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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44화


44화 “⋯⋯.” 피가 식었다. '정부?' 도대체 내가 뭘 원했던 것일까? 공작저의 안주인 자리? 아니었다. 나는 일국의 공주도 공작가의 여식도 아니었으므로, 그와 혼인할 만한 주제가 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타들어 가는 마음을 억누르고 숨기고 진화시키려 노력한 것이었다. 그는 내가 가질 수 없는 존재였으니.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의 정부 자리를 원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내 가문에도 수치였기 때문이다. 나는 영락하긴 하였어도 엄연히 툴루즈 가문의 여식이었다. '나더러 정부가 되라고?' 정부란 남자의 욕망을 만족시키면서도 공식적으로는 ‘없는 존재'였다. 공식적인 배우자인 아내와는 달리 그 어떠한 지위도 인정되지 않고, 오직 남자의 애정에 매달려 살아남는 존재, 오로지 남자의 편리를 위해 생긴 자리였다. 나는 정부가 무엇인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잘 알았다. 바로 방타두르 공작 부인이 내 고용주셨으니까.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경쟁자와 애정을 다투고, 언제 그 애정을 잃을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아이를 낳고, 설령 아이가 영특하여 아버지의 인정을 받는다 하더라도 손가락질받아 마땅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렇군, 이 남자도 다르지 않구나.' 동시에 그 무엇으로도 끌 수 없던 불길 같은 마음 한편이 서늘하게 식어 가는 것을 느끼며 나는 그에게 말했다. “제안은 감사히 받겠습니다만, 저는 공작님의 정부가 될 생각이 없습니다.” 그 말에 그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거절할 리 없다고 예상했던 것처럼.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대가 내 사람이 되어 준다면 나는 그대에게 공작가 안주인의 지위와 연금을 약속하겠소. 그리고 그대가 원하는 것이라면⋯⋯.” “각하, 저는 이 공작가의 정부가 될 만한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나는 담백하게 그의 제의를 거절했다. “저는 아가씨의 가정 교사로 남겠습니다, 각하.” 거절하는 마당에 내 마음을 알려 보았자 구차해질 뿐이었다. 나도 당신에게 마음을 두었노라고, 그러나 나의 가문이 영락하고 내가 유배를 온 처지라 하더라도 내 가문과 나의 도덕성에 먹칠을 할 순 없다고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오히려 흥정을 한다고 오해를 살 수도 있는 행동이었다. 내 거절에 그의 표정은 낙담과 실망으로 일그러졌고, 부드럽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의 눈은 이윽고 활활 타올랐다. 거절당한 데 대한 분노로. “그대가 지금 무엇을 거절했는지 진정으로 알고 있소?” 그가 물었다. “예, 알고 있습니다.” 나는 대답했다. “그렇다면 더 설명할 필요는 없겠군.” 그의 말투는 눈보라처럼 싸늘해졌다. “후회하지 않겠소? 죄수에서 공작저의 안주인이 될 기회를 걷어차 버린 것을? 아나가 다 성장하면 어쩔 작정이오?” 그가 사나운 눈빛으로 나를 쏘아붙였다. “그대가 지금 입고 먹는 모든 것이 오로지 내 호의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잊은 것은 아니오?” 그건 명백한 협박이었다. 그 말을 듣는데 나는 두렵기보다는 한숨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나는 대체 누구를 사랑하고 있었단 말인가?' “잊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공작님의 정부가 될 이유는 되지 못합니다.”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가 내게 조부의 책을 가져다준 남자가 맞나? 차라리, 그가 정부가 되어 달라는 말을 꺼내지 않고 내게 '사랑을 받아 달라.'고만 말했더라면 나는 당장의 행운에 눈멀어 그다음은 생각해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그와의 혼인은 바라지도 않았으므로. “그렇군. 그대의 마음은 잘 알았소.” 공작은 그대로 나를 스쳐 지나갔다. 나는 그가 말을 타고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다 한참 뒤에야 브륄의 등 위에 올랐다. 하지만 방에 돌아오자 그제야 현실감이 들면서 온몸이 후들거리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스카디 공작은 내 목숨줄을 쥔 권력자였다. 그가 갑자기 수틀려 가정 교사직을 박탈하고 나를 저 변방에 요새를 쌓으라 보내거나 지하 감옥에 보내도 내가 찍소리나 할 수 있을까? 이곳에서 나의 목숨은 새나 쥐, 파리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사람대우를 좀 해 주었기로서니 정부가 되라는 제안을 거절해?' 만약, 그가 이곳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같은 제안을 했다면 나는 과연 오늘같이 차갑게 거절할 수 있었을까?