 요한이 가진 권력의 상징물이 되었다. 또한 서기장의 야욕을 읽을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서기장의 속내는 연합국을 최대한 압박하여 자신과 체제의 안전을 보장받는 것에 있었다. 그러므로 요한에게 그 성을 준 것은 앞으로 모든 일은 바로 국경의 코앞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과 같았다. 혹여 자멸을 하더라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암시. 적이 반보 다가온다면 자신은 한 뼘 더 다가가고야 말겠다는 의지였다. 요한은 라울에게서 받은 성의 내부를 뜯어고쳤다. 성의 웅장하고 고상한 느낌은 살리되 전쟁 시 침략할 수 없는 요새가 될 수 있도록 실내를 얽히고설킨 벌집처럼 만들었다. 안에는 수백 톤의 미사일과 군용차, 군용기를 실을 수 있는 격납 창고, 그리고 수천의 군사를 먹여 살릴 수 있는 비상식량을 가득 저장한 식량 창고, 야전 병원으로 쓸 수 있는 최신 의료 기기와 시설들, 핵탄두에도 견딜 수 있는 지하 벙커와 해안가로 탈출할 수 있는 비상 통로를 정비했다. 그리고 또 하나, 요한은 전쟁이 터졌을 때 병사의 가족과 빅토리아시의 시민들이 3년간 먹고 생활할 수 있는 거대한 지하 도시를 건설해 두었다. 지상의 안락함을 재현하기 위하여 일조량을 계산하여 등을 설치하고, 창밖에 모형의 숲을 조성해 두었다. 사샤가 머문 곳은 그중의 일부로서 어떨 때는 실험실이, 어떨 때에는 감옥이, 또 어떠한 경우에는 수백의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도시로 쓰일 수 있는 공간이었다. 사샤가 그곳에 머물기 바로 전, 그곳은 실험실로 쓰였다. 몇몇 부랑자들을 데려와 ‘제한적’이지만 깨끗한 잠자리와 음식, 규칙적인 일조량을 제공하였을 때 사람들은 과연 그 환경에 만족할지, 아니면 좀 더 많은 것을 원할지, 자유를 갈망할지 아니면 안락한 그 생활을 유지하려 할지 실험했다. 처음에는 모두가 평화로웠다. 사람들은 서로의 이름과 출신지를 묻고, 함께 대화를 나누며 첫 몇 주를 지냈다. 그다음 주, 서로 편을 갈라 서로를 음해하였다. 그다음 주, 작은 말다툼이 불씨가 되어 서로 싸우기 시작했고 그다음 주, 살인과 폭력이 일었다. 사람들은 힘이 세고 다소 강압적인 자를 우두머리로 세워 그를 의지하였고 그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에 도전하는 자는 패배하여 죽임을 당하거나, 혹은 성공하여 그 자리를 꿰차고 전임자를 죽였다. 에덴의 동산처럼 평화로웠던 실험실은 인간의 본능에 의해 끔찍한 살육과 더러운 욕망의 구덩이로 변한 것이다. 그리하여 요한은 실험실에 갇혔던 모든 포로를 죽임으로써 그 실험을 마무리 지었다. 그 이후, 꽤 오랫동안 비어 있었던 그곳에 최초로 들어간 것이 사샤였다. 혼자 남겨진 그녀는 첫 주는 공포에 휩싸여 소동을 일으키며 자해를 시도했고 인형을 넣어 준 뒤에는 그 아이를 돌보는 데 온 정신을 쏟았다. 그렇게 시간이 소진될수록 사샤는 인형에 의지했고 갇힌 자신의 처지를 ‘보호’라 망각하며 그 안락함을 지키려 노력했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망각이란 도구를 사용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렇게 해서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말이다. 그래서 사샤는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가진 인형이 사람이라는 사실을 망각하였다. 그에게도 생각이 있고, 바람이 있으며, 그 역시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려고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그녀는 망각에서 비롯되는 애정과 헌신을 소모했다. 그 끝에 어떤 결말이 도사리는지는 이제 그녀가 누구보다도 잘 알게 되었을 것이다. 요새에 도착하자마자 요한은 사샤가 머무는 3층의 장교 입원 병동으로 향했다.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보안이 잘 되었고, 자신과 디터 이외에는 사용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없으니 사샤를 외부로부터 격리하여 치료하기에 알맞은 공간이었다. 사샤가 머문 1인 병실을 열자마자 요한이 목격한 것은 디터가 전한 대로 구역질을 하며 말간 위액을 토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식판에 차려진 신선한 음식에는 손을 댄 흔적이 전혀 없었고 그녀가 토한 위액에 잔뜩 거품이 끼어 있었다. 이미 위장이 텅텅 빈 지 오래라는 소리였다. 간호 장교는 요한을 보자마자 어찌할 줄 몰라 하며 허둥대다가 거수경례를 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임무는 사샤에게 밥을 먹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다. 요한이 장갑과 블레이저, 모자를 차례대로 벗어 옷걸이에 걸 동안 그녀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숨도 쉬지 않았다. 병실은 그렇게 한참 동안 침묵에 휩싸였다. 요한은 별말을 하지 않고 손가락만 까딱거렸다. 장교는 곧바로 그의 뜻을 알아들었다. 그녀는 인사를 하고 병실에서 나갔다. 딸깍. 문이 닫혔다. 사샤는 토사물을 바닥에 쏟아 놓고 그대로 주저앉아 침대에 기대었다. 뼈가 없는 연체동물처럼 축 늘어진 몸을 요한이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사샤는 금세 힘을 잃고 다시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사샤.” 반응이 없었다. 