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45화
45화
외모에 관심은 없었지만, 자신이 괴물처럼 못생기지는 않았다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을 계속하던 그는 문득 이 고민이 아무 소용도 없음을 알았다. 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는가? 무의미한 고민을 이어 가는 대신, 그는 나중에 잔느가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고 매달려 온다 해도 절대로 받아 주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그래, 그 여자가 대체 무엇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니 자신의 정부가 되어 달라는 청을 거절했다 해서 가정 교사직에서 해고하는 것도 우스운 일처럼 생각되었다. 발드르는 그냥 아예 없었던 일처럼 굴기로 했다. 다만 일주일에 한 번 있던 식사 약속은 당연하게도 사라졌고, 그는 다시 혼자서 식사하는 생활로 돌아갔다.
'오히려 편하군.'
혼자가 되니 편했다. 그는 절대 외롭거나 허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 ❖ ❖
그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날까 떨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낮에는 아나와 수업을 하거나 가끔 춤 수업에 참여하고, 그 밖의 시간에는 자유롭게 지내는 단조로운 생활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계속되었다.
그러는 동안 공작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우연히 그를 마주친다거나 그가 나를 부른다거나 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에게 제안을 받은 지 두 달이 지났을 즈음, 나는 공작이 이 일로 인해 내게 어떠한 불이익도 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구나, 이대로 끝인 거구나.'
나는 그가 다시 내게 으름장을 놓으며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협박하거나 분풀이로 나를 험한 곳으로 좌천 보낼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냥 그대로 끝이었다. 그럼 다행으로 생각하면 될 일인데 이상하게 이대로 끝이라는 생각이 들자⋯⋯ 나는 가슴이 뻥 뚫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혹시 그가 내게 매달리기라도 바랐던 것일까?
'정말로 미쳤나?'
그를 마음에 품었을 때부터 제정신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내가 미쳤나 보다.'
몇 달간 공작을 보지 않다 보니 알게 된 사실이 또 있었는데, 지금까지 그와의 만남은, 우연이라 믿었던 것을 포함해서, 모두 공작의 의지였다는 것이었다.
그는 대체 언제부터 나를 마음에 품어 온 것일까? 공작에게 실망했으면서도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너무 이상했다. 하지만 나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매일 밤 혹시 그때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그가 무슨 표정을 지었을지 하는 생각을 도무지 밤마다 멈출 수가 없었다.
'좋아했을까?'
오히려 이전보다 더 많이 그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오히려 쉬운 여자 같아 일말의 호기심조차 사라졌을까?'
그렇게 봄이 갔다. 봄에는 내 생일도 그의 생일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여름이 오기 전 나는 공작이 다시 원정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을 듣자 처음으로 든 생각은 이제 그를 피해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아니라 그가 혹시 다치거나 죽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었다.
'그는 매년 이렇게 원정에 나가는 건가?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작년에는 해 본 적 없던 생각이었다.
'원정은 꼭 그가 직접 나가야 하는 건가? 그냥 군사를 대신 보내면 안 되는 건가?'
생각의 흐름이 공작의 죽음에 이른 순간 나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가 죽으면 나는? 나는 대체 어쩌면 좋지?'
그리고 그 두려움의 끝에서, 나는 그를 아직 사랑하고 있단 사실 또한 깨달았다.
'그가 죽으면 내 심장은 부서지고 말 거야.'
그렇다. 나는 내게 정부를 제안한 공작의 태도에 실망했을지언정 아직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 실망하여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고 믿는 순간에도 나는 오로지 그만 생각하고 있었다. 단지 그의 제안을 거절한 것 때문에 그가 내게 무슨 짓을 할까 두려워서 그를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저 그냥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생각한 것이었다.
'그가 회복되지 않는 상처를 입거나 죽기라도 하면?'
그가 저택을 떠나고 나자 나는 낮에도 그가 걱정되었고, 밤에도 그가 걱정되었다. 앉아 있어도, 서 있어도, 무언가를 먹거나 수업을 할 때도 그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날이 다시 많아졌다.
그러나 내겐 그를 걱정할 자격이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므로.
❖ ❖ ❖
발드르는 저택을 떠나오면서 오히려 홀가분한 감정을 느꼈다. 솔직히 그는 저택에 머무는 내내 고통스러워서 원정 날만을 기다려 왔다. 실연의 상처가 깊기도 했지만, 저택에 계속 있으면 잔느에게 묻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때가 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왜?'
