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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46화


46화 여름이 지나고 난 뒤 공작이 돌아왔다. 당연한 일이지만 공작이 돌아온 뒤 나는 그를 알현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래도, 공작이 돌아온 것만으로도 나는 마음이 한결 놓였다. 만일 그가 심하게 다쳤다면 내 귀에도 소식이 들렸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을까? 아마도. ⋯⋯아마도 저택에 큰 소란이 일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또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큰 상처는 아니더라도 그가 다쳐서 돌아왔을까 봐서였다. 그러나 내가 알 수 있는 정보는 아무것도 없었다. 공작이 떠났다 돌아온 뒤로도 내겐 여느 날과 같은 날들이 이어졌다. 시간이 지나는 동안 나는 점차 애가 탔다. 그런데 대체 내가 애탈 일이 뭔가? 나도 내가 뭘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그가 괜찮은지 알고 싶었다. 괜찮은지, 어디 다치지는 않았는지, 그곳에서 무슨 일은 없었는지. 그리고, 그리고⋯⋯ 다시 함께 식사하고 대화하는 생활을 손에 넣고 싶었다. 차라리⋯⋯. '제안을 받아들인다고 말하는 편이 좋았을까?' 그때는 정부가 되라는 제안을 받은 것이 수치스럽고 화가 났다. 하지만 소식을 들을 수 없게 된 것만으로도 이토록 고통스러울 거라면 차라리 그 지위라도 손에 넣어 곁에 가까이 있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마음은 같지 않았나. 그도 나를 원했고 나 또한 그를 원했다. '그럼 그냥 그걸로 되지 않을까?' 그냥, 나는 굴복하고 싶었다. 그를 만날 수 없는 고통, 그와 더 이상 대화할 수 없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고 싶었다. '그럴까?' 그러나 그 순간, 가족의 얼굴들이 떠올랐다. 어머니와 동생, 연달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얼굴이. 내가 나중에 죽어서 그분들을 만나면 당당하게 공작의 정부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적법한 아내는 될 수 없어 정부가 되었다고?' 나는 그러지 못할 것 같았다. '사랑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그제야 나는 정신을 차렸다. 제아무리 고통스럽다 한들 나는 가족들에게 떳떳할 수 없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제안은 단 한 번이었다. 만약 스카디 공작이 나를 사랑했다면 단 한 번의 제안으로 쉽게 끝낼 수 있었을까? '그가 나와 같은 마음이었다면? 그래서 지금 나와 같은 고통을 겪고 있다면?' 답은 금방 나왔다. '절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지. 나처럼 속이 타들어 간다면.' 착각해선 안 된다, 그와 내가 같은 마음이라고. 그는 그저 다른 귀족처럼 나를 한번 떠본 것뿐이었다. 정신을 차린 나는 마음을 다잡으려 노력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갑자기 저택의 하인들이 눈에 띌 정도로 분주해졌다. 폴린느 부인이 열쇠 꾸러미를 쩔렁거리며 온 저택을 샅샅이 훑고, 하녀들이 무릎을 꿇고 온 바닥을 광을 내며 벅벅 닦고, 하인들이 갑자기 벽지가 변색된 곳에 새 벽지를 사다 바르고, 사다리를 대고 저택의 모든 유리창과 창틀, 샹들리에 등을 깨끗이 손질했다. 몇몇 가구들은 밖으로 내어져 도끼로 쪼개진 뒤에 땔감이 되었고 연이어 새로운 가구들이 들어왔다. 나는 어리둥절해 있다 아나를 통해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공주님께서 곧 이곳을 방문하신대요! 어쩌면 무도회가 열리고 춤출 기회가 있을지도 몰라요! 선생님!” 공주 전하의 행차 때문이었다. “⋯⋯공주님이시라고요.” “첫째 공주님이시래요. 선생님께선 왕자님의 가정 교사셨죠? 그럼 공주님도 만나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안다. 나는 첫째 공주 전하를 먼발치에서 보기도 했고 소문도 들어 어떤 분인지도 알고 있었다. “먼발치에서 뵌 적은 있습니다.” 랑시스의 첫째 공주님, 크리티엔 드 랑시스 공주 전하는 명실상부한 사교계의 꽃이셨다. 진취적이고 자신만만한 성격에 총명한 두뇌, 조각 같은 외모가 한몫하여 그분은 어딜 가나 큰 인기를 끌었고, 그분이 무도회장에 등장하면 남자들은 기혼이든 미혼이든 애인을 두고 있든 아니든 앞다투어 춤을 추길 원했다. 하지만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도 짙어진다 했던가. 