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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51화


51화 공작은 갑자기 공주 전하에 대한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다. 그가 하는 말은 그가 아직 공주 전하의 마법에 걸리지 않았다는 증거같이 느껴졌다. 그 말에 기쁨을 느끼다니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것이 분명했다. 쫓아가기 어려울 정도로 성큼성큼 걷던 그가 멈춰 섰다. “그대가 공주의 방으로 들어가 잠시 있다 나왔다 들었소. 둘이 무슨 말을 했소?” 그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공주가 그대에게 무슨 말을 했소?” 나는 잠시 망설이다 사실대로 고백했다. “공주 전하께서는 공작님과 간절히 혼인하고 싶어 하십니다. 하여 공주 전하께서 공작님과 혼인할 수 있도록 제게 오해를 풀어 달라 간청하셨습니다.” “무슨 오해 말이오? 이곳에 와 내 저택을 함부로 쓰고 식량을 축내고 있다는 오해?” 그가 쏘아붙이듯 물었다. “공주 전하를⋯⋯ 따라다니는 추문에 대한 오해 말입니다.” “난 그녀의 추문이 뭔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소. 오히려 그대 입으로 추문이 있다는 사실을 들었으니 공주가 헛수고를 했군.” 그런가, 추문을 사실로 받아들여 자신을 경계하고 있다는 공주 전하의 생각은 모두 오해였다. 나는 할 말이 없어 가만히 서 있었다. “그래서 그대는 공주의 청을 들어줄 생각이었소?” “⋯⋯.” “내게 그 추문에 대한 오해를 풀어 주고 공주를 도와줄 생각이었소? 말해 보시오. 그대도 내가 공주와 혼인하기를 "원하오?” 그가 물었다. “그대의 의견은 어떻소?” 그리고 나는 그 순간 운명의 기로에 섰다고 느꼈다. 이 순간 나는 공주 전하를 두둔한 뒤 임무를 완성하고 또 그 사실을 공주 전하에게 알려 유배지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 요청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광증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아닙니다.” 나조차도 예상 못 한 말이 툭, 하고 튀어나왔다. “공작님이 그분과 혼인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정 혼인이 하고 싶으시다면 차라리 다른 분과 해 주십시오.” “왜?” “제가 공작님을 사랑하니까요.” 사랑이란 이름의 광증이었다. “저는 공주님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나 한 가지만은 확실합니다. 공작님, 그분은 공작님을 사랑하지 않으십니다. 제가 느끼기에 그분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고 그 사랑이 너무나 커 다른 사람이 들어올 공간이 없습니다. 저도 공작님이나 공주님 같은 고귀한 분들에게 혼인이 거래라는 걸 압니다. 하지만 제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어린 시절, 공작님을 사랑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제 말이 주제넘게 들릴 것을 알지만 저는 공작님께서 아버님과 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길 바랍니다. 공작님과 아나 아가씨가 행복하길 바랍니다. 그러니 혼인이 하고 싶으시다면 실리를 포기해서라도 공작님을 사랑하는 분과 혼인하십시오.” 숨도 쉬지 않고 말한 뒤에 나는 숨을 헐떡였다. '저지르고야 말았구나.' 후회해 봤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미 말을 뱉은 후였다. “⋯⋯.” 공작은 내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그는 아주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소슬한 가을바람이 우리 사이에 불어왔다. “나를 사랑한다고?” 머리칼을 휘날리며 그가 믿을 수 없다는 어투로 되물었다. “예.” 이제 와서 부정할 수 없으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부터?” “오래전부터입니다.” “내가 정부가 되어 달라는 제안을 했을 때도 나를 사랑하고 있었소?” “예.” “그럼 왜?” 그의 초록빛 눈이 격랑을 만난 배처럼 요동쳤고, 그의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그럼 내 제안을 왜 거절했소?” “⋯⋯.” “나를 사랑한다면서?” 이것이 바로 내 고백이 불러온 여파였다. 나는 고개를 들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공작님을 사랑하지만, 저는 공작님의 정부가 되기에는 저 자신도 많이 사랑합니다.”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다. “저는 방타두르 공작 부인의 자제이신 마엘 도련님을 가르치면서 두 분 모자가 다른 이들에게 어떤 취급을 받는지 보아 왔습니다. 손가락질받는 것이 당연한 조롱거리였으며, 분풀이 대상이었지요.” “⋯⋯.” “공작님을 사랑합니다만 그것이 제가 정부로 전락할 이유는 되지 못합니다.