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50화
50화
공주 전하의 말에 나는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내가 너무 솔직하게 말을 했나요? 아니면, 혹시 그대가 공작을 마음에 품고 있어 주저하는 것인가요? 후자라면 오히려 다른 여자보다 내가 공작의 아내가 되는 편이 좋을 거예요. 나는 남편을 애인에게 뺏기고 분노만 하는 여자와는 다르니까요. 아예 우리 공작을 함께 공유하면 어때요? 내 애인들도 함께 쓰고요. 우린 좋은 친구가 될 거예요.”
그녀의 말을 들으며 나는 깨달았다.
'그 추문들이 모두 사실이구나.'
밀려오는 깨달음에 그저 정신이 멍했다. 눈앞의 공주 전하는 여전히 천사처럼 아름다우셨지만 내겐 이제 그 모습이 달리 보였다. 그녀의 모습이 속이 텅 빈 껍데기 같았다.
'이분은 자신 외에 그 누구도 사랑해 본 적이 없으시구나.'
발코니에서 자신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남자들이 싸우는 모습을 구경하며 즐거워했다는 소문은 사실일 것이다.
양쪽을 오가며 둘의 경쟁심을 부추겼다는 소문도. 왜냐하면 이분에게 애인이란 옷이나 구두처럼 자신을 즐겁게 해주는 물건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주 전하께서는 공작과의 혼인을 원한다. 그가 이분과 혼인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걸까, 만약 그가 이분이 놓은 사랑의 덫에 걸리기라도 하면? 그 미래가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그의 마음은 폐허가 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공주 전하는 지금 내게 거짓말을 종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거짓말을 하고 나면 나는 자유가 된다. 그리고 더 이상 우리 가족의 생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제게⋯⋯ 조금만 시간을 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럼요, 고마워요! 고마워요, 툴루즈 양! 그대는 나를 괴물에서 구해 줄 용사로군요! 어쩌면 그대가 먼저 유배당해 이곳에 온 것은 나를 구해 줄 운명이었기 때문인가 봐요! 자! 이건 오늘 맺어진 우리 우정을 기념하기 위한 선물이에요!”
그러더니 그분은 숱 많은 머리칼을 훑어 머리 장식을 하나 떼어 냈다. 별 모양의 장신구였는데, 그분은 내 손에 그것을 쥐여 주었다.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건 받을 수 없습니다. 저는⋯⋯.”
“왜요? 받아요. 친구가 친구에게 선물을 주는 것이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요? 자, 이것으로 목걸이를 만들어요, 팔찌나 브로치를 해도 좋고요. 궁정에 가면 이 별을 단 장신구를 자랑해요! 그럼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모두가 그대가 내 친구라는 것을 알게 될 거예요.”
공주 전하의 장신구를 받아 들던 나는, 그 순간 문득 에트올 부인의 가슴 근처에서 반짝이던 별 브로치가 떠올랐다.
❖ ❖ ❖
방으로 돌아온 나는 별 장신구를 만지작거리며 상념에 잠겼다.
'공주 전하께서는 나를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어.'
공작이 다른 사람 말은 안 들어도 내 말은 들어줄 것이라니, 정말 어떤 헛소문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에게 정부가 되라는 제안을 받긴 했지만, 몇 달 전의 일이다.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빨리 바뀌는가? 게다가 어제 그에게 직접 들은 말이 있지 않은가. 동정심에서 한 말이라고.
'그런 내가 공주 전하에 대해 좋은 말을 한다 한들⋯⋯ 그가 제대로 듣기나 할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가 내 말을 받아들여 공주 전하에 대한 경계를 푼다면, 그분을 사랑하지 않고 견딜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공주 전하께서는 정말 너무도, 너무도 아름다운 분이셨다.
'어쨌든 그에게 공주 전하의 칭찬만 해도, 난 이곳에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깊은 고민에 휩싸였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짓이라는 게 분명했지만 유혹이 너무나 컸다. 더군다나 내가 공주님께 좋은 말을 하더라도 그가 사랑에 빠지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공주 전하를 사랑하게 되면 어떻게 하지?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나 때문에?'
가까이서 본 공주 전하는 같은 여인이 보아도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하물며 남자 눈에는 대체 어떻게 비칠까? 공주 전하께서는 그 아름다움으로 사람도 죽일 수 있었고, 실제로 죽인 적도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사이에 계속해서 시간이 흘렀다. 공작을 만날 기회가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도 이러다 유배에서 풀려날 기회를 놓치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나는 다시 잠을 설치기 시작했다.