눈을 뜰 기력조차 없어 보였다. 요한은 단추를 풀어 셔츠 소매를 걷어붙였다. 사샤를 내려다보는 눈이 무겁고 차가웠다. 그는 늘어진 사샤의 몸을 안아 푹신한 소파에 앉히고 식판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사샤는 음식 냄새를 맡고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독이 든 음식을 입안에 쑤셔 넣던 사람이다. 그것을 먹으면 괴롭다는 것을 알면서 말이다. 음식에 대한 거부는 벨이 죽은 직후부터였다. 삶을 포기하려는 의지는 이런 식으로 나타났다. 본인도 어쩌지 못하는 병적인 증상으로. 요한은 그녀의 얼굴이, 멍하니 벌어진 거칠한 입술이, 생기를 잃어버린 눈동자가 죽음의 언저리를 맴돌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죽음을 구걸하며 염원하던 때를 지나면 제 몸이 말라붙을 때까지 모든 것을 자포자기하는 때가 온다. 그것이 삶을 놓아 버린 자의 마지막 모습이 되는 것이다. 요한이 두툼한 고기 한 덩이를 엄지손가락 한 마디만 하게 잘라 그녀의 얼굴에 디밀었다. 사샤는 구역질이 올라와 제 입을 막고 신음했다. “먹어.” “역…… 역겨워…….” 요한이 사샤의 손을 끌어 내리고 그녀의 턱을 쥐었다. 지체가 없고 무척이나 거친 손길이었다. “먹어.” 사샤가 손을 내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요한은 그녀의 턱이 꺾일 때까지 소파에 짓누르고 다시 음식을 들이댔다. “먹어. 사샤.” “시…….” 입이 벌어지자 음식을 재빠르게 구겨 넣었다. 다물려는 입술과 이 사이로 음식을 쑤셔 넣는 그는 자비가 없었다. 육체적인 싸움에서 사샤는 결코 그를 이길 수 없다. “먹어.” 요한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어금니를 물고 다시 말했다. “먹어!” 그러나 차마 씹기도 전에 토사물이 올라왔다. 사샤의 배 속을 긁고 올라온 위액이 그녀의 가슴을 거쳐 목젖을 치고 울컥하는 소리와 함께 입안에 고였다. 요한은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우……. 우읍…….” “먹어. 사샤. 다 삼키는 거야.” 삼키지 못한 음식과 쓰디쓴 위액을 입안에 터질 듯이 담고 사샤는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콧물과 눈물이 지저분하게 흘러나왔고 그녀의 야윈 몸이 헐떡거리며 떨었다. 그러나 요한은 그녀의 몸을 더 강하게 압박할 뿐이었다. 살리겠다는 것이 아니라 마치 그렇게 죽이려는 듯. “삼켜, 사샤.” 괴로워. 괴로워, 숨을 쉴 수 없어! 죽을 것 같아! 괴로워! 요한! 그녀는 요한의 팔뚝을 때렸다. 툭, 툭, 힘없는 손이 공중을 휘젓다가 몇 번, 요한은 절박하게 외쳤다. “사샤!” 덜컥 놀랐고, 그리고 마침내 괴로움에 몸부림치다 꿀꺽, 사샤는 제가 뱉어 낸 것과 요한이 준 고깃덩이를 같이 삼켰다. 째깍, 째깍, 시간이 갔다. 요한의 손목에서 초침 소리가 덧없이 울렸다. 출렁이던 것이 질긴 고기에 눌려 배 속으로 가라앉았다. 이제야 살 것만 같은, 또는 죽음을 앞둔 자가 느끼는 쾌락과도 같은 평화가 찾아왔다. 요한이 천천히 그녀의 입에서 손을 뗐다가 그녀가 쿨럭! 하며 몸을 숙이려 하자 다시 입을 틀어막고 움직이지 못하게 눌렀다. “뱉으면 안 돼.” “…….” 사샤는 그의 오만하고 차가운 얼굴을 보았다. 그의 눈이 얼마나 추운 색을 하고 있는지, 그의 하얀 얼굴이 얼마나 시린지. 햇살을 받은 그가 얼마나 얼음덩어리처럼 딱딱하고, 날카로운지. 그는 숨을 쉬고 있었다. 조금만 더 귀를 기울인다면 그의 규칙적인 심박 수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박제해 놓은 얼음덩어리 같은 그도 사람이었다. 그에게도 심장이 있음이 새삼 이질적이었다. 요한이 다시 천천히 손을 떼어 냈다. 그리고 사샤는 손을 들어 고양이처럼 손톱을 세우고 그의 얼굴을 단번에 긁었다. 증오와 원망을 실은 손끝은 아사 직전의 사람답지 않게 매섭고 날카로웠다. 그의 왼쪽 뺨에 붉은 선이 규칙적인 간격으로 선명하게 그어졌다. 그러나 요한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왜 그랬어.” 요한이 그녀에게서 한 발 물러섰다. 사샤는 한없이 야윈 몸을 소파에 기댄 채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연약하고 처절했다. “왜 그랬어, 왜 그랬어! 왜 그랬어! 왜! 왜!” 그는 제 왼쪽 뺨을 손으로 쓸어 보았다. 따끔한 통증은 있지만, 피가 배어 날 정도는 아니었다. “도와줄 수 있었잖아. 그럴 수 있었잖아! 내가 그렇게 빌었는데! 말려 줄 수 있었잖아! 살려 줄 수 있었잖아! 그런데 왜 그랬어! 왜! 왜! 왜!” 사샤는 비명을 지르며 흐느꼈다. 맥없이 흐른 눈물이 푹 꺼진 눈가를 타고 툭 튀어나온 광대뼈 아래로 흘렀다. 요한은 그녀의 눈물을 지켜보았다. 모르겠다. 그녀가 무엇에 이토록 화를 내는지, 또 무엇을 이토록 슬퍼하는지. 저 눈물이 짤지, 달지, 아니면 그저 뜨거울지. “누굴? 수용소를 뛰쳐나온 포로를? 주인도 몰라보고 총을 겨눈 미친개를? 아니면, 동료에게 죄를 덮어씌우는 배신자를?” 물론 그녀에게 화가 났어. 배신당했단 생각에 슬프기도 했어. 하지만 죽기를 바라지는 않았어. 죽기를 바란 건 나였어. 나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하지만 그녀에게는……. “그녀에겐 가족이 있었어……. 가족이. 가족이…… 있었단 말이야. 나 같아도 그랬을 거야. 나 같아도.” 가족이 있었다면. 내게도 있었다면. 내게도 삶의 희망이 있었다면 다르지 않았으리라. 살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면. 꼭 봐야 할 사람이 있었다면. 구해야 할 사람이 있었다면. 아아. 그래. 꼭 보살펴야 할 사람이 있었다면. 아아. 그래. 벨. 