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키넷 단편야설

한 편 완결 소설

성인소설 목록

최신 단편

야설 읽기
밍키넷 소설
토스트 메세지 나오는곳
텔레그램 공식채널

밍키넷 공식보증업체

5화 5화


04. 또 눈을 떴다. 눈을 뜨고 익숙한 천장을 보자마자 분노가 치밀었다. 이 개자식! 그녀는 이를 갈며 벌떡 일어났다. 그는 지난번에 앉았던 의자에 똑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그는 빙그레 웃었다. “깨어나는 시간이 참 규칙적이로군.” 사샤는 그를 향해 베개를 집어 던졌다. 그는 의자에 앉아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웃을수록 사샤는 더욱 분노했다. “이 미치광이 개자식!” 사샤가 욕을 퍼붓자 그는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능청스러운 얼굴로. 마치 그런 말도 할 줄 아냐는 듯. 그 꼴에 더 화가 나 사샤는 배게 하나를 더 집어 던지고 그에게 달려들어 뺨을 갈겼다. 찰싹 소리가 나며 휙 돌아간 그대로 그는 또 웃었다. 웃다니! 감히! 웃다니! 사샤는 그의 제복 허리춤을 뒤져 가죽 케이스에 곱게 들어가 있는 권총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그를 향해 총구를 겨눴다. 요한은 항복의 의미로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여전히 안면에는 익살과 능청이 가득했다. “쏘게?” “그래. 쏠 거야. 못할 줄 알아?” “좋아. 방아쇠를 당겨.” 널 정말 죽일 거야. 너를 죽이고 나도 죽으면 돼! 사샤는 이를 악물고 방아쇠를 당겼다. 철컥. 철컥철컥, 철컥! 하하하. 그는 소리 내어 웃었다. “총알이 있는지는 살폈어?” “…….” “잠금쇠가 풀렸는지는?” “…….” 사샤는 붕대가 감긴 두 손으로 엉성하게 쥔 총을 보았다. 덜덜 떠는 손은 그것을 잡고 방아쇠를 당기고 있는 것만으로도 벅찬 듯했다. 손의 감각은 전체적으로 둔했다. 총알? 잠금쇠? 사샤는 총을 살피다가 끝에 삐쭉 튀어나와 있는 걸쇠를 발견했다. 이게 잠금쇠인가? 그러나 무엇을 어찌하기도 전에 그녀의 몸은 침대 위로 쓰러졌다. 정신을 잃은 것도 눈을 감았다가 뜬 것도 아닌데 삽시간에 침대에 뻗어 총구에 이마를 조준당하고 있는 것은 저이고, 총을 든 자는 그였다. 차가운 총구가 그녀의 이마를 시트 위에 짓눌렀다. 그는 잠금쇠를 풀었다. “잘못했다고 말해.” “…….”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하겠다고 하면 살려 줄게.” “…….” “알량한 자존심과 목숨 중 네겐 뭐가 더 중요하지? 사샤 로라 양?” 그는 빙긋 웃으며 물었다. 그래 이 남자에게 이건 장난에 불과하겠지. 저는 장난감이다.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는 장난감. 그래서 이 상황이 즐거운 거야. “당신이 날 여기에 가두었지?” “그건 내가 원하는 답이 아니야. 사샤.” “날 가지고 노니까 재미있어?”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약간?” 사샤는 침대에 두 팔을 뻗고 그를 똑바로 보았다. 푸른 언덕에 하늘을 보고 눕듯이 더 넓게 몸을 폈다. 요한은 사샤의 에메랄드빛 두 눈동자를 한참이고 번갈아 바라보았다. “눈이 참 예뻐.” 참으로 모욕적이다. 그녀가 들어본 중 가장 모욕적인 언사였다. 너 같은 인간은 입에 발린 말을 해도 소름이 끼치도록 가식적이야. “죽여. 내가 소원하는 건 오로지 그거야.” “그것 참 맘에 드네.” 요한이 방아쇠를 당겼다. 사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철컥. “…….” 빈 격찰 소리. 하하하. 그가 또 웃었다. 맑고 천진해서 진절머리 나는 소리. 그는 사샤의 뺨을 어루만지고 별안간 그녀의 턱을 꽉 잡았다. 능청스러운 눈빛에 잔인한 빛이 감돌았다. “탄창을 갈아 끼우는 걸 깜빡했거든.” “…….” “사샤.” 그는 의미 없이 그녀의 이름을 내뱉었다. 입안에서 맴도는 소리가 감미롭다는 듯. “사샤 로랑. 얼굴색이 변했네.” “…….” 꾹 참고 있었어도 입술이 바르르 떨려 왔다. 알아. 공포로 하얗게 질렸겠지. 죽이라는 말은 진심이었어. 죽는 게 무서웠던 건 아니야. 총탄이 저를 뼈를 뚫고 가는 고통이 무서웠을 뿐, 그 찰나의 고통이라도. 고통에 무뎌서 익숙해질 만도 한데 아니야. 고통은 새겨지면 새겨질수록 더욱 아픈 거야. 