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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4화


03. “반역이라니! 지금 같은 시국에 그것도 정치인이 연합국의 끄나풀이라니!” 카렐이 책상을 내려치자 옷에 달린 훈장과 수술들이 철렁거리며 흔들렸다. 포마드로 잘 빗어 올린 희끗희끗한 갈색 머리 한 가락이 주름진 이마로 흘러내렸다. “진정하세요. 카렐. 그런다고 사태가 저절로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남자는 태평하게 창밖의 햇볕을 쬐며 말했다. 퍽이나 무심한 목소리였다. “연합군 쪽의 암호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는 마당에, 붙잡힌 첩자만 지금까지 몇이냔 말이야 도대체!!” “그건 연합군 쪽에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남자는 손에 든 양주잔을 빙빙 돌렸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백색의 정복이 그의 은백색 머리처럼 눈부시게 빛났다. “라울 서기장님이 알면 우리 둘 다 자리보존을 못 할 거야. 내 목뿐 아니라 자네 목까지 위험할지도 몰라. 어찌 되었든 이런 일은 우리 소관이잖나.” 카렐은 더 이상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모든 복잡한 일들은 그동안 요한에게 맡겨왔고 또 그는 맡은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왔다. 그러나 문제는 라울 서기장의 얄궂은 변심에 있었다. 같은 일로도 어떤 날은 공을 치하해 훈장을 내리고 또 어떤 날은 그 훈장을 빼앗은 후 감옥에 처넣었다. 그런 라울은 최근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방첩부를 들쑤시기 시작했다. 아마도 요한의 인기를 의식한 행동 같았다. 카렐이 원하는 것은 말썽 없는 곳에서 막대한 비자금을 챙기며 자신의 노후를 준비하는 거였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제 지위와 방첩부의 안정성이었다.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약점 잡힐 일은 없어야 했다. 예를 들면 지금 같은, 정권의 실세가 연합군과 내통하는 일은 애초에 일어나서는 안 된다. “자네도 알잖아. 각하께서는 자비가 없으셔.” “알죠.” “늘 살얼음판이었네만, 그래도 우린 잘 해왔잖아. 안 그래?” 국경에 철조망을 친 이후 도첸과 연합국은 지난한 냉전의 상태였다. 겉으로는 평화로우나 그 안은 오히려 서로의 땅에 미사일을 폭격할 때보다 더 치열했다. 서로 더 많은 탑을 쌓아 그 크기를 과시하다가 누가 먼저 무너지는지 내기를 하듯이 세력싸움을 했다. 결국 그 모든 것의 승패를 가르는 것은 정보와 돈이었다. “보반 의원의 일은 더 뒷말이 새나가지 않도록 은밀히 처리해. 더 이상의 배신자도, 더 이상의 기다림도 안 돼. 연합군 손에 한 번만 더 놀아났다간 자네도 나도 다 총살감이야.” “…….” 카렐이 지나치게 초조해 보였으므로 남자는 더 대꾸하지 않았다. 다만 들고 있던 양주잔을 조용히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실례하겠습니다. 대장님.” “다음번에 들어올 땐 라울 서기장의 입맛에 맞는 정보를 들고 와. 아니면 쓸 만한 놈의 머리를 들고 오든가. 그게 아니면 우리 둘의 머리가 날아갈 거야.” “명심하죠.” 그는 카렐의 방에서 나와 긴 복도를 걸었다. 얼핏 보기에 장교라기보다 건달처럼 보이기도 했다. 남자는 햇살에 찌푸려진 눈을 손으로 비볐다. 복도에서 마주치는 사람마다 그 자리에 서서 커다란 구령과 함께 거수경례했다. 그의 뒷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사람들은 숨도 쉬지 못했다. 폰 윌렌도르프. 그는 연합군에게 그렇듯 도첸군에게도 악마와 다름이 없었다. 날은 맑았고 햇볕은 전에 없이 따사로웠으며 창밖의 정원은 수확을 앞둔 가을의 그것들처럼 풍요롭고 낭만적이었다. 햇살에 찌푸려진 그의 눈은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반짝였다.   반면, 사샤는 모든 것이 암흑이었다. 그녀의 앞으로 한 줄기의 빛이 들었는데 사샤는 그것이 햇볕인지, 아니면 천장에 달린 광도가 낮은 형광등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습하고 차가운 바닥, 피비린내가 섞인 역한 향, 그리고 추위. 잠시 후 살이 찢기는 고통이 한 번 더 몰아닥쳤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샤의 몸에 누군가가 냉수를 또다시 들이부은 것이다. 그녀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거리며 가쁜 호흡을 내쉬었다. “벌써 이러면 곤란해. 아가씨. 아직 해가 중천이야. 잘 시간은 멀었다고.” 처음에는 자신이 이곳에 갇힌 시간을 헤아려 보려고 애썼다. 제 심장 박동의 수를 세며 그것을 초로 삼아 시각을 짐작하려고도 해 보았다. 처음의 몇 번은 저항 아닌 저항도 해 보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무기력하며 그저 무섭고 두려웠다. 