네가 유일한 내 희망이었지. “집어치워. 사샤 로랑.” 그는 차갑게 씹어 뱉었다. 얼굴에 언뜻 조소가 비쳤다. “네가 감히 누굴 동정해. 멍청한 계집애. 네 꼴을 봐.” “…….” “고아에, 국적도 없고, 피난민 주제에 이용당했다가 보기 좋게 버려지고, 가지고 놀라고 준 애완견한테 물려서 죽기 직전인 네게 동정받는 처지라니. 그 꼴이 퍽이나 우습지.” “…….” 요한은 포크로 고기 한 덩이를 쿡 찍었다. “물론 뒈진 년은 모르겠지만 말이야.” 사샤가 벌떡 일어나 그에게 달려들었다. 요한은 그녀를 소파에 찍어 눌렀다. 단 한 손만으로였다. 사샤는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그를 향해 눈을 치떴다. “당신이 죽었으면 좋겠어.” 요한이 소리 내 웃었다. 차갑던 얼굴에 일순 미소가 감돌았다. 사샤는 그것에 감추어진 광기를 읽었다. 그 미친 광기! 그 지겹고 질리는 광기! 그 때문에 벨이 죽었어! 그것 때문에 나도! 내 영혼도 죽었어! “당신도 디터도 모두 다 죽었으면 좋겠어. 모두 다! 끔찍하게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먹어.” 그는 웃음기를 거둬들이지 않은 채 고기를 내밀었다. 사샤가 그것을 손으로 치려는 것을 요한이 재빠르게 피했다. “먹어.” 그 먹으라는 말에 넌덜머리가 난다. 무언가를 씹고 삼키는 것에 넌덜머리가 난다. 죽은 고깃덩어리 같았던 벨의 시체, 그녀의 허물어진 손끝까지도 모조리 기억이 나! 그 핏물이 튄 고깃덩어리! 그 영혼이 빠져나간 살덩어리! 왜! 왜! 대체 왜! 요한이 넋이 나간 사샤의 턱을 쥐고 다시 고깃덩어리를 쑤셔 넣었다. 구역질이 치밀어 오른다. 부글거리며 목젖을 치고 올라오는 것들에 사샤는 다시 잠식되어 갔다. 고통은 의식을 흐릿하게 만들고 오로지 그것을 견뎌 내려는 본능만을 끄집어냈다. 요한이 다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삼켜.” “우욱…….” “삼켜야지. 사샤.” 오늘 종일 그렇게 보낼 작정이었다. 요한은 그녀의 입에 식판에 있는 고기와 채소를 모두 쑤셔 넣고 그것을 삼키게 하는 것을 오늘의 일과로 정해 두었다. 이것은 고문과 흡사했다. 그리고 그것은 디터보다 요한이 더 잘하는 일이었다. 사샤는 간신히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과 고깃덩어리를 삼켰다. 작게 자른 덩어리는 씹지 않고도 무난히 목구멍을 통과하여 배 속으로 가라앉았다. “날 그냥 죽게 내버려 둘 순 없어?” 자존심을 세우려 애를 썼지만 떨리는 목소리는 그것을 배반하였다. 너무나 나약해 비참한 목소리가 났다. 요한이 고기 한 덩이를 더 포크로 찌르며 대답했다. “넌 죽을 수 있을 때 죽어. 그리고 그걸 결정하는 건 네가 아니라 나야.” “……알고 있는 건 모두 말했잖아. 날 살려서 얻을 게 하나도 없잖아.” 요한은 웃었다. 이번에는 소리 죽여 작게. 그러나 포크를 잡아 휙휙 돌리는 그의 행동은 능숙한 백정이 짐승의 가죽을 가르기 전 즐기는 유희처럼 손에 잘 익어 있었다. “내가 생각해 둔 게 있지. 사샤.” “…….” 요한이 덩어리를 내밀었다. “그러려면 너는 지금보다 훨씬 보기 좋아야 해. 그러니까 뭐든 씹어서 삼키라고.” “싫어.” “그러면 나랑 종일 이러고 있는 거지. 네 목구멍에 깔때기를 쑤셔 넣고 한꺼번에 들이붓는 방법도 있어. 하지만 그건 좀 추하잖아. 안 그래?” “…….” “말을 잘 듣는 게 좋을 거야. 사샤. 왜냐하면 모든 도첸인을 포함해 이 요새 안에 있는 이들 중에 그나마 당신을 보살펴 주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거든.” “…….” “그러니 먹어.” “나도 당신의 인형인 거야? 벨이 그랬듯…….” “아니. 너는 내 개야. 말 잘 듣는 충견이 될지 주인을 무는 광견이 될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당신을 죽이겠어.” “그래. 그게 훨씬 나아. 난 능동적인 개를 좋아해.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지. 그러다 보면 어느새 말 잘 듣는 애완견이 되어 있고 말이야. 그러니 정신 바짝 차려. 나는 무언가를 길들이는 데 제법 소질이 있거든.” “…….” 사샤는 힘껏 그를 노려보았다. 죽은 시체 같던 얼굴에 처음으로 붉은 혈기가 돌았다. “어서 먹어, 사샤. 날 죽이려면 일단 살아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 사샤는 요한이 내민 고깃덩이를 씹었다. 우욱 하고 올라오는 신물을 삼키고 고무를 씹는 것처럼 힘겹게 턱을 움직였다. 요한은 안심한 듯 웃었다. 그것이 첫 단계다. 의지를 부여하고 목적을 찾게 하고 그리하여 은밀히 원하는 것을 쟁취하는 것. 죽음을 위해 삶을 각오하는 것은 분명 우스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깊은 증오는 어떤 이에게는 가장 큰 불꽃을 피우는 염원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먹어. 사샤. 네 증오가 너를 어디로 이끄는지, 그 증오가 너를 얼마나 키우는지 보여 줘. 사샤는 그가 주는 고깃덩어리를 모조리 해치웠다. 적응하지 못한 몸이 끊임없이 구역질을 해 대도 먹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살기 위해 먹는 것이 아니라 투쟁하기 위해 먹었다. 그에게 자신의 증오가 얼마나 뿌리 깊은지 보여 주고 싶었다. 그러니 그녀가 씹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요한의 몸이요, 디터의 몸이었다. 그것이 눈앞의 남자에게 아무런 타격이 없다 해도. 그의 도기 같은 얼굴에 흠집 하나 남길 수 없다 해도 사샤는 입안에 들어오는 것을 짓씹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언젠가, 언젠가 그의 얼굴에 금이 갈 수 있게 하리라, 그리하여 그의 육체를 씹어 짓이기리라 다짐하고 또 맹세했다.   