날이 가면 갈수록 궁금증이 그를 옭아매어 왔다.
'잔느는 대체 왜 내 제안을 거절했을까?'
점점 더 알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잔느를 불러다 묻고 싶었다.
본토인이 은근히 경멸하는 내 핏줄 때문이오? 그대도 내가 야만인이라고 생각하시오? 아니면 내 외형이 그대 마음에 들지 않소?
혹시 이미 마음에 둔 사람이 떠나온 곳에 있는 것이오? 다른 사람을 사랑하오? 그곳의 귀족이나 왕자를? 그것도 아니라면 태생적으로 사내를 좋아하지 않소? 그게 혹시 그대가 지금까지 혼자인 이유였소?
이유를 알면 마음이라도 좀 후련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이 고칠 수 있는 문제라면, 고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자신보다 좀 더 마른 남자를 원한다거나 더 살찐 남자가 취향이라면⋯⋯.
'아니, 내가 고쳐야 하는 이유가 뭐지? 이제 와서 발밑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애원한다고 해도 받아들일 생각이 없는데.'
어느 날은 그녀에게 또 다른 것이 묻고 싶기도 했다.
그대가 거절한 자리가 진정 어떤 자리인지 알고나 있소? 의무는 적고 권한은 큰 자리요. 그대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리란 말이오. 내 제안을 수락하기만 하면 내가 그대를 위해 뭘 할 수 있는지 제대로 알고 그 제안을 거절한 것이오?
그가 가족이 되어 주겠다 말한 그 자리에서 잔느가 제안을 수락했다면, 발드르는 그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 주었을 것이다.
만약 그녀가 가세가 기울어진 제 집안을 일으켜 달라고 했다면 영지를 떼어 주어서라도 일으켜 주었을 것이고, 가족과 함께 살고 싶다면 마차를 보내어 이곳으로 데려왔을 것이다. 그러면 그녀는 더 이상 어두운 안색으로 가족을 그리워할 일도 없었을 테지.
그뿐인가. 그는 척박한 영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영지엔 풍부한 광맥이 있었다. 원하기만 한다면 여자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보석으로 치장하고 아름다운 드레스로 공작저의 방들을 채울 수도 있었다. 원하기만 한다면. 책을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가 가진 서재가 그녀의 것이 되었을 것이고, 그 밖에도 그가 가진 모든 것이 그녀의 소유가 되었을 것이다.
정말로 그때 잔느는 자신이 발로 걷어찬 것이 이런 무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그는 너무나 궁금 했는데, 그녀를 불러다 묻는 것 말고는 알 방법이 없었다.
그렇지만 묻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잔느에게 항복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사랑을 갈구하고, 애원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이제 전투가 시작되면 그 모든 해답 없는 궁금증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믿으며 발드르는 사병들과 함께 저택을 떠났다. 전장에서 정신없이 싸우다 보면 의문으로 가득하던 머리도 자연히 비워질 것이고, 그녀를 향한 마음도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오산이었다. 일단 교전이 벌어지기 시작하면 당장은 그녀를 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밤에 잠을 청하려 하면⋯⋯ 혹은 조금이라도 쉴 시간이 주어지면 당장 머릿속에 그녀 생각부터 떠올랐다. 미친 것 같았다.
'지금쯤 잔느는 무얼 하고 있을까? 책을 읽고 있을까? 내가 저택에 없어서 서재를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을 테니.
아니면, 보낼 길이 없는 편지를 쓰고 있을까? 식사를 하고 있을까? 지금쯤이면 수업 시간이겠군. 춤은 많이 늘었을까?'
발드르는 저택과 멀리 떨어진 변방에서,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자각했을 뿐이었다.
'내가 없어서 신이 나 있겠지? 이제 서재도 마음껏 이용할 수 있을 테니까⋯⋯.'
멀리 떠나오니 더더욱 궁금했고, 많이 보고 싶었고,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았나 하는 걱정도 들었다. 그녀는 오히려 두 발을 쭉 뻗고 편히 지내고 있을 텐데도.
'그래, 편하겠지. 전보다 더. 내 생각은 조금도 하고 있지 않겠지.'
걱정은 조금도 하지 않고 자신이 가능한 한 늦게 돌아오기를 바랄 텐데도 말이다. 그걸 알면서도 발드르는 마음을 쓰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