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모멸감으로 물든 그의 표정을 떠올리자 온몸이 차게 식는 듯했다. '간이 배 밖으로 나와도 정도가 있지.' 그러고 보니 오늘이 때마침 그와의 만찬 날이었지만, 당연하게도 그 시간에 나를 찾으러 하녀는 오지 않았다.     몇 주간, 나는 떨면서 그의 처분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날의 일이 꿈이기라도 했던 것처럼 정말 아무런 일도. '그에게 그건⋯⋯ 그냥 해 본 제안인 건가?' 하기야 곰곰이 떠올려 보면 내게 사랑한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게 정부가 되라고 했을 뿐. '그냥 찔러봤던 건가? 내가 이곳에 있는⋯⋯ 비교적 말이 통하는 여자이니까?' 만약 그가 사랑한다고 말했다면 뭔가가 달라졌을까, 생각하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은 생각하지 말자.' 어쩌면 별일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냥 궁정의 다른 남자들과 같이, 한번 찔러본 뒤 아니면 말고 식이었는지도. 이후 내게 생긴 변화는 일주일에 한 번 있던 그와의 만찬 시간이 사라지고, 대신 다시 여느 다른 날과 같이 하녀가 방으로 식사를 들고 오게 되었다는 것뿐이었다. ❖ ❖ ❖ 제안을 거절당한 뒤, 발드르 드 스카디는 전혀 괜찮지 않았다. 애초에 그는 잔느가 제안을 거절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자신의 제안에는⋯⋯ 이득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렇게 싫었나? 그 이득을 다 거절할 정도로?' 몰락한 집안 출신의 유배자에게 달리 더 좋은 제안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녀는 거절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에게 남자로서의 매력을 느껴 본 적 없다는 듯이. 잔느는 그의 정부가 되기보다는 가정 교사로 남기를 택했고, 발드르는 이제껏 느껴 보지 못한 끔찍한 모멸감에 사로잡혔다. '내가 누구인지 알면서?' 잔느는 공작령에 유배 온 처지였고 자신은 바로 그 공작령의 주인이었다. 그는 말 한마디로 그녀를 가장 끔찍한 곳으로 보낼 수도 있었고, 그녀의 허락 따위를 받지 않고도 손쉽게 그녀를 취할 수도 있었다. 당장 잔느를 침실에 가두고 꿈에서 나온 짓을 모두 저지른다 해도 그를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실제로 거절당한 뒤 잠시 그는 어두운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럼 그녀도 알게 되겠지. 내가 한 말이 권유가 아니라 명령이란 것을.' 하지만 광증에 가까운 충동을 발드르가 간신히 참아 낸 이유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 억지로 곁에 둔 자의 말로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아버지, 전대 스카디 공작이었다. '나는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는 않아.' 발드르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억지로라도 그녀를 품에 안게 되면 더 원하게 될 것임을. 원하는 건 그녀의 몸뿐이 아니게 될 것임을. 그래서 발드르는 별 볼 일 없는 여자라고 잔느를 애써 평가 절하했다. '그러니까 날 원하지 않는 여자는 나도 필요 없어.' 가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가지지 않는 것이라고.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거지. 자기 주제도 모르는 멍청한 여자는 나도 원하지 않아.' 다시 생각해 봐도 당혹스러웠다. 이 세상에 비공식적으로라도 공작가의 안주인이 될 기회를 걷어찰 만큼 멍청한 여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심지어 잔느는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유배자였다. 그녀가 만약 발드르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만 했다면 그토록 바라던 서신이야 언제든 주고받을 수 있었을 것이고, 그 그립다는 가족을 이곳으로 초청해 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원하기만 한다면 이곳에 유배 온 처지인 것을 잊을 정도로 호화스럽고 편하게 생활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혹시 이 점도 말해야 했을까?'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발드르는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잔느가 정말 바보 천치도 아니고 그 정도도 몰랐을리 없었다. 하지만 그러자 또다시 의문만이 남았다. 그럼 왜 자신의 제안을 거절한 건지, 그 이득을 다 물리칠 만한 이유가 대체 뭐였는지. '내가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그렇지. 설마 내가⋯⋯ 그 정도로 끔찍하단 말인가? 고민해 볼 여지도 없을 정도로? 대체 왜? 내가 그 정도로 못났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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