요한은 부술 듯한 악력과는 다르게 부드럽게 말했다. “멍청한 이들은 네가 순하고 얌전한 아가씨인 줄 알겠지. 그렇지? 사실은 망아지처럼 사납고 고집이 센 말괄량이인데 말이야.” “…….”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야. 마냥 순하고 얌전해서는 홀로 남겨진 고아가 그것도 여자가 지금껏 살아있기는 천운이 도와준다고 하여도 힘들다. 고된 병동 생활을 지금껏 버틴 것도 마찬가지였다. 악바리처럼 독하지 않으면 그 안에서 견디기 힘들었다. 그녀에게도 불꽃이 있었다. 비록 그것이 드러나지 않았고 저 자신도 눈치채지 못했다 하여도. 분명 그것은 존재했다. 그리하여 지금 그것이 타오르고 있는 것이다. “내일은 가지고 놀 만한 예쁜 인형을 하나 넣어 줄게.” “필요 없어.” “필요할 걸. 넌 외롭잖아.” “…….” “네 예쁜 눈이 슬프다고.” “죽여! 죽이라니까!” “사샤. 내가 널 죽일 일은 절대로, 절대로 없을 거야. 네가 너를 죽이면 몰라도.” “…….” 요한은 그녀의 턱을 놓아주고 침대에서 내려가 제복의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일어나. 식사해야지.” 요한은 그녀의 손을 잡아 억지로 일으켰다. “싫어.” “배가 고플 텐데.” “어차피 네놈이 독을 타 놨잖아. 음식에. 분명히.” “흠.” 그는 대답 대신 이도 저도 아닌 소리만 냈다. 그러고는 말을 이었다. “네 머리에 총탄이 들어가나, 네 배에 독을 탄 음식이 들어가나 어차피 그게 그거니 그냥 먹지 그래.” “싫어. 다시 널 즐겁게 해 주지 않겠어.” “좋아. 기백 있네.” “…….” 대체 왜 이렇게 기뻐하지? 왜 이렇게 재밌어해? 뭐가 이렇게 즐겁고 기쁜 거야? 저가 화를 낼수록, 악을 쓸수록 그의 얼굴은 더욱더 환하게 변했다. 이젠 뭐랄까, 그냥 기가 막혀 넋이 나간달까. 열이 솟구치다 못해 그냥 회까닥 돌아 버린달까, 사샤는 일어나는 듯하다가 그의 급소를 향해 발을 휘둘렀다. 요한이 그것을 가볍게 잡고 휙 뒤로 돌렸다. 사샤는 삽시간에 반 바퀴 돌아 침대 위로 뻗었다. “나약하고 멍청하고 반격당하기 쉬운 수법이야. 무엇보다 재미없어, 사샤.” “다행이야. 널 재밌게 하고 싶지는 않거든.” “그건 재밌네.” 이 개자식! “일어나. 스프가 식겠어.” “싫어.” 사샤는 그의 손에 잡힌 발목을 털어내고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갔다. “안 먹어. 그 더럽고 매스꺼운 음식은 먹지 않겠어.” “마리가 그 이야기를 들으면 슬퍼하겠어. 그녀는 늘 일류 요리만 내놓거든.” 알 바가 아니다. 일류 요리건 나발이건 독이 들어있다면 그것은 쓰레기보다 가치가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은 그에게 또 자신에게 분노를 뛰어넘어 증오와 살기가 한계치까지 다다랐다. 지금이라면 당장 살인이라도 할 수 있다. 아니 이미 하려 했던가. “넌 정말 구제 불능이로군.” 요한은 손목시계를 살피더니 그녀의 다리를 낚아채 잡아당겼다. “싫어!” 그녀는 시트 위를 허우적대며 버둥거렸다. 매트리스를 잡고 버티던 손이 미끄러져 움켜쥔 시트와 함께 참으로 매끄럽게도 그의 손아귀에 갇혔다. “가만히 있어, 공주님처럼 대해 줄 테니까.” 사샤는 몸을 돌리며 손등으로 그의 뺨을 후려쳤다. 철썩하는 소리 대신 퍽, 하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가 퉤, 침을 뱉었다. 피가 섞여 있었다. 그는 혀로 터진 입 가장자리를 닦으며 웃었다. “방금 것은 좀 아팠어. 사샤.” 그는 몸을 숙여 사샤를 제 어깨에 들쳐 멨다. “놔!” “서로에게 우아한 방법이 있었지. 그걸 포기한 건 너야.” 사샤는 버둥거리며 주먹을 휘둘렀다. 그의 허리, 엉덩이 다리 마구잡이로 때리고 머리를 박고 다리를 버둥거렸다. 어찌나 요란한지 그녀를 단단히 붙잡은 요한의 몸까지 같이 사방으로 흔들렸다. 그의 하얀 미간에 주름이 갔다. 끙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러다 험한 꼴 보지.” “놔! 놓으라고!” “사샤!” “놔!” 철썩! 날카로운 마찰 소리가 넓은 실내에 광광 울렸다. 엉덩이에 불이 난 듯 화끈했다. “아악!” 사샤는 아픔에 비명을 질렀다. “너 같은 살쾡이가 어떻게 간호 병동에서 일했지? 그것도 수녀들과 함께 말이야.” 아니야! 난 원래 이렇지 않아! 난 온순해! 난 얌전하다고! 나는 살면서 누구도 때린 적이 없어! 나는 사람들을 돌보는 것을 좋아하고, 봉사하는 것을 좋아한단 말이야. 