그분에겐 그림자처럼 추문도 따라다녔다. 공주 전하가 사람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다가 자신의 승리가 확정되었다 싶으면 흥미를 잃고 가차 없이 상대를 짓밟아 버린다는 사실은 궁정에서 유명했다. 그분은 또한 결투를 관전하길 좋아했다. 이 때문에 많은 귀족 자제들이 그분의 총애를 얻기 위해 결투했다. 마치 투계처럼. 결투에는 당연히 부상이 따른다. 하지만 귀족 자제들이 다치고 피를 흘린다 한들 아무도 공주 전하의 악 취미를 말릴 수 없었다. 공주 전하가 국왕 폐하의 총애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쉬쉬할 수 없을 만큼 큰 사건이 터진 적도 있었다. 국왕 폐하의 중신 쇼와즈르 공작의 자제와 생제르맹 백작의 자제가 결투를 벌여 공작의 자제가 사망하게 된 사건이었다. 궁정을 한동안 침통케 했을 만큼이나 큰 사건이었기 때문에 나도 그 일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본래 친한 친구 사이였던 두 사람은 공주 전하께서 자신을 더 사랑하고 있다며 말다툼을 벌이다 마침내 결투에 돌입했다고 한다. 하지만 쇼와즈르 공작의 자제는 사실 결투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그가 공작가의 유일한 남자 후계자였기 때문이다. 귀족 집안의 손 귀한 자제가 결투에 얽히면 보통 결투 전까지 다른 명망가의 귀족들이 결투가 성사되지 않도록 뜯어말렸고, 성사된다 하더라도 예의상 하는 시늉만 했다. 그러나 공주 전하께서 둘의 결투를 보길 원하셨기 때문에 그녀를 따르는 젊은 귀족 무리는 이 결투가 중신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쉬쉬했다. 두 자제는 궁정의 뒤뜰에서 결투를 진행했다. 결과는 공작 자제의 승리였다. 그러나 공작 자제가 검을 백작의 자제 목에 들이대며 공주 전하가 그의 것임을 인정하라고 큰 소리로 외쳤을 때 사건은 일어났다. 결과에 승복하지 않은 백작의 자제가 부츠에 숨겨 둔 단검으로 공작 자제의 허벅지에 구멍을 뚫었고 공작의 자제는 그대로 쓰러졌다. 모두가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그 광경을 공주 전하께서는 발코니에서 관람하였다고 사람들은 증언했다. 뒤늦게 후계자를 잃은 공작은 울부짖으며 복수를 천명했다. 서슬이 퍼런 공작의 분노에 놀란 생제르맹 백작은 아들과 짐을 싸 남부 끝자락으로 피신했다. 공작은 군대를 일으켜 백작의 영지를 부수고자 했다. 문제는 공작의 영지와 백작의 영지 사이에 다른 귀족들의 영지가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공작의 복수를 위해 길을 열어 주어야 하는가? 귀족들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졌고 이 문제는 결국 국왕 폐하가 둘 사이를 중재하고 나서야 끝이 났다. 왕이 내린 결론은 생제르맹 백작가의 영지 대부분을 회수하고 백작가의 지위를 남작으로 강등시키는 동시에, 쇼와즈르 공작에게 국왕 소유의 성을 하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완벽한 중재는 될 수 없었다. 국왕 폐하는 결투를 죄악으로 규정하고 이 일의 원흉인 공주에게 탕플 수도원으로 가 근신할 것을 명했다. 하지만 근신이 명해지는 바로 그 자리에서 공주 전하는 눈물을 흘리며 결백을 주장했다. '제가 결투를 조장했다니요! 모함입니다! 제가 발코니로 나가 그들을 본 것은 시녀가 결투가 벌어지고 있다고 말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결투가 벌어지고 있는 중에도 저는 그들이 왜 싸우는지 몰랐습니다!' 공주가 그렇게 억울함을 주장했지만 결국 국왕 폐하는 공주 전하를 수도원으로 보냈다. 그러나 그 이후 젊은 귀족 자제들 사이에서는 불평이 계속해서 터져 나왔다. 모두가 공주 전하를 원했다. 결투로 죽고 궁정에서 쫓겨난 귀족 자제들은 잊히고 점차 공주 전하는 언제 돌아오시는가만이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공주 전하께서는 한 계절이 지나고 나서 다시 화려하게 사교계에 복귀했다. 복귀한 첫 무도회 날 공주 전하께선 죽은 공작 자제를 애도하는 의미로 얼굴에 검은 베일을 두르고 검은 상복을 입으셨는데 그 상복 또한 유행이 되었다. “공주님은 분명 아름다운 분이시겠죠? 동화 속에 나오는 공주님들은 모두 아름다우시니까요!” 아나가 확신을 가지고 물었다. “예, 그렇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분이십니다.” “목소리는요? 공주님의 목소리는 어떤가요?” “제가 직접 대화를 해 본 적은 없어 잘 모르겠습니다.” 공주 전하의 방문에 들뜬 아나는 내게 이것저것을 물어 왔다. 나는 내가 들은 추문을 아나에게 말해야 할까 고민을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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