다음 날부터 사샤는 간호 장교가 가지고 오는 음식을 남김없이 해치웠다. 게워 낸다 해도 반드시 그릇은 비웠다. 그녀가 음식을 먹은 뒤로 요한은 한동안 사샤를 찾지 않았다. 다만 간호 장교로부터 그녀가 식사했는지에 대한 여부는 꼬박꼬박 보고받았다. “식사 중에 자주 포크와 나이프로 고기를 난도질하거나 합니다.” 요한의 집무실 안에서 간호 장교가 경직된 자세로 말했다. “왜 그러는지 물어봤더니 소장님을 죽이는 연습을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반쯤 정신이 나간 얼굴이었습니다.” 요한은 산더미 같은 서류를 책상 위에 방치한 채 비취색 안료로 섬세하게 장식된 청자 그릇을 이리저리 살폈다. 무심하나 지루하지는 않은 얼굴이었다. “네가 보기엔 어때?” “무엇을 말씀입니까?” “그 여자, 꾸며 놓으면 제법 예쁠 것 같지 않아?” 장교는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요한의 뜻을 헤아리기에 그는 너무도 어렵고 무서운 존재였다. 말을 꾸미거나 보탤 수는 없었지만, 자신의 견해나 진심을 이야기하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더듬더듬 사샤의 얼굴을 떠올렸다. 푹 꺼진 눈과 볼. 지저분하게 엉킨 붉은 머리,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로 앙상하게 마른 몸. 볼품없이 살이 빠졌어도 그녀는 추하기보다 야위어 보였고, 야위기보다는 연약해 보였다. 앙상한 얼굴에 살이 오르고 그녀의 뺨이 붉게 물들면 고혹적이고 신비한 미인의 모습이 될 거란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네, 아마도…… 아마도, 그럴 겁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그녀를 이렇게 만드는 거야.” 요한은 손에 든 청자를 흔들었다. “값비싸고 흠집 하나 없이 깨끗하고 화려하게.” “네. 네. 그렇게, 그렇게 하겠습니다.” 디터는 요한의 옆에 서 있다가 간호 장교에게 나가라는 턱짓을 했다. 그녀는 경례를 하고 조용히 문밖으로 나갔다. 디터는 문이 닫히자마자 여전히 청자에 골몰하고 있는 제 상관을 향해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뭘?” “사샤 로랑에 관해서 말입니다. 지금껏 묵묵히 시키는 대로 해 왔습니다만, 소장님의 뜻을 잘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녀는 포로였다. 고문과 매질 후 수용소에 가둔 후 죽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그녀에게 맞는 처사였다. 그러나 요한은 그녀를 요새로 데려와 깨끗하게 치료해 주고 지하 벙커에 데려와 먹여 주고 재워 주고 심지어, 탈출을 감행한 그녀를 장교 병동으로 올려 보내 무려 간호 장교를 시켜 살뜰히 챙겨 주고 그 보고까지 듣고 있다. 디터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보였다. “그녀를 보반 의원과 결혼시킬 생각이야. 디터.” 뭐라고? 디터는 미간을 구겼다. 결혼? 보반과? 디터는 그가 얼마 전 보반을 만나러 빅토리아 감옥을 방문했던 일을 떠올렸다. “보반 의원은 유부남입니다. 게다가, 그는 반역죄로 처형을 앞두고 있지 않습니까?” “이혼시키면 돼, 처형이야 당분간 유예시키면 되고.” “대체…….” 대체 어쩌려고 이러는가. 요한은 그릇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공화당 의원과 불륜을 저지른 미모의 여비서. 꽤나 자극적인 타이틀이 될 거야.” “그녀는 연합국의 첩자입니다! 당장 죽여 마땅한 년이라고요!” “그러니까.” 바로 그것이었다. 그녀가 첩자라는 것. 그것도 쓰고 버리려는 일회용 쥐새끼였다는 것. “죽은 줄 알았던 여자가 어느 날 갑자기 멀쩡히 살아서 적국의 권력자 옆에 서 있다고 생각해 봐. 그것도 화려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 “미칠 노릇이겠지. 안 그래?” “그러니까, 역으로 그 여자를 이용해 연합군을 자극하자는 겁니까?” “그냥 그놈들 똥줄 타는 꼴 좀 보자는 거지.” 요한은 환하게 웃었고 그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다. 디터는 그것이 광기라는 것을 안다. 그는 도첸국의 중요한 자리를 꿰찼지만 체제의 수호나 번영에 그다지 큰 관심을 두는 것 같지는 않았다. 본능적으로 무엇이 득이고 실인지를 알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며 가끔은 이런 식으로 자신의 유희를 위해 골몰한다. 제 수하들을 장기 말처럼 이용하고 수틀리면 그 판을 엎어 버리는 폭군이며 죽음이나 고통을 두려워하지도 않는 광증 환자였다. 그래서 그는 강하고 그래서 모두가 그를 무서워했다. 그렇기에 모두 그의 곁에 가까이 있고 싶어 했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는 태풍의 눈이라는 것을. 그의 옆에 가까이 붙어 있으면 있을수록 파괴와 죽음에서 멀어진다는 것을. “날 믿어 봐. 군중은 그 여자에게 사로잡힐 거야. 그녀는 훌륭한 체제의 선전 도구이자, 도첸인의 안줏거리가 될 거야.” “이 요새의 군인들 중 그녀를 본 자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계획’이라는 것이 새어 나갈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아마 그녀가 누군지 모를 거야. 지금과는 전혀 다른 우아한 숙녀로 탈바꿈할 테니까.” “요새 내에 여전히 밀고자가 숨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반드시 밖으로 새어 나갈 겁니다.” “더 많은 소문을 퍼트리면 돼. 