난 살면서 한 번도,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죽이고 싶었던 적이 없어. 한 번도, 한 번도……. “널 죽일 거야.” 그 말을 내뱉으며 사샤는 흐느껴 울었다. 슬퍼. 슬퍼. 너무나 슬퍼. 내 꼴을 보라지.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 이건 내가 아니야. “널 죽이고 말 거야.” 사샤의 몸이 축 처졌고 요한은 한결 수월해진 자세로 그녀를 들쳐 매고 복도를 걸었다. “게다가. 울보로군.” 요한은 식당으로 들어가 발로 의자를 젖히고 그녀를 거기에 앉혔다. 사샤는 고개를 푹 숙이고 계속해서 울어 댔다. “그만해.” “흑…….” “뭐라도 먹어. 차라리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편이 더 낮겠어.” 사샤가 그를 향해 접시를 집어 던졌다. 말도 정말 재수 없게 했다. 요한은 능청스레 그것을 피하고 우아한 손놀림으로 냅킨을 무릎에 펼쳤다. 접시는 그를 지나 벽에 부딪히고 와장창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너희가 내 부모님을 죽였어.” 요한은 말없이 스테이크 하나를 집어 제 앞에 놓았다. “너희가 내 오빠를 죽였어.” “그래. 알아. 넌 고아가 됐고 오빠와 함께 국경을 넘었고, 그러다가 시민권이 필요해서 네 오빠가 군대에 갔고 너는 비렁뱅이로 살다가 제러드 장군의 소개로 병원에 갔고, 오빠는 10년째 행방불명이고. 이름이 뭐랬더라? 짐이랬나? 아니 장? 장 로랑?” “존이야!” 사샤가 소리를 �질렀다. 요한은 스테이크를 썰었다. “맞아. 존이랬지. 존 로랑. 디터에게 미주알고주알 잘도 불었더군. 보고서가 얼마나 두꺼운지 책을 한 권 내도 될 정도였다니까.” 이번에는 유리컵이 날아들었다. 요한은 목을 반대편으로 가볍게 숙였다. 컵은 다시 벽에 와장창 부딪혔다. “난 국경을 넘기 하루 전까지 병원에서 일하던 간호사였어! 난 훈련받은 요원도 군인도 아니야!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이었다고! 그런 나를 너희는 무자비하게 고문했잖아. 손발톱을 찌르고 뽑고! 때리고! 고문하고!” 그러다가 사샤는 손에 집히는 대로 그에게 집어 던졌다. 요한의 이마로 철썩 빵이 부딪혔다가 그의 앞 접시에 사뿐하게 떨어졌다. “아무리! 아무리 아무것도 모른다고 이야기해도 믿어 주지 않았어! 날 끔찍하게 대했고 지금도 그렇잖아! 이 더러운 감옥에 날 가둬 놓고 매일 독을 먹이고 거품을 물고 눈을 뒤집는 걸 즐기잖아! 흑…… 흐흑…….” 요한은 접시에 날아든 빵을 집어 한입 크게 베어 물고는 사샤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화를 냈다가 울었다가 정말이지 감정적인 여자다. 저 본성을 어떻게 숨기고 살았을까. 아니 애초에 감정적인 여자가 아니었다면 그토록 대책 없이 국경을 넘는 짓은 하지 않았겠지. 빵을 입안에 다 집어넣고 턱을 괸 채 그는 그것을 우적우적 씹었다. 사샤가 꺼이꺼이 우는 것을 감상하며 말이다. “요원 하나를 훈련하는 데는 짧게는 3년 길게는 10년도 걸려.” “흑…….” “그리고 모두가 연결되어 있지. 마치 크리스마스트리의 전구처럼 말이야.” “…….” 사샤는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정보기관은 절대로 요원과 연락을 끊지 않아. 혼자 떨어뜨려 놓지 않는다는 거지. 주변에 충분한 조력자를 확보하고 언제나 연락이 닿을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 그러니까 요점은, 너는 버려졌다는 거야. 사샤 로랑.” “…….” “너는 배에 폭탄을 넣은 쥐새끼나 다름없는 신세란 말이야. 원하는 곳에 던져 놓고 터지길 기다리는 거지.” “그렇지 않아!” 사샤는 발끈하며 언성을 높였다. “단지, 단지 시간이 없었을 뿐이야. 그들은 북반구 언어에 능숙하고 네르아를 잘 아는 사람을 원했어. 나밖에, 나밖에 없었어. 나밖에…….” “이곳 시가지에 널 떨어뜨려 놓으면 너는 미아가 될 거야. 여긴 변했어. 그들도 그걸 알고 있지. 도첸국 곳곳에 UN의 첩자가 있을 테니 주요 건물들이 어디에 박혀 있는지 줄줄이 꾀고 있을 거야. 네가 알고 있던 네르아와는 딴판인 걸 너도 알잖아.” “…….” “언어와 고향이라. 순진해도 너무 순진하군. 사샤 로랑.” “그래서? 엎드려 너에게 감사라도 할까? 이제라도 알게 해줘서 감개무량하다고 울기라도 할까? 내가 너에게 매달리며 연합군을 증오하길 바래? 