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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52화


52화 '어디까지 하는가 보자.' 하지만 발드르가 공주가 하는 짓을 두고만 본 것은, 어쨌든 언젠가 떠날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왕족이자 왕이 보낸 사절이었다. 국왕은 명목상 그의 군주기도 하니 척져서 좋을 것은 없었다. 발드르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며 공주가 하는 모든 일에 어울려 주었다. 산책과 사냥과 차 모임에. 그중 어느 하나 즐거운 것 없이 불쾌감을 느꼈던 것은 공주가 하나부터 열까지 누군가와 비교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자리에 이 여자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 생각은 무도회 날 절정에 달했다. 공주는 무도회장에 늦게 나타나 다른 사람들을 한참이나 기다리게 했다. 그 기다림이 그녀가 등장했을 때 모두의 눈에 띄는 효과를 가져오긴 했으나 그에겐 불쾌감만을 더했을 뿐이었다. '가지가지 하는군.' 삼단 같은 머리칼도, 그 머리칼에 박힌 별이 내려앉은 듯한 장신구도, 너무도 얇아 환한 불빛에 속이 비쳐 보이는 드레스도 발드르의 마음을 끌지는 못했다. 발드르는 예법에 따라 가장 서열이 높은 여자인 공주에게 먼저 춤 신청을 했다. 춤을 추고 난 뒤 그는 뒤로 물러나 다음 춤 신청은 아나에게 했다. 나이 지긋한 백작 부인을 무도회의 후견인으로 둔 아나는 두 눈을 반짝거리며 즐거워했다. 아나의 두 눈을 보자 그는 처음으로 공주의 장단에 어울려 준 데 대한 보람을 느꼈다. 그는 음악에 맞춰 아나와 춤을 추었다. 수업 덕분인지 아나는 부드럽고 유연하게 춤을 추었다. “공작님.” 춤을 추면서 아나가 그에게 속삭였다. “이 자리에 선생님도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목소리였다. '그러게.' 같은 마음이라고 발드르는 생각했다. '그녀가 이 자리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나와의 춤을 마친 후 그는 예의상 몇몇 귀족 부인들과 또 춤을 추었고, 의무가 끝나자마자 구석진 자리에 틀어 박혔다. 그리고 몇 번이나 자신에게 눈길을 주는 공주의 시선을 무시했다. 어차피 춤을 신청할 권리는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공주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반짝이는 불빛을 보았다. 앞뜰의 언덕에 별이 내려앉은 듯이 반짝이는 작은 불빛을. 하인들은 무도회 준비에 여념이 없고, 방문객들은 모두 이 무도회장에 있다. 그럼 저기 있는 사람은⋯⋯. 그것이 누구의 등잔불인지 알아차린 순간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아무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무도회장을 곧장 빠져나갔다. '피는 속이지 못하는구나.' 저택의 계단을 내려가며 다시 한번 그는 뼈저리게 깨달았다. '사랑하지 말아야 할 여자를 사랑하는 것은 집안 내력인가?' 언덕 위로 올라가자 잔느가 무릎을 끌어안고 웅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발드르를 발견하자 비명을 지르며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때, 그는 사실 울고 싶었다. 모든 것을 예전으로 되돌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방법을 알지 못해 절망스러웠다. '나는 대체 뭘 원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대체⋯⋯ 어떻게 하면 좋지?' 며칠 후 그는 하녀를 통해 잔느가 공주의 방으로 불려 갔다는 소리를 들었다. '잔느까지 건드려?' 그 소식에 발드르는 드디어 불청객을 쫓아낼 결심이 섰다. 하지만 그에 앞서 잔느가 공주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알고 싶었다. 사실, 공주가 잔느에게 어떤 이야기를 했을지는 짐작이 갔다. '자신과 나 사이를 주선해 달란 것이겠지.' 발드르는 잔느가 공주의 편에 설지 자신의 편에 설지 내심 궁금했다. 그는 공주를 통해 잔느의 마음을 알아보고 싶었다. 자신에게 조금도 마음이 없는지. 하지만 잔느는 그 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방 안에 틀어박혀 있기만 했다. 결국 참다못한 발드르는 야심한 밤, 그녀의 방문을 두드리고 말았다. '공작님이 그분과 혼인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혼인이 하고 싶으시다면 차라리 다른 분과 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는 바람대로 잔느의 진심을 알게 되었다. '왜?' '제가 공작님을 사랑하니까요.'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공주로 인해 그녀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감사라도 표해야 하는 것일까? 사랑 고백을 받은 날, 발드르는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홀린 듯이 공주가 묵고 있는 손님방으로 향했다. 문을 두드리자,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머리가 촉촉이 젖은 공주가 속이 훤히 비치는 얇은 드레스 차림으로 문을 열었다. 