소문은 많으면 많을수록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기 어려워지니까.” “하지만 라울 서기장님이…… 어떻게 반응하실지…….” “그는 체제에 도움이 된다고 하면 화면 가득 소똥을 뿌려 놔도 기뻐할 거야.” 안다. 라울 서기장은 첩보에 대한 대외 전략뿐 아니라 군사, 자금, 언론까지 요한에게 의지하려 한다는 것을. 라울이 요한과 공유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핏줄에게 나누어 줄 통치권뿐이었다. “그 이후에는 어쩌실 겁니까? 그 여자를 다 이용하고 난 다음 말입니다.” 그 이후? 요한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 이후 뭘 생각해야 하는가. 그녀의 쓰임이 다한 이후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무심하게 찻잔을 보며 중얼거렸다. “글쎄……. 죽이면 되려나.” *** 꾸준한 음식 섭취로 사샤의 몸무게가 정상으로 돌아올 때쯤 요한은 몇몇 사람을 고용해 그녀의 외형을 공들여 가꾸게 했다. 매일 그녀의 몸무게와 건강 상태를 체크하고 필요에 따라 다른 분야의 전문가를 고용해 그녀의 건강과 피부를 관리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요한은 한 번도 직접 사샤를 찾아가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사샤의 증오가 무럭무럭 자라 요한의 외형을 사람이 아닌 괴물로 바꿀 때가 되어서야 요한은 사샤에게 찾아왔다. 그녀는 막 병동에서 별실로 옮겨져 미용사의 손에 제 머리를 맡기고 있었다. 미용사가 사샤의 손에 커다란 손거울을 쥐여 주었는데 사샤는 그것을 멍하게 들고 있다가 반사된 거울 안에 요한이 나타나자 고개를 휙 돌렸다. 미용사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빗질하다 말고 사샤를 따라 몸을 돌렸다. “안녕하세요. 부인.” 요한이 미용사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자 그녀의 얼굴이 전에 없이 환해졌다. 흥분한 10대의 소녀처럼 볼에 홍조까지 번졌다. “안녕하세요. 소장님. 안 그래도 뵐 수 있을지 궁금하던 차였는데 이렇게 오셨네요.” 그는 미용용 가운을 두른 채 의자에 앉아 저를 매섭게 쏘아보는 사샤를 살폈다. 방 안에 불편한 침묵이 감돌았고 미용사는 그것을 타파하기 위해 사샤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말했다. “일단 이 아가씨의 머리카락을 좀 자를 계획이에요. 얼마나 엉망으로 염색을 해 두었는지 머리카락이 말도 못 하게 상했어요.” 값싼 탈색약과 염색약을 쓴 게 틀림없었다. 미용사는 모근 쪽에 올라온 갈색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이렇게 예쁜 머리를 엉망으로 만들다니. 하지만 걱정 마요. 아가씨. 내가 원래대로 되돌려 놓을 테니.” 미용사는 자신감에 찬 얼굴로 사샤의 어깨를 몇 번 주무르더니 빗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성스럽게 빗어 내리기 시작했다. 요한은 테이블로 뚜벅뚜벅 걸어가 그 위에 군모를 내려놓고 의자를 당겨 앉았다. 딱 사샤가 마주 보이는 자리였다. 사샤는 하루에도 수십 번 그를 찔러 죽이는 상상을 했다. 칼로 그의 배를 가르는 생각을 했다. 그의 몸에서 나오는 뜨거운 피가 제 몸을 적시는 상상을 했다. 그를 찌르고, 가르고,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상상을 포크로, 나이프로, 그리고 제 손으로, 하루에 수십 번, 수백 번 연습했다. 사샤는 미용사가 늘어놓은 여러 가지 크기와 모양의 가위를 훑어보았다. 그중에 가장 길고 가장 날카롭고 잘 벼린 가위로 그의 피부를 찌르는 상상을 했다. 지금 벌떡 일어나서 그에게 달려들면 어떨까. 그의 배를 가를 수 있을까. 이 가위를 들고 그에게 달려들 동안 그가 꼼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그를 찌를 수 있을까. 그전에 그가 피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그것보다 더 빨리 움직일 수 있을까. 요한은 사샤가 가위에 골몰하고 인상을 찡그리고 입술을 씹는 모습을 관찰했다. 그녀의 생각은 그녀의 시선이 저를 쳐다보며 흠칫 놀랐을 때 더욱 명확하게 읽을 수 있었다. 요한은 그녀를 향해 살짝 턱을 내밀었다가 곧 미소 지었다. 사샤는 그가 제 생각을 모두 읽었음을 알아차렸다. 그의 거만한 미소와 여유로운 동작이 그것을 알려 준다. 그녀는 제 주먹을 꽉 쥐었다. 머릿속에서 멋대로 날뛰던 상상은 빛을 잃고 끊어졌다. 오로지 그를 향한 뜨겁고 맹렬한 감정만이 사샤의 가슴을 고통스럽게 두드렸다. 미용사는 가위를 집어 들었다. 사샤가 요한의 뱃가죽을 뚫기에 알맞다고 생각한 가위였다. 사각, 사각, 철컥, 철컥, 노련한 가위질 소리가 규칙적으로 반복되었다. 사샤의 발아래로 핏빛처럼 붉은 머리가 툭툭 떨어졌다. 요한은 미용사가 선택한 길이보다 좀 더 짧은 머리를 원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요구했다. “거추장스럽게 날리지 않고 뒤로 묶기에 쉬운 길이면 좋겠군요.” “그러면 턱 선에 맞춰 좀 짧게 자르죠. 묶었을 때도 단정하고 풀었을 때도 치렁거리지 않으니까요.” 미용사가 다시 분주히 빗질했다. 사샤의 의견은 누구도 묻지 않았다. 사샤조차도 자신의 의견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미용사가 들려 준 거울은 바닥에 떨어진 지 오래였다. 다만 그녀는 눈앞의 남자, 저의 증오를 즐기는 요한을 노려볼 뿐이었다. 미용사는 수 시간을 들여 그녀의 머리를 원래의 색으로 복구시켰다. 