잠을 자지 못한 날을 세어 보는 것이 더는 의미가 없었다. 코에서는 피가 흘렀고 머리는 깨질 것같이 아팠다. 붓지 않은 곳이 없었고, 통증이 없는 곳이 없었다. 종일 멍했고 이명이 들렸으며 가시덤불에 누운 것처럼 고통스럽고 또한 추웠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보반에게 전해 준 것이 뭐야?” 사샤는 바닥에 엎드려 미약하게 고개를 저었다. 군화발이 그녀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사샤는 비명을 지르며 기침을 토했다. “보반에게 전해 준 것이 뭐냐고!” 몰라. 모른다고. 보반에게 전해 준 것이라고는 그가 가져다 달라고 시킨 옷 한 벌뿐이야. “그에게 주려고 한 게 뭐냔 말이야!” 가지고 온 것은 여벌의 속옷과 옷, 그리고 고작 40바크의 돈뿐이라고. 그것을 아무리 이야기해도 도첸군은 믿지 않았다. 더는 대답할 여력도 없어 그녀는 숨을 죽이고 벌벌 떨기만 했다. “네 반반한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리면 사내들이 모두 홀라당 넘어갔을 거야. 그렇지?” 사샤는 발작적으로 고개만 저었다. 디터 소령은 그녀의 다 깨지고 죽어 버린 손톱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찬 바닥 위에 부르르 떠는 손끝이 고문으로 온 새까맸다. 살짝 스치는 손길에도 고통스런 감각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으윽…….” 아파…. 너무 아파……. “좋아. 그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제러드의 지시가 뭐였다고?” “……보반, 보반 의원의 정보……를…….” 찰싹, 디터는 그녀의 뺨을 갈겼다. 사샤는 다시 신음을 흘렸다. “제러드가 고작 그런 멍청한 늙은이를 감시하라고 널 보냈을 리 없어. 그 노인네는 알고 있는 정보가 없거든. 그 작자는 상부에 개처럼 기어 의원 자리를 얻었을 뿐, 생각이란 것이 없다고! 보반을 이용해 누군가와 접선하려고 한 거잖아! 사샤 로랑!” “……아니야……. 나, 나는…… 모, 악!” 그는 사샤의 머리채를 잡아끌었다. 반듯하지 않은 바닥의 돌부리에 엉덩이부터 발끝까지 날카롭게 베어졌다. 디터는 사샤의 머리를 물이 가득 담긴 욕조에 처박았다. 미약한 저항은 우악스러운 손길 아래 속수무책이었다. 바들거리는 몸에서 힘이 빠질 때쯤 그는 연약한 머리통을 당겨 올렸다. “고통스러운 죽음을 원해? 그렇다면 계속 그렇게 모른 척해. 너는 절대 여기서 살아 나갈 수 없을 거야. 왜냐고? 아무도 널 구해 주러 오지 않거든.” 그러고는 그녀의 머리를 다시 물속에 처박았다. 발가벗은 몸이 다시 감전된 듯 바들바들 떨렸다. “디터.” 머리를 물에 처박느라 여념이 없던 디터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이내 여자의 머리를 놓고 재빠르게 거수경례를 했다. 기계처럼 빠르고 절도 있었다. 고문실에 들어온 남자는 욕조 아래로 축 늘어지는 사샤의 젖은 몸을 쳐다보았다. 몸 여기저기에 멍이 들고 상처가 나 있었다. 디터는 고문관이 천직이었다. 그는 무자비한 냉혈한이었고, 잔인함에서는 광인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 그의 광기는 지휘도, 성별도, 출신도 가리지 않았고 남자는 그래서 그를 방첩부에 끌어들였다. 그가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자 디터는 뒷짐을 지고 섰다. “진척은?” “아직까지는 별다른 정보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소장님.” “좋아. 나가 봐.” “네.” 그는 명령이 떨어지는 즉시 두꺼운 철문을 나섰다. 문의 양옆에 보초를 서던 친위대 보병들이 발을 구르며 구령을 붙이는 소리가 났다. 사내는 의자를 끌어와 사샤의 앞에 앉았다. 다리를 꼬고 허벅지 위에 손때가 탄 두꺼운 책을 올려놓고 그 위에 빳빳한 가죽장갑을 낀 두 손을 올렸다. 피투성이 여자를 내려다보는 그의 벽안은 성자의 그것처럼 차분하고 우아했으며 또한 순수해 보였다. 그 안에 품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듯이. 저의 앞에 있는 것은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사람이 아니라, 어느 사무실에서 비서의 면접을 보는 고용인처럼. “이름이 뭐지?” 사샤는 불규칙하게 호흡을 고르느라 대답하지 못했다. “…….” 그는 채근하는 대신 제 허벅지 위의 책을 매만졌다. 그 침묵은 디터의 발길질보다 더 무섭게 다가왔다. “……사, 사샤……. 사샤…… 로랑.” “사샤. 좋은 이름이군, 예쁘고 부르기에도 쉬운.” “…….” “가지고 온 짐이 전부인가?” 사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40바크와 옷 몇 벌?” 그녀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제러드가 도첸국 국경을 넘어 돌아갈 방법을 알려 줬나?” “…….” “아니면 연합군 쪽 첩자와 연락할 방법은?” “…….” “엘가 슈미트 말고 다른 이름으로 된 신분증과 여권은?” “…….” 사샤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원래 뭘 했지?” “……병원에서…… 소아과 병동…….” “의사였나?” 