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주제넘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이다음에 하려는 말은, 정말로, 내가 하기에는 너무도 주제넘은 말이라 나는 많이 망설였다. “제가 아니어도 좋으니, 공작님께서 좋은 가정을 이루어 사랑받으시며 살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런 가정에서 자랐고, 사랑받은 기억이 제게 역경이 닥칠 때마다 저를 지켜 주었습니다. 공작님과 아나 아가씨께도 행운이 있기를 빕니다.” 하지만 이미 빗장을 푼 터라 말은 멈출 줄을 모르고 술술 흘러나왔다. 다 털어놓고 나니 막힌 가슴이 뻥 뚫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 비밀을 숨기는 것은 어찌나 어려운 일인가. 진실을 밝히고 나자 속이 다 후련했다. “⋯⋯.” 그는 또다시 한참 동안이나 아무 말이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내 말에 가타부타 말을 얹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바람이 차군.” 하기야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돌아갈까요.” 우리는 다시 저택으로 돌아갔다. “⋯⋯.” 걷는 내내 그는 어딘가 좀 멍한 표정이었다.     공주 전하께서 수도로 돌아가신 것은 그로부터 이틀 뒤였다. 떠나시던 날 이른 아침, 에트올 남작 부인이 다시 나를 찾아와 공주 전하께서 내게 건넸던 별 장식을 요구했다. “멍청하구나. 입에 발린 말 한마디가 너뿐만 아니라 네 가문을 구했을 텐데.” 정말로 그랬을까?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이제 내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고요했기 때문이다. 나를 사로잡았던 광기가 물러갔기 때문일까? 그건 아니었다. 공작 각하께 내 마음을 남김없이, 벌거벗듯이 고백한 그날 나는 완전히 광기에 굴복했다. 그건 정말 완벽한 항복이었다. 그렇게 내 광기에 무릎 꿇고 나니 그간의 저항은 모두 의미 없어지고 오직 편안함만이 남았다. 그렇다. 나는 그를 사랑하고, 그의 행복을 바란다. 뭐 어쩌란 말인가? 생각해 보니 그건 감출 만한 일도 못 되었다. '내가 그를 사랑하고, 그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 무슨 잘못이라도 된다고.' 비밀을 고백하고 나니 자유로워졌다. 나는 잠도 잘 자고, 다시 식욕도 찾았다. 잘못을 숨기려 전전긍긍하는 죄인처럼 방 안에 웅크려 있지도 않고 산책도 하게 되었다. 아름다운 가을이 지나고 있었다. 곧 겨울이었다. ❖ ❖ ❖ 잔느의 마음이 고요해진 바로 그 순간부터 발드르의 마음은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발드르는 잔느의 고백을 듣자마자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눈앞의 여자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사랑은 하나 그것이 자신을 전락시킬 정도는 아니라고, 그러니 사랑을 알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사시라고. 행운이 있길 빈다고.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그녀와 함께 저택으로 돌아오면서 그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을 몇 번이고 되묻고 싶은 충동을 참아야 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나를 사랑하는데 다른 사람과 행복하게 살라니?' 그는 미쳐 버리기 직전이었다.     크리티엔이라고 했던가? 공주가 저택에 도착한 그 순간부터 발드르는 공주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의 수행원들은 이곳이 왕궁이라도 되는 양 자신의 사용인들을 노예처럼 부렸고, 왕실 근위병들은 사병 숙소의 간부들을 몰아내고 앉아 낄낄거렸다. 겨울을 위한 식량 저장고는 금세 거덜이 났고, 하인과 시녀들은 지치기 시작했다. '도대체 언제 떠날 거지?' 게다가 무도회라니. 그녀는 마치 자신이 이곳의 주인이라는 듯이 무도회를 열고 근방의 모든 귀족들을 초대해 달라고 요구했다. 공주 이전에 잔느 또한 요청했던 무도회였기에 거절하진 않았지만, 무도회를 개최하기 위한 공주의 요구가 끝이 없을 줄은 몰랐다. 궁정의 최신 유행을 알려 준다며 방문하는 휘하 귀족들 모두에게 까다로운 복장을 요구하고, 계단과 로비는 화려한 꽃 장식으로 꾸미길 원했으며, 악단과 요리사를 비롯해 무도회에 입장하는 여성들에게 건네기 위한 각종 보석으로 장식된 부채를 백 자루나 만들어 달라니. '미쳤나?' 발드르는 어이가 없었다. 갑자기 보석이 박힌 공예품이 하늘에서 떨어지겠는가, 땅에서 솟아오르겠는가? 연로한 폴린느 부인은 무도회 준비에 따른 일정을 소화하느라 쓰러질 지경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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