상하고 갈라지고 마모된 머리카락은 모두 잘라 내고 예쁘게 빗질하여 롤로 말았다. 요한은 그 자리에 꼼짝없이 앉아 사샤가 머리를 말고, 피부를 정돈하고 고문의 흔적이 없어진 손톱을 말끔하게 정리하여 매니큐어를 바르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둘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흐르지 않았다. 요한과 사샤는 내내 침묵을 지켰고 떠드는 것은 미용사 하나뿐이었다. 아마 그녀에게는 무척 기괴하고 진땀 나는 현장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침착했고 자신이 맡은 일에 집중했다. 일주일에 한두 번 요새를 방문해 장교와 사병들의 머리를 매만지는 그녀는 입이 무척 무거웠고 또 신중했다. 과거 전쟁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그녀는 도첸을 위해 몇 번이고 국경을 넘나든 방첩부의 충실한 협력자였고 공화당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요한은 그러한 그녀를 믿었다. 인간으로서의 그녀를 믿는다기보다 라울을 신처럼 믿고 지지하는 그녀의 맹목적인 신념을 믿었다. 그것만은 거짓 없이 순수하고 올곧았다. 할 일을 마친 여자가 한동안은 머리를 감지 말고 지내라는 조언을 끝으로 제 짐을 챙겨 밖으로 나가자 이제 방 안에 남은 것은 사샤와 요한 단둘뿐이었다. “뭘 그렇게 끈질기게 쳐다봐. 당신은 할 일 없어?” 영원할 것 같던 침묵은 사샤로 인해 찰나에 깨졌다. 사샤는 제 관자놀이를 어루만졌다. 침묵에 짓눌리고, 증오에 짓눌리느라 두통이 왔다. 그녀는 그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요샌 당신이 내 주 업무이지.” 사샤는 벌떡 일어나 그를 외면했다. 계속해서 두통이 왔다. 빌어먹을 염색과 파마 액 때문이야. 아니 그의 저 속편하고 죄책감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목소리 때문이야. 그를 눈앞에 둔 탓이야. 그와 말을 섞은 탓이야. 이 모든 건 내 탓이야! 속이 매스껍고 어지러워 견딜 수가 없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카펫 위를 서성였다. 그 모습이 퍽 초조하고 위태롭고 불안정해 보였다. 그러더니 이내 그녀는 벼락처럼 요한에게 달려들었다.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흘리며 쏜살같이. 그리고 요한은 웃음을 터트렸다. 술래잡기하다가 잡힌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의자가 뒤로 넘어갔고 사샤는 그의 위에 올라타 그의 단단하고 기다란 목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엄지와 검지의 사이에 그의 목젖이 느껴졌다. 사샤는 이를 사리물었다. 죽어. 죽어! 죽어! 요한의 이마에 핏줄이 솟았다. 피가 몰려 얼굴이 점점 더 벌게졌지만 고통은 눈곱만치도 보이지 않았다. 숨이 껄떡껄떡 넘어가는 순간에도 그는 즐거워 보였다. 요한은 잔뜩 성이 오른 사샤를 더 도발하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이런, 정말이지 죽을 것 같군. 숫자를 한 100까지 세고 난 다음에.” 이 개자식! “으.” 그녀는 도사견처럼 으르렁거렸다. 그의 목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잘 다듬어진 손끝이 그의 하얀 피부를 파고들었다. 요한이 천천히 그녀의 손목을 쥐었다. 손과 손이 맞부딪혔다. “아니, 200까지 세어야 하려나?” 깃털처럼 부드럽게 얹어진 손은 그러나 단시간에 그녀의 힘줄이 오그라들 만큼 강해졌다. “아윽!” “어떻게 된 거람? 내 목을 죽을 때까지 조이려던 거 아니었어? 이래선 오늘 하루가 지나도 날 못 죽여, 사샤.” 그러면서도 그는 사샤를 채찍질했다. 미친 듯이 질주하는 말의 엉덩이를 더 후려치듯. 이성을 잃고 벼랑 끝으로 떨어질 때까지 그는 계속해서 몰아붙였다. “으으으!” “네 손이 떨리기 시작하는데. 아마도 벌써 힘을 다 쓴 모양이야.” 이미 두 손은 요한의 목에서 떨어져 공중으로 밀려 나간 지 오래였다. 그러나 사샤는 증오로 이성을 잃었다. 그녀는 두 손이 묶인 대신 힘껏 머리로 박았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마침내 그가 ‘윽’ 하고 단발의 고함을 내질렀다. 그는 고통으로 콧잔등을 잠시 찌푸리더니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도저히 싸움이 되지 않았다. 그저 그를 자극하고 즐겁게 해 줄 뿐이었다. 요한은 재빨리 몸을 굴려 그녀를 제 아래에 깔고 누웠다. 그의 팔꿈치가 사샤의 쇄골과 목을 눌렀다. “빌어먹을, 사샤.” 요한은 숨을 들이켜고는 다시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목 뒤로 피 맛이 넘어갔다. 그는 팔뚝으로 코 아래를 문질렀다. 충격으로 코피가 난 것이다. “머리가 단단한 것만은 인정하지. 네 악력은 닭 모가지도 못 비틀 정도지만 말이야.” 거친 호흡이 좁디좁은 둘의 틈 사이에 섞였다. 삽시간에 온도가 데워졌다. 비칠비칠 이마에서 더운 땀이 흘러내렸다. 사샤의 하얀 뺨이 어느새 붉어졌다. 부풀어 오른 입술 사이로 전에 없이 뜨겁고 향긋한 숨 내음이 오르내렸다. 겹쳐진 그의 몸은 매우 단단했다. 그리고 간신히 숨을 쉴 수 있을 만큼 무거웠다. “제 몸의 두세 배는 무겁고 큰 사내에게 맨손으로 덤벼들다니. 내가 마음만 먹었다면 너는 벌써 죽었어.” “…….” 그는 사샤의 목을 누른 팔뚝에 더욱 힘을 주었다. 목이 눌리며 그녀의 입 밖으로 ‘컥’ 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간단해. 여기서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돼. 