사샤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제러드는 당신에게 죽는 법도 알려 주지 않았나 보군.” “…….” “도첸군에게 발각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이야. 보통 어금니에 숨겨 놓은 청산가리를 씹지.” “…….” “그거 알아?” 그는 철제 의자에 더욱 깊숙이 기대어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죽지 않기 위해 버티는 게 아니라 죽지 못해 버티는 첩자는 당신이 유일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죽는 법이라도 알려줬더라면. 청산가리를 어금니 밑에 숨겨 두는 법이라도 알려 주었더라면. 그랬다면 이토록 잔인하고 처참한 처지가 되진 않았으리라. 제러드가 원망스러웠다. 원망스러워 눈물이 났다. 흐느낌으로 만신창이의 몸이 떨렸다. 사내는 제 정복의 맨 윗단추를 풀고 다시 차분하게 책 위에 손을 올렸다. “신을 믿나? 사샤 로랑?” “…….” 사샤는 남자가 어루만지는 책을 향해 시선을 굴렸다. 그것은 성경책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검문실 안 아침 해가 뜰 때 가장 먼저 햇살이 닿는 자리에 십자가가 걸려 있었다. 디터가 들어올 때쯤 그것은 어둠 속에 잠겨 버렸지만 말이다. “디터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야. 성직자를 불러 달라고 하면 두말하지 않고 불러 줄 거야. 신이 도우신다면, 디터는 당신에게 자비로운 죽음을 선사하겠지.” “……믿지 않아.” 흐느끼는 목소리에 녹슨 쇠 같은 분노가 같이 씹혀 나왔다. 믿지 않아. 나의 아버지가, 나의 어머니가 당신들의 손에 연기처럼 쓰러졌을 때, 그렇게 처참하게 죽었을 때, 그때 그도 함께 죽었어. “사샤.” 저의 이름을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는 감미로웠다. 어스름한 빛에 사샤는 그의 희미한 윤곽을 제 눈에 각인시키려 노력했다. 금수가 놓여 있는 새하얀 제복, 그와 어울리는 찬란한 백금발. 곧고 절제된 자태. 그는 마치 천사 같았다. 아니, 마치 악마 같았다. 그는 웃고 있는 것도 같았다. 아니…… 그는 아무런 표정도 없다. 그러나 목소리. 저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만은 귓가에 아로새겨졌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사샤. 그의 입을 타고 나오는 음절이 진동하며 계속해서 상처 난 고막에 머물렀다. 이 모든 것이 꿈이 아니라면, 차라리 죽음을 원했다. 이대로 눈을 뜨지 않길. 부디 내게 최후의 자비를. *** 얼굴 위로 금과 상아로 화려하게 수놓인 기하학적 무늬의 천장이 빙글빙글 돌았다. 눈부신 햇살이 파도처럼 그 위로 몰려왔다. 아주 잠시 사샤는 그곳이 천국이라 생각했다. 죽었기에 누리는 호사로 느껴졌다. 그러나 연거푸 눈을 깜빡이고 호흡을 하며 사샤는 그것이 현실임을 자각했다.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고 두통이 느껴지는 것이 그 증거였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신은 천국이 아니라 화려한 침실의 침대 위에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과 손을 살폈다. 곳곳에 반창고가 붙어 있었고 고문으로 너덜거리는 손가락은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다. “…….” 어디지? 여기가 어디지? 사샤는 이불을 박차고 나왔다. 침대에서 내려오다 발을 헛디뎌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몸이 너무 무거웠다. 손과 발이 제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그대로 납작 엎드려 문밖에서 사람이 들어오는지, 아니면 누군가 다가오는 발소리라도 들리는지 한참 동안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다. 사샤는 재빠르게 일어나 말을 잘 듣지 않는 손으로 크고 두꺼운 양문을 활짝 열었다. 순간 손끝에서 통증이 일었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기다란 복도에 그녀가 문을 여닫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누구 없어요?” ……. “아무도 없나요!?” 소리는 복도에를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왔다. 꿈인가, 현실인가. 꿈이기엔 너무 생생하고 현실이라기엔 너무 이상하다. “이봐요!” ……. 화려한 장식품이 가득한 복도의 끝에 커다란 문이 보였다. 도망쳐, 사샤. 도망쳐! 본능이 소리쳤다. 문뜩 위험하단 생각이 들었다. 도망쳐야 했다. 본능이 충동을 부채질한다. 사샤는 문을 향해 달렸다. 복도의 끝에서 끝으로, 절뚝거리다가, 넘어졌다가, 무엇엔가 쫓기는 듯 벌떡 일어나 계속해서. 허겁지겁 손잡이를 잡다 손을 미끄러뜨리기를 몇 번. 철컥, 철컥, 아무리 힘을 주어 돌려도 잠긴 문은 열리지 않았다. “누구 없어요!” 사샤는 문을 쾅쾅 두드렸다. “누구라도 대답해요! 제발!” 