내 손으로 그자들을 죽이겠다고 길길이 날뛰기라도 하란 거야?” 요한은 어깨를 으쓱하며 포도 한 알을 뜯어 먹었다. “아니. 그냥 알려 주는 거야. 네가 이용당하고 버려졌다는 걸. 뼈저리게.” “그들이 뭘 해도 너희를 증오하는 만큼 증오하진 못해.” 사샤는 이를 사리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요한은 태연한 표정으로 그녀의 시선을 즐기다가 마침내 미소 지었다. 증오는 너무나 익숙해 흐르는 공기 같은 것이었다. 그에게 가장 편안하고 잘 맞는 옷처럼 기분 좋은 것. 요한은 식사를 계속했다.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앉아 있는 사샤에게 여보란 듯 음식의 하나하나를 음미하며 천천히. 그녀의 표정이 분노에서, 고통으로, 고통에서 슬픔으로, 그리고 다시 분노로 억겁의 감정이 번갈아 가며 휘몰아치는 동안 우아하고 고상하게. “먹어. 사샤.” “먹지 않겠다잖아.” “넌 배가 고파.” “네가 상관할 바 아니야!” “머리를 굴려 멍청이. 네가 먹는 음식은 내가 먹지 않아. 내가 먹는 음식은 절대로 너에게 권하지 않지.” “…….” 뭐라고? 사샤는 그가 자신의 접시에 가져간 음식을 기억해 내려 애썼다. 스테이크, 빵, 포도. “인간이 살기 위한 욕구를 이기는 건 불가능해. 특히 너같이 연약한 여자는.” “난 연약하지 않아!” “그래. 안 연약하다고 치자고. 먹어.” “…….” 그의 얼굴에서 여유가 빠져나갔다. 그의 새파란 벽안이 살벌했다. “네 입을 벌리고 쑤셔 넣기 전에 먹어.” “…….” 그 목소리와 분위기가 잔인했다. 몸이 부르르 떨릴 만큼, 갑자기 번쩍 정신이 들 만큼, 치솟던 분노가 사라질 만큼. 잠시 후 그녀는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그러다가 멈칫. “…….” 잠시 요한을 노려보더니 그에게 제 포크와 나이프를 내밀었다. “바꿔.” “뭘?” “포크와 나이프.” “……내가 먹던 거야.” “그러니까. 바꿔.” “…….” 요한은 그녀를 쳐다보며 방금까지 제 입에 들어갔던 포크와 육즙이 잔뜩 묻은 나이프를 냅킨으로 천천히 닦았다. 사샤는 그 틈에 재빠르게 자신의 접시 안에 아무 음식이나 닥치는 대로 가져왔다. 그리고 요한이 포크와 나이프를 건네자 그녀는 음식이 잔뜩 쌓인 접시를 또 그에게 내밀었다. “바꿔.” “…….” 요한은 입안에 딸기 한 알을 천천히 굴리며 저의를 가늠했다. 사샤의 눈빛은 곧고 도전적이었다. “왜? 겁나? 나처럼 개거품 물고 쓰러질까 봐? 하긴 그게 좀 추접하긴 하지. 그렇지?” 요한은 음식의 잔해가 남은 제 접시를 주고 그녀의 접시를 받았다. “기꺼이 해 드리지.” 사샤는 접시를 낚아채듯 받아 가더니 허겁지겁 포크로 요한이 남긴 음식들을 입안에 쑤셔 넣었다. 걸신들린 사람처럼 정신없이. 그걸 보는 저가 목이 타 요한은 정성 들여 세공된 잔에 담긴 물을 제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러고는 아주 천천히 사샤가 탑처럼 쌓아 놓은 음식들을 하나씩 먹었다. 사샤는 그가 먹는 음식마다 골라 제 접시에 넣고 씹었다. 요한은 웃었다. 데이트하는 연인을 보는 듯이. 입가에 음식을 잔뜩 묻히고 짐승처럼 고기를 뜯는 여자를 매우 유쾌하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날 사샤는 처음으로 거품을 물고 쓰러지지 않았다. 대신 갑작스럽게 너무 많은 음식물을 밀어 넣어 배탈이 났다. 밤새 배앓이와 구토로 침대 위를 구르다가 그녀는 새벽 나절에 실신하듯 잠이 들었다. 아무것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여전히 배가 고팠고, 여전히 같은 침대에서, 같은 천장을 바라보며 일어났다. 눈부신 햇살 속에서 말이다. ***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복도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귀신이 곡하는 듯 소름 끼치게 무서운 소리였다. 사샤는 눈을 깜빡이며 이불을 끌어당겼다. 환한 대낮에 이게 무슨 악몽이란 말인가. 처음엔 착각인 줄 알았던 소리는 정신이 또렷해질수록 더욱 뚜렷하고 확연하게 들렸다. 어제 요한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내일은 가지고 놀 만한 예쁜 인형을 하나 넣어 줄게.’ “대체…….” 그가 대체 뭘 넣은 걸까. 사샤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침대에서 일어섰다. 