네 얼굴이 하얘졌다가 파래졌다가 검게 변할 때까지.” 사샤는 제 목젖을 찍어 누르는 그의 두껍고 단단한 팔뚝을 쥐어뜯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안다. 그저 고통스러움을 견디지 못해 허우적대는 몸부림일 뿐. 몇 초 후 요한은 그녀를 놓아주었다. 사샤의 몸은 반 바퀴 굴러 카펫 위에 엎드렸고 쉴 새 없이 기침해 댔다. 카펫 위로 눈물과 콧물과 침이 흘러내렸다. 요한은 블레이저 안에서 수건을 꺼내 제 얼굴에 묻은 피를 닦고 먼지를 털어 냈다. 사샤는 카펫을 긁으며 고통스럽게 떨었다. 고통에 억눌린 신음과 흐느낌이 듣는 이의 귀를 불쾌하게 만든다. “간신히 손본 머리가 엉망이 됐군. 다시 손봐 달라고 해야겠어.” 사샤는 고개를 휙 들었다. 그녀는 분노에 완전히 미쳐 버렸다. 아귀처럼 벌떡 일어나 다시 요한에게 달려들었다.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이번엔 그의 피부를 아무 곳이나 물어뜯을 작정이었다. 가능하면 그의 목을 물어 동맥을 끊어 놓고 싶었다. 근육과 혈관을 씹어 뱉어 버리고 싶었다. 풀썩, 둘의 몸이 침대 위로 쓰러졌다. 이번에도 아래에 눌린 것은 사샤였고 그 위를 누르는 것은 요한이었다. 그녀는 고양이처럼 손톱을 세웠다. 요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빠져나갔다. 그는 버둥거리는 사샤의 두 손을 잡아 침대 위에 눌렀다. 아아아아악! 하고 사샤가 비명을 질렀다. “그만! 그만해! 쉬!” 요한이 남은 한 손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넌 날 죽일 수 없어!” 우우웁! 그녀가 몸을 틀며 괴로워했다. “너 같은 얼뜨기는 날 절대 죽일 수 없다고! 사샤! 이 빌어먹을 돌머리!” “우웁!” 요한이 더 힘주어 그녀를 짓눌렀다. “날 죽이고 싶댔지? 내 목을 비틀고 싶어? 그래? 그럼 힘을 길러.” “…….” “잘 벼린 칼을 비밀스럽게 숨겨! 빌어먹을 닭의 모가지라도 비틀어 버릴 만큼 체력을 길러! 스테이크가 아니라 살아 있는 동물의 내장을 가르는 법을 배워! 단 한 발의 사격으로도 관자놀이를 관통할 만큼 정밀한 사격 기술을 익혀! 그때까지 쥐 죽은 듯 숨는 법을 터득해! 상대방이 방심할 때까지 인내해!” “…….” “날 죽이고 난 후에도, 네가 살아남을 방법을 배워.” “…….” 사샤가 몸부림을 멈추었다. 그녀의 큰 눈이 가득 요한을 담았다. 차가운 눈동자, 차가운 머리카락. 뜨거운 피부, 더운 열기, 맹렬한 언어들. “나를 유혹해. 사샤. 모두가 너를 믿게 만들어. 네가 가진 것을 이용해. 웃고, 우는 그 어느 순간에도 절대로, 절대로 진심을 내보이지 마.” “…….” “그래야만 비로소 네가 원하는 것을 얻을 거야.” 그는 사샤에게서 물러났다. 그러나 사샤는 그가 자신의 모자를 챙겨 방을 나가는 순간까지도 날개를 뚫린 나비처럼 두 팔을 늘어뜨린 채 침대에 박제되어 있었다. 얼이 빠졌다. 그가 내뱉은 말들을 되씹었다. 귀에서 이명이 들렸다. 무섭고, 두렵고, 무겁고, 잔인한 감정에 짓눌려 그녀는 여전히 헐떡이며 가쁜 호흡을 내뱉었다. “약을 끊은 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다고 들었어. 자기 전에 산책할 수 있도록 해 주지. 따듯한 우유 한 잔도.” 요한은 사샤의 방문을 닫고 나와 장교 병동의 층계참을 내려갔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리며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제대로 매만졌다. 집무실에 거의 다다랐을 때 그는 제 방을 향해 오는 디터와 마주쳤다. “소장님.” 디터는 기껍게 그를 불렀다. “종일 찾아다녔습니다. 어디 계셨습니까?” 그의 외형을 살피던 디터가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소장님, 몰골이…….” 그의 목은 누군가에 졸린 듯한 흔적이 명확하게 나타났다. 콧잔등이 부어 있었고 인중에 어렴풋이 피의 흔적도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반달 모양의 손톱자국들. “대체…….” 디터는 아연실색했다. 요한은 턱을 들고 제 목을 이리저리 어루만져 보았다. 사샤가 손톱으로 파 놓은 곳이 닿을 때마다 따끔따끔 간지러운 통증이 일어났다. 그는 그 기묘한 상처들을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해 두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전환했다. “보반의 치료는 얼마나 걸리지?” “적어도 한 달은 걸린다고 합니다.” “대충해서 내보내라고 해. 어차피 노인네이니 거동이 좀 불편해 보여도 어색하지는 않겠지.” “네.” 요한은 그를 앞질러 걸었고 디터는 그림자처럼 그의 뒤를 쫓았다. 어스름히 해가 지평선 밑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깊은 밤이 되어도 사샤는 좀처럼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낮의 소란이 계속해서 그녀를 괴롭혔다. 신경이 날카롭고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를 향한 증오와 저를 향한 혐오가 그녀의 몸과 마음을 갉아먹고 있다. 사샤는 무기력하게 침대에 누워 찌그러진 총알이 든 유리병을 규칙적으로 흔들었다. 제 어깨에 구멍을 냈던 금빛의 총알. 딸그랑, 딸그랑, 소리는 종을 울리는 것처럼 규칙적이었다. 총상에서 어느 정도 회복되고 나자 간호 장교는 더는 사샤에게 약을 처방해 주지 않았다. 사샤는 그 이후로 제대로 밤잠을 이룬 적이 없었고 늘 머리가 아팠다. 겉은 멀쩡해지고 있지만 속은 완전히 망가져 가고 있다는 걸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어디까지 추락할지 궁금했다. 