쾅쾅쾅. “도와줘요!” 제발 날 도와줘요……. 이 문을 열어줘요. 여기가 어딘지,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알려줘요. 부탁해요. 사샤는 헉헉거리며 손잡이를 붙잡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몸이 무거웠다. 다리가 계속해서 후들거렸다. 얼마나 오랫동안 누워 있던 것일까. 여기가 어디일까, 궁궐처럼 화려한 내부에도 공포가 느껴졌다. 귀에서 계속해서 이명이 들렸다. 사샤는 다시 일어나 침실로 향했다. 그녀는 커튼을 걷고 눈부신 햇살이 들어오는 창문을 당겼다. 그러나 단단히 잠긴 문은 아무리 애를 써도 열리지 않았다. 침실 문을 남겨 두고 모든 것은 잠겨 있었다. 갇혔어. 난 갇힌 거야. 여긴 감옥이거나 아니면 지옥이야. 나가야 해. 사샤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창문을 깰 수 있는 물건을 찾았다. 작은 테이블과 의자가 보였다. 저 의자를 들어 던지면 유리는 깨질 것 같았다. 사샤는 헐레벌떡 달려가 의자를 집었다. “…….” 허겁지겁 그것을 올리려는데 무언가가 그녀의 후각을 자극했다. 사샤는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그러고는 무언가에 홀린 듯 의자 대신 금색 돔 커버를 들어 올렸다. 빵과 버터, 소시지와 신선한 과일, 기름진 고기가 커다란 쟁반 안에 한가득하였다. 굶주린 배가 소리를 내며 아우성이었다. 사는 것도, 도망치는 것도 다 좋지만 무엇보다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었다. 먹어야 해. 배가 고파. 배가 고파! 사샤는 식욕에 눈이 뒤집혔다. 그녀는 포크와 나이프를 쓰는 법도 잊고, 손끝이 아려 오는 고통도 있고 두 손으로 음식을 제 입으로 마구 쑤셔 넣었다. 텅 빈 배 속을 채우느라 씹는 것도 잊고 모조리 목구멍 안으로 삼켰다. 평생 이토록 굶주려 본 적이 없다. 고아가 되어 비렁뱅이로 구걸을 했어도 이토록 광인처럼 음식을 탐한 적은 없었다. “콜록!” 목구멍으로 마구 쑤셔 넣던 음식이 입 밖으로 뿜어져 나왔다. 사샤는 가슴을 두드리며 주전자째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콜록! 콜록!” 음식이 여전히 가슴에서 내려가지 않는 듯하여 그녀는 물을 한 번 더 마셨다. 그러고는 가슴을 두드렸다. “콜록! 콜록!” 그러나 기침은 더욱 발작적으로 변했다. 종국에는 가슴까지 차오른 음식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듯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사샤는 더욱 발작적으로 기침을 했다. 왜 이러는지 알지 못했다. 콜록, 콜록, 은주전자에 비친 제 입가가 파랗게 질려 가는 것이 보였다. 왜 이러지? 사샤는 바닥에 쓰러져 제 입가에 묻은 음식을 닦았다. 가루처럼 하얀 빵 부스러기와 함께 입 밖으로 흘러넘친 흰 거품이 닦였다. 이게 뭐지? 꺽꺽 소리가 나며 더 많은 거품이 입 밖으로 흘렀다. 사샤는 껄떡껄떡 숨을 내뱉다가 이내 정신을 잃었다.   긴 어둠 끝에 눈을 떴다. 다시 기하학적인 천장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녀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제 얼굴을 짚어 보고 손을 보았다. 반창고와 칭칭 감긴 붕대. 모든 것이 마지막 기억과 똑같았다. 작은 테이블에는 어질러져 있지 않은 음식이 금색 커버돔에 덮여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그것만은 마지막 기억과 달랐다. 사샤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 문을 열었다. 뚜벅뚜벅 복도의 끝으로 걸어가 문고리를 돌려 보았다. 기억처럼 잠겨 있었다. 그녀는 복도에 나 있는 창문을 하나하나 다 당겨 보았다. 모두 다 잠겨 있었다. 그녀는 방으로 돌아갔다. 커튼을 열고 창문을 당겼다. 마찬가지로 잠겨 있었다. “…….” 사샤는 망연하게 바닥에 주저앉아 저의 주린 배를 움켜쥐었다. “배고파…….” 꿈인지 현실인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으나, 다시 배가 고팠다. 그녀는 테이블로 다가가 커버를 열었다. 꿈이었나? 어디까지가 꿈이었지? 어디까지가 현실이었지? 내가 음식을 먹은 건? 그건 꿈인가? 아니면 현실인가? 빵, 버터, 소시지, 얇게 썬 신선한 고기와 과일. 만일 그것이 현실이라면 거품을 물고 쓰러진 이유는 음식 때문일 거야. 분명 독이나, 이상한 약을 탄 거야. 하지만 꿈이라면? 왜 그런 꿈을 꾼 거지? 예지몽 같은 건가? 아니면 그저 단순한 불안감의 반증일까? 사샤는 기억을 더듬었다. 그때 먹지 않은 음식이 뭐더라? 사샤는 포도알 하나를 집었다. 눈으로 무언가 묻지 않았는지 면밀하게 살피고, 제 옷으로 그것을 꼼꼼히 닦고 냄새를 맡아 본 후 입안에 넣어 껍질은 뱉고 알맹이만 삼켰다. 그 후 한참 동안 숨을 죽이고 제 심장 박동을 초침 삼아 기침이 나는지 숨통이 조이는지 가늠했다. 그러고 나서 포도를 한 알 더 따먹었다. 또 한 알, 또 한 알, 바로 또 한 알. 그러다 두 알, 세 알, 네 알, 절제되지 않는 욕망이 결국엔 손끝에서 손바닥으로, 또 두 손으로 바뀌어 입속으로 포도알을 욱여넣었다. 기침이 났다. 