혹시 모르니 단단한 테이블 스탠드의 몸통을 거꾸로 들고 그녀는 살그머니 문을 열었다. 복도는 침실과는 다르게 조금 어둑어둑했다. 해가 반대편으로 지는 오후 늦게까지 아마 계속 그럴 터였다. 우는 소리는 더욱 분명하게 들렸다. 사샤는 야구 배트를 잡듯 두 손으로 스탠드를 꽉 잡았다. 그러고는 복도의 반대편이 보일 정도로만 얼굴을 내밀었다. “흑…….” 어렴풋이 실루엣이 보였다. 사샤의 눈은 더욱 가늘어졌다. 지저분하게 엉킨 금발 머리, 하얗고 깡마른 몸. “…….” 여자였다. 아이라고 하기엔 크고 어른이라고 하기엔 아직 어려 보이는 작고, 마른 여자. 사샤는 스탠드를 내려놓고 걸음을 옮겼다. 대리석 위에 길게 깔린 아라비아 카펫이 그녀의 발소리를 죽였다. 대신 길고 여밈이 없는 원피스가 살에 스치는 소리가 났다. 거의 다 다다랐을 때쯤, 여자가 사샤의 존재를 눈치채고 눈을 들었다. ‘내일은 가지고 놀 만한 예쁜 인형을 하나 넣어 줄게.’ 인형이 아니야. 사람이잖아. 사이코 같으니. 사샤는 그녀에게 무어라 말을 붙여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나오는 대로 내뱉었다. “안녕.” 두서없는 인사에 여자는 눈만 말똥거렸다. “그…… 여기…… 그러니까, 나는…….” 그녀는 아주 밝고 푸른 눈을 가지고 있었다. 하얀 얼굴에는 주근깨가 가득해서 전체적으로 병약하고 순진한 이미지를 풍겼다. 그녀는 사샤에게 뛰어들었다. 동아줄을 잡듯이 매달려 덜덜 떨며 애걸복걸했다. “도와주세요! 저를, 저 좀 도와주세요!” 소매 아래로 드러난 손가락은 비쩍 마른 가지 같았고 천천히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자 척추와 등뼈가 분명하게 만져졌다. 너무 말랐어. “진정해요. 괜찮아요. 이름이 뭐죠?” “벨이요.” 사샤는 그녀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병동에서 신경 쇠약에 걸린 환자를 다룰 때 했던 것처럼 익숙하고 능숙하게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왜, 내가 왜 여기에 있죠? 여긴 어디예요?” 사샤는 그녀의 혼란을 이해한다. 홀로 이곳에 떨어졌을 때 자신도 벨처럼 공포에 떨었다. 지독하게 무섭고 외롭고 고통스러웠다. 그러니까 진정해. 나와 다르게 당신은 혼자가 아니야. 내가 도와줄 수 있어. 나보다 훨씬 더 쉽게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어. “벨. 진정하고 내가 묻는 걸 잘 생각해 봐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여기 어떻게 왔는지 기억나요?” “모르겠어요. 어느 날, 어느 날 아침에 갑작스럽게 도첸군이 들이닥쳤어요. 엄마와 아빠, 동생까지 모조리 트럭에 싣고 어디론가 끌고 갔어요. 어둡고 빛도 없는…… 잠을, 잠을 자지 못하게 했어요. 물조차 주지 않았어요.” 사샤는 그녀의 손톱을 확인했다. 저와 똑같이 상흔이 있고 손톱이 새까맣게 죽어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 그녀는 붕대조차 감아 주지 않았는가. 저에겐 매번 깨끗한 새 붕대로 감아 놨으면서. 어째서……? “그리고 눈을 떠보니 여기였어요. 처음엔 꿈인 줄 알았는데, 문이, 문이 열리질 않아서…….” 벨은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다들 어디에 있는지, 왜 나만 이곳에…… 믿을 수가 없어요.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엄마, 아빠, 내 가족이 보고 싶어요. 무서워서 죽을 것만 같아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나, 나는 어떻게 해야 하죠? 네?” “이리 와요.” 사샤는 그녀를 데리고 침실로 들어왔다. 우는 벨을 침대에 앉히고 재빠르게 제 손가락에 감긴 붕대를 풀었다. 여전히 쪼개지고 멍이 들어 있었지만 참을 만했다. 혹시 모르지. 또 음식을 먹고 기절하면 새 붕대로 말끔히 갈아 놓을지도. 어쩌면 그러지 않을지도. 정 급하면 치맛자락을 찢어 붕대를 만들면 된다. 그게 아니라도 어떻게든 가능해. 자신은 간호사였고 위급한 상황에서도 늘 잘 대처해왔다. 붕대가 부족한 것이 아닌 더한 상황에도 처해보았다. 그러니까 이것은 오랫동안 익숙해진 직업적 습관인지도 모른다. 당장 상처가 있는 이를 치료하고자 하는 것. 그것을 위해 제 것을 당연히 내어주는 것. 지금 사샤에게는 상처가 심한 벨의 손을 어떻게든 추슬러주는 것이 우선이었다. 