방 안으로 들어오라는 말에 발드르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공주에게 단언했다. “내일 당장 채비하여 이곳을 떠나 주시길 바랍니다.” 놀란 공주가 울며불며 그에게 매달렸지만, 발드르는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이틀 뒤, 흐느끼는 공주를 실은 마차가 떠나자 그는 앓던 이가 빠진 듯한 후련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공주를 몰아내고 나니 다시 한번 발드르에게 불면과 번민의 밤이 찾아왔다. '그녀가 나를 사랑한다고 한다. 사랑은 하지만 정부는 되어 줄 수 없다고.' 잔느 드 툴루즈는 가문의 영예와 자존심을 선택했다. 그는 낮 시간을 보내는 중에도, 잠에 들기 위에 침대에 누운 와중에도 잔느가 한 말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저는 방타두르 공작 부인의 자제이신 마엘 도련님을 가르치면서 두 분 모자가 다른 이들에게 어떤 취급을 받는지 보아 왔습니다. 손가락질받는 것이 당연한 조롱거리였으며, 분풀이 대상이었지요. 공작님을 사랑합니다만 그것이 제가 전락할 이유는 되지 못합니다.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주제넘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제가 아니어도 좋으니, 공작님께서 좋은 가정을 이루어 사랑받으시며 살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런 가정에서 자랐고, 사랑받은 기억이 제게 역경이 닥칠 때마다 저를 지켜 주었습니다. 공작님과 아나 아가씨께도 그런 행운이 있기를 빕니다.' 프랑에선 그녀가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감히 잔느를 조롱하거나 그녀에게 분풀이할이는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그렇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발드르는 지금이라도 당장 그녀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만나서, 같은 마음이면 아무 문제 없지 않으냐고 말하고 싶었다. 그 누구도 당신을 조롱하게 두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단순히 조롱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 잔느가 정부 자리를 거절한 게 아니란 것을.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떳떳하기 위해 유배지의 가정 교사로 살 것을 선택했다. 그 결심을 흔들리게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설령 그 결심을 돌려놓을 수 있다 한들 나중에 잔느가 후회하지 않게 만들어 줄 수 있을까? 알 수 없었다. '⋯⋯그렇군.' 고통과 번민의 밤이 수차례 그를 스쳐 지나갔다. 원하는 사람을 가질 수 없다는 고통 속에서 그는 철처럼 담금질 되었다. 그리고 고통 속에서 그는 깨달았다. 작위를 버리고 공작저를 훌쩍 떠나 버린 형의 마음을. '형은 아내와 뱃속의 아이에게 치욕을 안기고 싶지 않았던 거군.' 그의 형은 공작저를 떠났기에 비참하게 죽었지만, 적어도 아내와 자식은 수치와 불명예 속에 살지 않을 수 있었다. 만약 형이 공작저에 남아 작위를 계승하고 하녀를 애인으로 삼았다면 아나는 사생아가 되고 하녀는 정부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형은⋯⋯ 형은 아마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 결혼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자식에게 다시 작위를 물려주었겠지. '오래 살고 볼 일이야.' 형이 이해되는 순간이 올 줄이야. 그는 믿기지가 않았다. '형은 그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을까, 한 번도?'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알 수 없었다. '스카디의 공작이 아니라 평범한 필부로 죽는 순간에도?' ⋯⋯자, 그래서 자신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잔느는 그를 원하지 않기로 선택했다. 이제는 발드르가 선택할 차례였지만 그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은 채 고민에 휩싸여 하루하루를 보냈다. 마치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 영원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나 시간은 유한하고, 행운의 여신은 망설이는 자를 싫어했다. 공주가 떠난 뒤 석 달 후, 또다시 왕실 마차가 스카디 공작저에 도착했다. ❖ ❖ ❖ 그날은 여느 날과 같았다. 나는 공부방에서 아나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공부방의 문을 다급하게 두드렸다. 그 다급함은 단순히 간식거리를 가지고 온 하녀 아이의 노크 소리답지가 않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문을 열어 보니 하녀가 숨이 가쁜지 헐떡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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