기침 때문에 눈물이 나는 것인지, 눈물이 나서 기침이 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어느새 숨이 가빠왔다. 입가에 허연 거품이 일었다. 멍청한 계집애. 멍청이. 눈앞이 아찔해지며 몸이 기울었다. 희뿌옇게 눈앞이 흐려졌다. 이젠 다시 일어나지 마. 이젠 죽어. 그냥 죽어.   “…….” 달라진 것은 없었다. 눈을 뜨기도 전에 사샤는 그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눈부신 햇살, 여전히 열리지 않는 창, 새 하얀 시트, 변한 것이 없는 풍경. 사샤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제는 공포나 두려움보다 절망감이 더 컸다. “그만해. 제발.” 사샤는 제 머리를 감싸 쥐고 애원했다. 똑같은 천장을 바라보고 일어나 똑같은 굶주림에 시달리며 독이 든 음식을 삼키는 천치 같은 짓을 더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분명 똑같은 고통을 느끼고 똑같은 순서로 거품을 물며 정신을 잃을 것이다. 그것이 그녀를 절망케 했다. 본능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를 고통 속에 밀어 넣는 것. 이토록 멍청하고 잔인한 짓이 또 어디 있겠는가. “왜 이러는 거야!” 그녀는 방 한가운데 서서 비명을 쏟았다. 왜 이러는 거야. 내게. “원하는 게 뭐야! 왜 이러는 거야 대체! 그만해!” 제발 그만해. 제발. 원하지 않았다. 다시 살아나는 것도, 갇히는 것도, 겉만 번드르르한 지옥 속에 집어넣고 달콤한 독사과를 받아먹는 것도.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원한 적 없어. 한 번도 살기를 원한 적 없다. 원하는 것이라면 오로지 고통을 끝내는 것뿐. 오로지 그뿐이다. “부탁이야. 제발 그만해. 그만…….” 이것이 악몽이라면 제발 깨어나게 해줘.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죽여. 다시 배가 고팠다. 이것이 현실인지, 꿈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 이 세상에 모두가 사라지고 혼자 남은 것 같았다. 쳇바퀴를 구르는 쥐처럼, 이 끊임없는 악몽을 영원히 되풀이해야만 할 것 같았다. 외롭고 고통스럽고 무력했다. “날 내버려 두라고…….” 원하는 게 뭘까. 왜 이러는 걸까. 무엇이 목적인 걸까. 뭘 위해 의미 없는 생의 불씨를 살려놓고 그것을 짓밟는 짓을 계속하는 걸까. 이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신이 저에게 한 짓이었다. 아주 작은 불씨를 피워놓고 그 따사로움을 느끼려 하면 그는 곧 그것을 무참히 짓이겨버렸다. 이것은 신의 장난일까. 아니면 신의 가면을 쓴 다른 누군가의 유희일까. 아 그래. 이제 알았다. 여긴 지옥인 거야.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것이다. 잔인하고 가장 적절한 형태로 영원히 이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인가요. 어째서? 문뜩 오기가 생겼다. 오랫동안 쌓아놓은 분노에서 기인한 비틀린 감정이었다. 감각이 무뎌지고 그 안에 뜨거운 무언가가 고였다. 희망보다는 절망에 가까웠고 절망보다는 모든 것을 자포자기해 자해하는 심정에 더 가까웠다. 사샤는 방안을 뛰쳐나갔다.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았는지 모르겠다. 그녀는 그대로 잠긴 복도의 문으로 달려갔다. 비명을 지르며 몸을 부딪치고 문고리를 뜯어낼 듯 잡아 당겼다. 이런 걸 원해? 그래? 이렇게 발광하는 걸 원해? 그러다가 다시 거품을 물고 쓰러지길 바라는 거야? 둘둘 감긴 붕대 사이로 핏물이 시리게 배어 나왔다. 사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섬세하게 세공된 조각, 꽃 장식, 스탠드 등, 거대하고 우아한 르네상스풍 그림, 테이블이 보였다. 사샤는 스탠드를 집어 들고 문을 향해 던졌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스탠드가 문에 충돌하고 바닥에 처박혔다. 그다음은 꽃병, 대리석을 깎아 만든 조각상.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사샤는 방으로 뛰어 들어가 의자를 끌고 왔다. 비명을 지르며 그것마저 문으로 힘껏 던졌다. 그러고는 그 반동에 못 이겨 저도 바닥을 굴렀다. 문 앞에 부서진 물건들의 잔해가 널브러졌다. 그러나 그 단단한 문만은 흠집 하나 없이 견고했다. 사샤는 그렇게 바닥에 엎어져 분노와 눈물을 쏟았다. 종일 이렇게 발악하다가 다시 굶주림에 빵을 뜯기를 원하는 거다. 그러고 나면 다음 날 또다시 같은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뜰 테지. 그럼 다시 그의 유희가 시작되는 것이다. 아아. 어째서인가요. 힘들지만 바르게 자라왔는데. 사는 것이 고통스러웠지만 내색하지 않았는데. 한 번도 나를 위해 살아 본 적이 없는데……. 늘 참으며 봉사하며 살아왔건만. 삶이 이토록 고통스럽다면 죽은 후에는 행복해지고 싶어서. 아레사 수녀님이 그랬다. 잠시 스쳐 가는 이 고통스러운 생이 다하면 신이 다스리는 아름다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그래서 기도했어요. 