연고와 소독약이 있다면 더 좋겠지만아쉬운 대로 일단 붕대로 그녀의 손을 단단히 감아 주어야 했다. 그래야 고통이라도 덜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벨의 손에 붕대를 감아 줄수록 정신은 또렷해져 갔다. 사샤는 비로소 익숙한 상황에 처했다. 능숙하고 잘 알고 있으며 또 가장 익숙한 상황이었다. 그것은 그녀에게 위안을 주었다. 망망대해에서 드디어 등대의 불빛을 본 듯 명확하게 향하는 곳이 생겼다. 잡념은 사라지고 눈앞의 사람을 돌보아야 한다는 사명감. 이것은 제대로 할 수 있다. 또렷하고 명료하게 해야 할 바를 인지할 수 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내가 돌봐 줄게요. 그러니까 괜찮아. 이건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이야. 안심해. 내가 보살펴줄게. 당신의 상처가 아물 때까지 내가 지켜줄게. 지금껏 했던 것처럼. “나는 사샤예요. 나도 당신과 똑같은 과정을 거쳤어요. 고문을 당했고 정신을 차려 보니 여기였어요.” “여기서 어떻게 나가야 하는지 알아요? 여기가 어딘지 혹시 아나요? 우리 말고 다른 사람이 또 있나요?” 벨은 여전히 몸을 떨며 물었다. 사샤는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우리뿐이에요.” “여기가 어딘지는요?” “몰라요. 다만 요새의 어딘가라고만 알아요.” “그럼……. 이곳을……. 나갈 수는 있어요?” 사샤는 또 고개를 저었다. 벨은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그럼 우리는 여기서 죽는 건가요?” “…….” 아마도. 아마도 그러리라. 누군가 꺼내주지 않는다면 제 발로 이곳을 나갈 방법은 없다. 죽어서 송장으로 실려 나가는 방법 말고는. 그러나 사샤는 차마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벨은 심각하게 떨었고 곧 발작하기 직전처럼 보였다. 한없이 약하고 가여운 몸짓이었다. “벨. 일단…….” 우리 일단 당분간은 상처가 낫는 것에 전념해요. 그다음은 그때 생각해 보는 게 어떨까요.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사샤가 말을 채 꺼내기도 전이었다. 벨은 본능적으로 사샤의 품에 파고들었고 사샤는 본능적으로 벨을 감싸 안았다. 이곳에는 시계가 없었다. 그러니 때를 예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누군가 예고 없이 들이닥친다면 그것은 요한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는 이렇게 거칠게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올 위인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몇 번 보지도 못했으면서 왜 그렇게 단정 짓게 되었는지 저도 모를 일이었다. “사샤 로랑!” 굴리듯 사샤의 이름을 발음하는 요한과 달리 그것은 쇄기처럼 살갗에 쿡쿡 박혔다. 사샤는 살벌하게 드러난 디터 소령의 실루엣에 입술을 깨물고 벨을 더 꽉 안았다. “나와.” “…….” “어서!” 디터가 윽박지르자 벨과 함께 사샤의 몸도 흠칫 놀라 굳어졌다. 고문실에서 나온 이후 그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몸의 공포가 마음의 공포보다 더 예민하고 빠르게 반응했다. 그의 매질 앞에서 얼마나 무기력했는지는 조금 더 지나서야 떠올랐다. 디터가 둘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더 그를 자극하기 전에 그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아니면 다시 매질이 날아 올 것이다. 이젠 혼자가 아니다. 고집을 부리거나 조금이라도 망설이는 티를 낸다면 벨에게도 피해를 줄 것이다. 사샤는 벨의 손을 잡았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사샤를 올려다보았다. “괜찮을 거예요.” 사샤는 달래듯 속삭였고 벨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은 필사적이었다. 믿는다기보다 믿고 싶다는 뜻일 것이다. 괜찮아. 둘이니까. 혼자가 아니니까 괜찮을 거다. 사샤가 벨의 손을 잡고 문으로 향하는데 디터가 쾅 발을 굴렀다. 