밑도 끝도 없이 빠져드는 진창의 끝이 어딜 지 두렵기도 했다. 언젠가 이 속절없는 추락이 끝나기는 할까 그것도 마찬가지로 두려웠다. 똑똑똑, 누군가가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 방문이 낯설지 않은 시간이었다. 이 시간쯤이면 간호 장교가 늘 사샤의 상태를 보러 들어오곤 했다. 아니나 다를까, 문을 연 이는 예상대로 간호 장교였다. 그녀가 말했다. “사샤 양. 산책할 시간입니다.” 사샤는 그녀의 이름을 몰랐다. 알려 주려 하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다만 자신의 이름은 누구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비록 대하는 태도는 정중하여도 사샤가 자신의 처지를 늘 자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저와 친해지려 하지 않는 태도로 모두가 그것을 깨닫게 했다. “감기에 걸리면 안 되니 이걸 두르세요.” 그녀는 기계적으로 사샤의 몸에 담요를 둘러 주었다. 산책이라니. 그 남자의 한마디는 이토록 철두철미하고 빠르게 이루어진다. 그에 비해 자신의 처지는 어떠한가. 모멸감이 느껴질 정도다. “소장님이 사샤 양이 원하는 곳을 산책시켜 주라고 하시더군요. 어디를 둘러보고 싶으세요?” “글쎄요…… 어디를 갈 수 있죠?” “숲도 있고 가축을 기르는 목장도 있고 널따란 들판도 있어요. 꽃이 핀 정원도 있고요.” “목장이요. 목장이 좋겠어요.” “좋습니다. 가죠.” 장교는 오일 램프를 들고 그녀에게서 반보 물러서 자신을 앞질러 가길 기다렸다. 사샤는 그녀의 감시하에 층계를 내려갔다. 안뜰을 끼고 거대한 복도가 펼쳐졌다. 네모난 하늘에 별과 달이 떠 있었다. 사샤는 여전히 그곳에서 피비린내가 난다고 생각했다. 안뜰의 어딘가에서 벨의 피 냄새가 났다.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전히 그곳에는 그녀의 피가 흐른다. 탕. 탕. 신기루처럼 벨이 방아쇠를 당기는 소리가 들렸다. 디터가 그녀를 향해 쏜 총소리도. 이명이 고막을 흔들었다. 사샤는 점점 호흡이 가빠지고 눈앞이 흐려졌다. “이쪽이에요.” 장교가 복도의 끝에서 문을 열었다. 온갖 식재료의 냄새가 피비린내를 뒤덮었다. 사샤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간신히 비틀거리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구획이 나뉜 주방의 아치형 문을 몇 개나 통과했을까, 장교는 낡고 오래된 시종들의 부엌과 식당을 지나 곧장 축사로 안내했다. 닭과 돼지들의 배설물 내음이 훅 끼쳤다. 사샤는 숄을 여미고 장교가 연 문을 통과했다. 푸드덕거리는 날갯소리와 돼지의 울음소리, 어둠이 드리워진 축사는 낮과 밤의 구분이 없는 가축들의 소음으로 요란했다. 커다란 목장을 꽉 채운 그들은 먹고, 움직이고, 배설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 요새에는 얼마나 많은 군인이 살고 있죠?”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네요.” “그들을 먹이려면 하루에 수십 마리의 가축들을 도살하겠군요.” “병사들에게 먹일 군량은 수도에서 기차로 실려 와요. 이곳에서 기르는 가축은 오로지 장교를 위한 거예요.” “요한을 위해서군요. 당신도 이 가축을 먹나요?” “네.” “혹시…….” 사샤는 천천히 거위들의 우리를 지났다. 그들은 밝은 불빛 아래 꽥꽥 시끄럽게 울었다. “혹시 요한이 왜 나를 살려 두는지 알아요?” “아니요.” “날 죽이고 싶었던 적 없었어요?” “저는 의사예요. 사샤 양. 사람을 해치는 일은 하지 않아요.” “맞아요. 알아요. 나도 한때 그랬죠.” 사람을 죽이고 싶어지는 건 얼마나 쉬운지. 그 충동이 얼마나 강렬한지, 살육의 유혹은 얼마나 달콤한지. “…….” 사샤는 장교가 든 램프 빛에 비추어진 가축들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멍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럼, 혹시 닭 모가지 비트는 법 알아요?” “네?” “닭의 목을 비트는 법이요.” “……아니요.” 장교는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사샤는 닭장 앞에 멈추어서 기다랗고 호화스러운 깃털과 주머니를 자랑하는 수탉을 유심히 살폈다. 어릴 때, 그녀의 집도 가축을 키웠다. 수탉 두 마리와 암탉 열 마리. 말린 음식의 잔반들과 과일 껍질들을 가져다 닭의 모이통에 넣어 주고 암탉이 품은 계란을 꺼내 오는 것은 늘 사샤의 차지였다. 닭의 개체 수가 많아지면 아버지는 늙은 암탉과 수탉을 차례대로 잡아 식탁 위에 올렸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닭을 어떻게 죽여 손질해 두는지는 몰랐다. 부모님은 사샤나 오빠인 존에게 가축을 도살하는 장면은 한 번도 보여 준 적이 없었다. 그저 예쁘게 손질해 먹음직스럽게 식탁 위에 올려 줄 뿐이었다. 한때는 그랬다. 좋은 것만 보고, 맛있는 것만 먹고, 아름다운 것만을 들었다. 그 행복이 영원할 줄 알았다. 그러나 달콤한 순간은 너무나 짧았고 힘겹고 고통스러운 나날은 너무나 길었다. 차라리 그 짧은 행복을 몰랐다면 어쩌면, 사는 것이 조금 덜 고통스러웠을지도 모른다. “우리를 열어 줘요.” “……네?” “알아야겠어요.” 장교는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뜨거운 오일 램프의 불이 그녀의 얼굴에 옮겨 붙은 듯 활활 타는 얼굴이 선뜻하게 느껴졌다. “저 녀석의 목을 비트는 법을 나는, 난 알아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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