헛되이 당신에게 기도했어요. 삶의 끝에는 눈부신 길을 열어 달라고. 그런데 당신은 나를 가두었군요.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하면서 끊임없는 고통을 되풀이하게 하며. 왜, 내겐 고통만이 존재하나요. 왜. 왜. 왜. 이것이 내 인생의 대가인가요. 이것이 당신이 원한 내 삶인가요? 사샤는 비틀대며 일어섰다. 흐르는 눈물을 닦고 침실로 돌아가 테이블 위의 음식을 쓸어 내고 죽을힘을 다해 단단한 나무 테이블을 들어 올렸다. 새된 비명, 고함처럼 날카롭게 뻗어 나가는 제 비명을 따라 그녀가 힘껏 내던진 테이블이 와장창 창을 깨고 밖으로 떨어졌다.   사샤는 헉헉거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엎어진 음식들의 군침 도는 내음이 후각을 자극했다. 사샤는 울음을 삼켰다. 비참했다. 다신 먹지 않겠어. 다신 당신이 정해놓은 순서대로 유희를 제공하지 않겠어. 그녀는 날카롭게 쪼개진 유리파편 하나를 집었다. 죽을 거야. 당신이 날 죽이지 않는다면 내가 나를 죽이겠어. 찰나의 순간 흩어진 음식 속에서 무언가가 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그 빛이 그녀의 시야를 헤집었다. 분명 유리 조각은 아니었다. 그 근처에는 유리 파편이 튀지 않았다. “…….” 사샤는 시선을 돌려 스치듯 본 그것을 좀 더 끈질기게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유리 조각을 손에서 놓고 기어가 엉망이 된 음식을 헤집었다. 뒤섞인 소시지와 양상추를 치우자 보이는 것은 분명 열쇠였다. “…….” 사샤는 혼란스러운 와중에 그것을 집어 들었다. 이게 왜? 열쇠가 왜 여기에 있지? 그녀는 복도 끝 잠긴 문을 떠올렸다. 갑자기 가슴이 쿵쿵 뛰었다. 모호하던 현실이 갑자기 분명해졌다. 심장은 꼭 살아있는 것처럼 박동했다. 음식 밑에 숨겨져 있던 걸까. 아니면 쟁반 밑에? 이것은 단지 시험이었을까. 이 열쇠가 그 모든 것의 해답일까. 사샤는 눈물을 닦고 확신할 수 없는 와중에도 열쇠를 들고 방을 나와 복도를 거닐었다. 무엇인가에 홀린 듯 멍하게, 아무 생각 없이 본능이 시키는 대로였다. 그녀는 제가 깨부순 문 앞의 잔해를 치우고 단단히 걸어 잠긴 열쇠 구멍으로 손에 쥔 것을 밀어 넣었다. 철컥. 열쇠가 돌아갔다. “…….” 그녀는 여는 것을 잠시 주저하였다. 갑작스레 닥친 해방이 오히려 잊고 있었던 두려움을 상기시켰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는 화려한 복도. 고독과 침묵으로 점철된 곳. 문을 열었을 때 이보다 더한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은 아닐까. 오히려 이곳을 그리워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막연한 초조함. 그러나 이것이 꿈이든 현실이든 사샤는 그 문을 열어야만 했다. 그것이 또 다른 지옥이라도 당장은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이라고는 이것뿐이다. 사샤는 문고리를 돌리고 잡아당겼다. “아.” 신음은 마치 탄성처럼 흘렀다. 그것은 절망의 소리도 희망의 소리도, 놀라움도, 또는 두려움도 섞이지 않은 단발의 음성. 빛이 없는 어둠 속에 드리운 새까만 벽. 출구가 없는 문을 열고 마주한 죽음처럼 축축한 시멘트. 사샤는 그것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차갑고 거칠었다. 그 절망은 이미 익숙하여 아프지 않았다. 다만 광기를 더해 줄 뿐이었다. “그만해.” 사샤는 중얼거렸다.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제발 그만해. 그러다가 다시 분노했다. 검게 드러난 벽에 머리를 찧었다. 쾅. 쾅. 쾅. 제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눈앞을 가렸다. 거칠어진 숨소리가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질 때와 다르지 않았다. “죽여! 죽여! 죽여!” 아아. 이제 정말 지쳤다. 이제 진절머리가 난다. 이것이 당신의 시험이라면 난 통과할 수 없어. 날 봐. 나는 영원히 멍청한 짓을 반복하며 고통받기만 할 뿐이잖아. 이제 제발 날 놔줘. 그만해. 제발 다시 눈뜨지 않게 해줘. 부탁이야. 제발. 부탁해요. 그러고는 다시 정신을 놓았다.   사샤는 눈을 떴다. 상아색과 금색의 천장. “흑…….” 눈물이 터졌다. 그렇게 빌었는데. 그토록 간절하게. 그토록 처절하게. 어째서야. 어째서 이러는 거야. 대체……. “흐윽…….” 이를 사리물어도 입술이 떨렸다. 온몸이 떨렸다. “일어나.” “…….” 사샤는 저가 흐느껴 울던 것도 잊고 낯선 사내의 소리를 따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지겨울 정도로 변하지 않는 방 풍경에 누군가가 들어와 있었다. 사샤가 내던진 의자와 테이블은 다시 말짱히 놓여 있었고 심지어 그곳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 벗은 장갑을 가지런히 내려놓고 그는 영화 관련 잡지를 뒤적이던 중이었다. 그는 잡지를 접어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한참 동안 얼이 빠진 채 침대에 앉아 있는 사샤를 면밀하게 관찰했다. 