그의 발길질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다시 온몸이 아팠다. 허리. 옆구리. 가슴. 등. 배. 사샤와 벨은 작게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가는 것은 너뿐이다. 사샤 로랑!” “……안 돼요.” “…….” “안 돼요. 사샤…….” 벨이 그녀의 손을 잡고 매달렸다. 그치지 않는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가지 말아요. 가지 말아요. 나랑 있어요. 나 혼자 내버려 두지 마세요.” “빌어먹을 계집애들! 대체 뭘 하는 거야!” 디터는 휘적휘적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와 사샤의 팔뚝을 잡아당겼다. “사샤! 사샤!” 벨은 사샤를 보며 절규했다. 디터는 상관하지 않고 사샤를 질질 끌었다. 우악스러운 손길에 그녀는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해 보지를 못했다. 다만 정신없이 끌려가며 벨의 비명을 들을 뿐. 히스테릭한 그 소리가 두려움을 야기한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어디로 가는지는 알려 줄 수 있잖아요!” “…….” “제발! 어디로 데려가는지 정도는…….” 디터는 손을 휘둘러 그녀를 벽으로 집어 던졌다. 쿵 소리가 나며 어깨가 충돌했다. 뼈가 울렸다. 그러나 사샤가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그녀의 턱을 틀어쥐고 위협스레 들어 올렸다. 비명을 지르기는커녕 숨조차 그의 살기에 짓눌렸다. “잘 들어. 빌어먹을 계집애. 한 번만 더 소리를 꽥꽥 질렀다간 혀를 뽑아 버리겠어. 네년의 그 잘난 몸뚱아리에서 혀는 별 쓸모가 없을 테니까.” “…….” “알아들었어?” 사샤는 파랗게 질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디터는 사샤의 몸을 앞으로 밀쳤다. 그녀는 휘청이며 다시 복도 가운데로 몰렸다. “걸어.” “…….” 울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목구멍 안으로 쑤셔 넣었다. 그녀는 엉망이 된 머리를 쓸어 올리고 양치기에게 몰리는 양처럼 허둥지둥 복도를 걸었다.   전축의 스피커를 타고 재즈가 흘렀다. 요한은 흠집 하나 없이 잘 닦인 포크를 움직이며 그에 반사된 빛이 천장을 떠도는 것을 감상하는 것으로 지루함을 달래고 있었다. “들어가.” 디터의 목소리였다. 요한은 포크를 내려놓고 식당의 입구를 보았다. 머뭇거리는 그녀를 디터가 안으로 몰아넣었다. 사샤는 비틀거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요한은 미소 지었다. “…….” 그러나 사샤의 얼굴은 하얗게 질리고 심하게 구겨져 있었다. 복도에서 디터가 겁을 준 모양이었다. “앉아.” “…….” 철컥. 사샤의 뒤편에서 디터가 문을 닫았다. 그 덕에 그녀의 모습은 잠시 어둑해졌다가 이내 천천히 드러났다. 요한은 제 시계를 살피고 자리에서 일어나 맞은편 의자를 빼 주었다. “오늘은 시간이 많지 않아. 앉아.” “…….” “앉아.” 그가 고압적으로 한 번 더 명령했다. 사샤는 쭈뼛거리며 다가와 그가 정해 준 자리에 앉았다. 요한은 사샤를 자리에 앉히고 제 자리에 돌아왔다. “왜…… 나만…….” 사샤는 그를 보며 더듬거렸다. 벅벅 대들던 어제와는 사뭇 다른 얼굴. 요한은 그런 그녀의 긴장을 풀어 주려 부드럽게 말했다. 풀릴지는 모르겠지만. “말했잖아. 인형을 선물해 주겠다고. 식사할 땐 두고 나와야지.” “사람이잖아.” “인형이야.” 요한이 단언했다. 사샤는 할 말을 잃었다. 역시 미친 게 틀림없다. 디터 소령도. 이 남자도. “대체 어쩔 셈이야?” “자. 먹어.” 요한은 이런저런 음식들을 접시에 담은 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독은 없어. 그러니까 먹어. 어서.” 사샤는 께름칙한 얼굴로 그것을 받아 들었다. 푸르스름하게 죽어 있는 손톱이 훤히 드러난 것을 요한은 놓치지 않았다. “네 붕대는 어쨌어?” “…….” 사샤는 대답하지 않았다. “인형에게 줬어?” 요한은 그녀에게 건네준 것과 똑같은 순서와 종류의 음식들로 자신의 접시를 채우며 물었다. 사샤는 끝내 대답을 하지 않았고 요한은 하는 수 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사샤는 그가 음식을 먹기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그가 소시지를 찍어 입안에 넣는 것을 보자마자 손을 뻗었다. “줘.” “…….” 