불면의 밤이 이어지자, 아나가 걱정할 만큼 단시간에 나는 수척해졌다.
'아나에게도 못 할 짓이다. 그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못 할 짓이야.'
⋯⋯라는 생각과 동시에.
'어머니를 만나고 싶어. 동생을 만나고 싶어. 이제 너무 지쳤어. 도망가고 싶어. 그가 없는 곳으로 도망가서 더 이상 그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고 살고 싶어.'
⋯⋯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생각이 나를 양편에서 잡아당겨 내 몸이 두 갈래로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를 사랑해. 그에게서, 이 유배지에서 도망치고 싶어. 왜냐하면 그 사랑은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가 공주 전하만큼은 사랑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차라리 좀 더 다정하고 상냥하며 그를 사랑하는 다른 사람이 있다면⋯⋯. 아, 내가 대체 왜 그를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는 거지? 왜? 그가 외로울까 봐? 내가 대체 누굴 걱정하는 거야, 유배 온 마당에.'
고민하는 한편으로는 나는 고민만 하다 그냥 시간이 지나가 버리기를, 프랑으로 돌아갈 기회를 놓쳐 공주 전하께서 나를 원망하며 다시 궁정으로 떠나가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몰랐다.
양립할 수 없는 생각으로 번민하며 그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해 수업 외에는 그저 방에 틀어박혀 있던 어느 날이었다. 내가 기회를 찾아가지 않자, 기회가 나를 찾아왔다.
❖ ❖ ❖
그날 밤도 나는 침대 대신 책상에 앉아 검은 거울처럼 변한 창을 바라보며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버드나무 달인 물도 두통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고, 통증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기만 했다.
'못 해.'
아무리 생각해도 못 할 것 같았다.
'공주님을 칭찬하고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라니, 나는 못 해.'
그런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던 데다, 또 그럴 말을 할 수 있을 만한 자리도 만들지 못할 것 같았다.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이 야심한 시각에. 하녀 아이라면 문을 두드리고 나서 무슨 이유인지 말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다소 의아함을 느끼며 문을 열었다.
나를 재촉하기 위해 온 에트올 남작 부인이 문 앞에 서 있으려나 했는데, 뜻밖에도 공작이 서 있었다.
“⋯⋯.”
“왜 아직 자지 않고 있소?”
문을 두드린 사람이 할 질문은 아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대화 좀 하러 왔소.”
공작이 말했다.
“내가 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적절치 않을 듯하니 외투를 입고 나오시오. 좀 걸읍시다.”
이 야심한 밤에? 날이 추운데? 혹시 농담하나 싶어 쳐다봤지만 그의 얼굴을 보니 더없이 진심이었다. 나는 문을 닫고 나서 옷을 챙겨 입은 뒤 등잔에 불을 켰다.
'무슨 일인지?'
짐작해 보려 해 봤으나, 아무 예상도 할 수 없었다.
캄캄한 밤이었다. 목적지 없이 우리는 걸었다. 등잔불을 들고 밖으로 나오며 나는 저택을 흘긋 바라보았다. 저택의 불은 대부분 꺼져 있었지만 드문드문 켜진 곳도 보였다. 공주 전하께서 기거하시는 방도 그러했다.
'혹시 우리가 나가는 걸 또 보고 있을까?'
대체 그는 무슨 말을 하려고 나를 이 야심한 밤에 불러낸 것일까? 밤에 남자와 단둘이 걷는데 무섭지는 않았다.
그렇다. 지금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은 공작이 내게 무슨 짓이라도 할까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이 와중에도, 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 와중에도 단둘이 있으니 심장이 뛰는구나.'라고.
'미쳤지.'
“공주가 떠나려 들지 않는군. 이곳에 꿀이라도 발라 놓은 것처럼.”
그가 혼잣말처럼 이야기를 시작했다.
“말이 국경 순찰이지 공주와 수행원들은 내내 저택에 틀어박혀 있소. 국경을 순찰하다 공주가 납치라도 당하거나 다치면 어쩌냐는 것이 그들 주장인데, 글쎄, 그런 이유라면 아예 안전한 왕궁에서 나오지 않는 게 좋지 않았겠소?”
“⋯⋯.”
“이곳에 그들이 기거하며 저장고의 식량을 축내고, 정원을 망가뜨리고, 사냥터의 짐승들을 재미 삼아 죽이는 동안 나는 참아 왔소. 무도회를 열어 자신이 주인인 양 구는 것도 참았지. 내 충정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러나 내 인내심도 이제 한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