그의 시선은 사샤의 붉은 머리통에서부터 눈, 코, 입을 지나 손에 새로 감긴 깨끗한 붕대와 이불 안에 숨겨진 발끝까지 꼼꼼히 훑어 내려갔다가 다시 사샤의 눈으로 올라왔다. 사샤는 그를 기억했다. 왜냐하면 고문실에서 정신을 잃기 직전 가장 마지막에 본 자였다. 사샤는 그것이 자신이 살아 보는 최후의 장면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만큼 그의 잔상은 망막에 아주 또렷하게 남았다. “따라와.” “…….” 그는 침실 문가로 가 그녀가 나오길 기다렸다. “어, 어딜, 어딜 가려는 거야.” 사내는 대답 대신 열쇠를 들어 보였다. 그녀가 음식물 사이에서 찾아냈던 열쇠, 그것을 흔드는 눈빛은 침착하고도 잔인했다. “어서.” 그러고는 그는 목을 까딱이며 사샤를 독촉했다. 그가 풍기는 분위기는 사람을 두렵게 하면서도, 또 두렵지 않게 했다. 아니 두려움의 실체는 그의 제안을 거부했을 때 비로소 몸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사샤는 침대에서 일어나 비틀비틀 다가갔다. 그녀가 제 곁으로 어느 정도 다가오자 그는 성큼성큼 복도의 끝으로 걸었다. 사샤는 뒤따라 걷다가 말했다. “거긴 벽이야.” “…….” “내가 해 봤어. 거긴 벽이라니까.” 그는 뒤를 힐끗 돌아보며 무감하게 대꾸했다. “그래?” 그러고는 복도의 벽문이 아닌 복도의 가장 끝 방으로 가 문고리에 열쇠를 집어넣었다. “그 열쇠는…….” 그 열쇠는 벽문의 열쇠라니까. 철컥. 잠금 장치가 풀리는 소리. “…….” 사샤는 황망한 얼굴로 그를 올려 보았다. 남자는 심드렁히 대꾸했다. “방문 하나에, 열쇠 하나라. 지루한 생각이지.” “…….” “들어와.” 그의 행동은 제집처럼 거침없었다. 이곳이 익숙한 것은 여러 번 방문해 봤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는 모든 것을 연기하는 배우인가. “당신 대체 누구야?” 눈살을 찌푸리며 하던 궁리는 거대한 식탁 위에 차려진 진수성찬에 넋이 나가 풀렸다. “앉아.” 그는 의자 하나를 빼 주고 맞은편으로 가 앉았다. 사샤는 차마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문지방에 서서 입만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제복 블레이저를 벗어 의자에 걸쳐 두고 그녀의 옷깃을 잡아끌고 왔다. “앉아.” 사샤는 넋이 나가 넘어지듯 자리에 앉았다. 그는 그녀의 의자를 식탁에 가깝게 좀 더 밀어 주고 제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강압적이면서 신사적인 태도라. 이 무슨 기괴한 조화인가. 사샤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뭐 하는 거야?” 사내는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 들며 흘깃 그녀를 쳐다보았다. “식사.” “…….” 그는 무엇을 먼저 먹을지 궁리하며 넓게 펼쳐진 상을 좌우로 살폈다. “먹어. 사샤. 먹어 두는 게 좋을 거야. 굶어 죽고 싶지 않으면.” 그러고는 얇게 저민 송아지 고기를 제 접시 위로 가지고 와 보란 듯이 나이프로 썰었다. 사샤는 움찔했다. “음식에 독이 있어. 누군가 독을 탔어.” 그는 재미난 농담을 들었다는 듯 실소했다. “뭐가 우스워?” “음식에 독을 탄 게 아니야. 네 손끝에 묻혀 뒀지.” “…….” 그는 저민 송아지 요리를 포크로 찍어 우아하게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사샤는 깨끗한 새 붕대로 갈아 놓은 제 손끝을 보았다. 여기에?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그는 짓궂게 눈썹을 올렸다 내릴 뿐이었다. “어떻게…….” “네가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했으면 그럴 일이 벌어지지 않았겠지?” 그는 누구냐는 물음에 대답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게다가 놀랍고 당황하여 더듬거리는 질문에 비해 매우 태평한 대답이다. 그는 모든 것을 안다. 이 남자인가. 이곳은 신이 만든 지옥이 아니라 이 남자가 만든 지옥이었던 건가. 사샤는 덜덜 두 손을 떨었다. “어째서? 왜 내 손에 독을 묻혀 놨어? 여긴 어디지? 죽이려던 거였다면 날 내버려 두었으면 됐잖아. 왜 매번 그 짓을 반복하게 했던 거지?” “단지, 어떤 상황에서도 숙녀가 지녀야 할 품위를 지키라는 것뿐이야.” 품위라니! 제 꼴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품위라니! 지금껏 매일 저를 가지고 놀며 그 유희를 즐겨놓고 이제 와 그런 고상한 단어를 입에 올리다니! 사샤는 참지 못하고 그에게 포크를 집어 던졌다. 그러나 목적지를 잃은 포크는 그를 스쳐 지나가지도 못했다. “잘했군. 다시 손으로 식사해 보지 그래?” “…….” 사샤 커다란 눈에 다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맘 같아선 이 상을 들어 엎고 싶었다. 그러지 못해 억울해 죽을 지경이었다. 너무 속이 뜨거워 그게 눈가에도 치밀었다. 너무 화가 나면 눈물도 나는 거였다. “밥상머리에서 울면 식욕이 떨어져.” “흑…….” 남자는 한숨을 쉬며 제 포크를 냅킨에 닦아 그녀의 앞에 내려놓았다. “자.” “…….” 