짐작한 바대로 그는 요한의 입속에 들어갔다 나온 안전한 포크를 원했다. 요한은 타액을 닦아 주기 위해 냅킨을 들었다. “그냥 줘. 내가 닦을 거야.” 요한은 포크를 건넸다. 사샤는 냅킨이 아닌 제 옷으로 포크를 닦고 요한이 집어 먹었던 소시지를 찾아 집어 먹었다. 그가 접시에 담아 둔 것은 그대로 두고 말이다. “그건 네 인형을 위한 거야?” 요한이 물었다. “너무 말랐어. 그 아이. 그대로 놔두었다간 죽을 거야.” 사샤는 착잡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얼굴에는 결기가 넘쳤다. “뭔가를 돌보는 것을 좋아하는군.” “…….” “삶을 그런 식으로 영위한다라.” 그는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대단히 귀찮은 방식이네.” 어째서 내 삶의 목적을 타인에게 두는가. 그것은 그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붕대와 소독약이 필요해. 연고도.” 사샤가 말했다. “그것도 네 인형을 위한 거야?” “벨이야. 인형이 아니라. 그리고 어차피 그쪽이 돌봐 주지 않을 거잖아. 돌봐 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고.” “돌볼 사람이 없어서 돌본다고? 뭐 하러?” “…….” 요한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었다. 그리고 그의 말을 이해 못 한 사샤의 고개도 같이 기울었다. 요한에게는 너무 당연한 것이 그녀에겐 당연하지 않은 것이다. “귀찮으면 죽이면 되지.” “…….” “방법도 간단하잖아. 독이 든 음식을 먹여. 24시간 방치하면 그대로 죽게 될 텐데.” “…….” 역시 미친놈이었다. 그런 말에 대체 내가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하나. “그런 식으로 누군가를 돌보면 얻을 수 있는 게 있어? 성녀 흉내를 내며 자기 위로를 하는 것 빼고 말이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성직자들은 타인에게 봉사하면 자신이 천국에 가리라 믿지. 결국 봉사는 내 행복을 위한 도구일 뿐인데 모두 스스로의 행동에 도취하더군. 자신이 보여 주는 도덕과 겸손은 마치 신의 그것처럼 전능한 척하면서 말이야.” “…….” “내 말은, 그건 도피의 수단이라는 거야. 그래서 타인을 위해 살다 죽으면 뭐가 남지? 새까만 뼛가루가 금이라도 되나?” 사샤의 눈은 깊게 침잠되어 있었다. 그녀가 물었다. “그래서, 행복해졌어? 당신은?” “뭐가?” “사람들을 죽이면서 행복해졌어?” “적어도 가진 것들은 더 많아졌지. 돈도. 명예도.” “…….” 역겨웠다. 그 같은 인간 때문에 전쟁이 나는 거다. 남의 돈과 명예를 갈취해 가려는 자들 때문에. 사샤는 제 이를 사리물고 비죽이며 튀어나오는 말들과 저열한 욕설을 삼켰다. 그저 얌전히 포크로 음식일 집어 씹어 삼킬 뿐이다. “오늘은 얌전하네?” “…….” “벨 때문이겠지.” “…….” 반박할 수 없어 입을 다물고 그를 향해 눈을 치떴다. “고작 인형 하나에. 살쾡이가 순한 집고양이가 되었군.” 그것은 비아냥거림이었다. 뒤틀린 음성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사샤는 대꾸하지 않았다. 입을 다무는 것이 그의 속을 긁는 유일한 방법이리라. 사샤는 입을 다물었고 요한도 곧 침묵했다. 식탁 위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그것은 식사가 끝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참으로 치열한 침묵이 끝난 후 사샤는 원하는 것을 얻었다. 다음 날 아침 침실 문 앞에 사샤가 요구했던 붕대와 소독약 연고가 도착했다. 사샤는 그것으로 벨을 돌보았다. 소독약과 연고를 발라 주었고 붕대를 빨아 주기적으로 갈아 주었다. 매일 정오, 요한과 식사를 했고 음식을 싸 와 벨에게 주었다. 요한과의 식사에, 그리고 벨을 돌보는 것에 익숙해질 때쯤 사샤의 상처도 아물어 갔다. 외로움과 고통이 무뎌지는 속도와 꼭 맞게, 사샤는 자신이 그 답답한 감옥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슬프고도 기쁜 일이었다.

고객센터 Suppo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