그러고는 두 손을 펼쳐 보였다. “내 손에는 독이 안 묻었으니까.” 그러며 손으로 빵 하나를 집어 반으로 쪼개 입안에 넣었다.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한 지 4주째야. 약물로 대체하는 것도 한계가 있어. 뭐라도 입안에 넣고 씹으라고.” “당신이 독을 탔기 때문이잖아! 날 죽이려 했기 때문이기 때문이잖아!” “죽이려 한 적 없어. 죽이려고 했다면 벌써 넌 죽었을 거야.” “살겠다고 한 적 없어! 몇 번이고 차라리 죽이라고 빌었어!” “포크와 나이프.” “대체 왜 이 짓을 하는 거야? 뭘 위해서 내게 이런 짓을 하냐고!” 그는 손으로 이마를 비볐다. 사샤의 쏘아붙이는 말투에 조금 진저리가 나는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먹지 않으면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겠어.” “…….” “포크와 나이프.” 그는 다시 한번 강조했고 사샤는 나이프를 집었다. 대체 뭐가 이렇게 태연한 거야? 돌았어? 나랑 장난해? 어처구니가 없는 것도 정도를 벗어났다. 도저히 저의를 알 수 없는 태연함이었다. 대체 뭐 하는 짓거리지? 나랑 뭘 하자는 거야. 그는 당장이라도 그것을 던질 듯 부들부들 떨리는 사샤의 손을 보며 농을 지껄였다. “내 것을 다 빼앗아 갈 셈이야?” “…….” “정말 손이 많이 가네.” 그는 냅킨으로 입을 닦고 자리에서 일어나 포크로 커다란 스테이크 덩어리 하나를 찍어 그녀의 접시에 덜어 주었다. “자.”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고깃덩어리. 그것을 보고 있는데 입안에서 군침이 돌았다. 그의 말이 맞다. 계속해서 굶주렸다. 배를 채우고 나면 어김없이 거품을 물며 쓰러졌고 일어나면 굶주림으로 뱃가죽이 너덜거렸다. 4주. 그렇게 오랫동안 붙잡혀 있었다니. 이렇게 오랫동안 붙잡혀 있었는데도 걱정되거나 생각나는 사람이 이토록 없다니. 아레사 수녀님과 바비. 그마저도 어렴풋한 그리움일 뿐 손에 잡힐 정도로 분명하지는 않았다. 어디에도 마음을 두고 산 적이 없는 까닭이다. 가슴이 메마른 까닭이었다. “설마 떠먹여 주길 바라는 건 아니겠지?” 그는 빵을 씹으며 물었다. 대체 이 종잡을 수 없는 자는 누구인가. 사샤는 여전히 그가 누구인지 몰랐다. 저를고문하던 그치가 이자에게는 깍듯했으니 대소령보다 높은 계급일 것은 분명했다. 그래. 그때 소장이라고 했지. 제정신이 아닌 사람 같아. 물론 도첸군은 제정신이 아닌 자들이 많지. 그러나 대부분은 괴물처럼 무서워. 디터라는 그놈처럼. 그 미친놈처럼 무섭다고. 그런데 이자는 애매해. 그 애매함이 정말 기괴하단 말이야. 사샤는 하는 수없이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고깃덩어리를 썰며 그를 곁눈질했다. 이젠 거리낄 것이 없다는 듯 그는 나이프로 이것저것을 푹푹 찍어 바로 입에 넣었다. 하는 행동은 더없이 가벼워 보이는데 느껴지는 무겁고 음습한 기운은 뭐란 말인가. 잘 빗어 넘긴 백금발 때문인가, 아니면 저 군더더기 없는 제복의 아우라인가. 아니면…… 사샤는 작게 썰린 고기를 입안에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그리고 생각 없이 한 덩이를 더, 또 한 덩이를 더. “여긴 어디야?” “…….” “음식을 먹으면 대답해준다고 했잖아.” “여긴 요새야. 사샤. 넌 여전히 내 포로고 여전히 내 감옥에 있지.” 감옥이라고? 이곳이? 사샤는 우아한 샹들리에와 고급 대리석을 살폈다. 이토록 사치스러운 감옥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여전히 요새란 말은 처음에 왔던 곳에 그대로 머문다는 뜻일 거다. 단지 환경만 조금 바뀌었을 뿐. “천천히 먹어.” 점점 살코기를 씹고 넘기는 속도가 빨라지자 그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자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거 같은데, 어디서 봤지. 고문실에서 본 것 말고 또 어디선가 그를 보았다. “콜록.” 잔기침이 올라왔다. 너무 급하게 먹은 탓일까. “콜록, 콜록.” 아니. 그게 아니야. 사샤는 입을 막고 기침을 하다가 파랗게 질려 그를 보았다. “콜록! 콜록! 콜록!” 기침은 발작적으로 변했다. 음식! 남자는 큭큭큭 웃음을 터트렸다. 식도가 타들어 갈 것 같고 숨길이 서서히 좁아졌다. “콜록! 콜록! 콜록!” “하하하!” 그는 배를 잡고 웃었다. 사샤는 테이블을 집으려다 미끄러져 바닥으로 쓰러졌다. 콰당, 의자가 함께 넘어갔다. 남자는 계속해서 웃고 있었다. 사샤의 입 밖으로 하얀 거품이 흘러나왔다. 꺽꺽 소리를 내며 그녀가 고통스레 바닥을 긁었다. 남자는 더 크게 웃었다. “하하하! 멍청이!” 아. 알아. 기억났어. 이 남자. 처음 네르아에 도착했을 때 그를 보았다. 하숙집의 신문에서. 요한 폰 윌렌도르프. 어떻게 그걸 잊을 수 있을까. 역시 국경을 넘는 짓 따위는 하지 말아야 했어. 첩보 따위는 어울리지 않아. 그의 말이 맞다. 사샤 로랑. 너는 멍청이다. “사샤.” 그가 다정하게 저를 불렀다. 이 빌어먹을 개새끼. 사샤는 쿨럭거리다가 다시, 진절머리 나게도 다시,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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