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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38화


38화 영영 끊겼다고 생각한 이전의 삶과 아직은 연결되어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 준 것이다. 편지를 받은 날부터 나는 늘 그것들을 지니고 다니며 틈만 나면 다시 읽었다. '보고 싶다.' 편지를 읽다 보면 그들의 그리운 음성이 떠오르면서 가슴이 저려 왔다. 다시 또 편지를 보낼 날이 있을까? 어쩌면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든 한 번은 어려워도 두 번은 쉬운 법이니까. 나는 답장을 쓰는 일에 착수했다. 그러는 사이 만찬 날이 돌아왔다. 내게 말도 해 주지 않고 춤을 배우게 했다는 분노는 잊히고 편지를 보내 주고 또 답장까지 가져와 주신 데 대한 감사함은 남아 있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식사 시간이 되어, 나는 진심으로 공작님께 감사함을 전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공작 각하, 덕분에 제 가족의 걱정을 덜고 또 답장까지 받을 수 있었습니다! 공작님의 자비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나는 진심으로 고마웠다. 내가 이런 처지가 아니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하려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감사를 표하는 것 말곤 아무것도 없었다. “좋아해서 다행이오.” 스카디 공작은 내 감사에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곤 술을 마셨다. 그만한 감사를 받을 정도는 아니라는 투였다. 하긴 그야 그럴 것이다. 나에겐 큰일이지만 그한텐 기르는 개에게 빵 부스러기를 떼어 주는 정도의 하찮은 일이었을 테니까. 애초에, 내 편지를 전달해 준 일조차 잊고 있었을지 모르지. 알면서도 나는 계속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므로. “감사는 이만 듣겠소. 무안할 지경이군. 다른 이야기를 해 봅시다. 춤 수업은 어땠소?” “아! 예!” 맞다, 이 자리는 감사를 표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 아나의 수업 성과를 말하는 자리였다. “아나 아가씨는 한 마리 나비 같으셨습니다! 춤에 재능이 있으시더군요! 처음 배우는 춤도 정말 빠르게 학습하셨고 금방 체화하셨습니다. 또 춤을 추는 걸 얼마나 즐거워하시던지! 진작 배우게 할 것을 후회할 정도였습니다.” “그대는 어떻소?” “예?” “그대도 함께 수업을 듣지 않았소? 그대에게는? 수업이 잘 맞았소? 재미있었고?” 그 말에 내 두 입술은 딱 달라붙었다. “저는⋯⋯ 음, 아나 아가씨의 파트너 역할을 할 수 있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파트너?” “예, 모든 왕실 무용은 모든 춤이 이인무이니까요.” “그대가 아나의 파트너 역할을 하오?” “예, 아가씨 또한 그렇습니다. 서로의 역할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하여 번갈아서.” “그렇군. 그럼 재미는?” “재미요? 하하⋯⋯.” 없다, 그런 거. 나는 웃으며 얼버무리려다 진지한 그의 표정을 보고 말을 이었다. “배워 보니⋯⋯ 저는 춤에는 재능이 없더군요. 차라리 잘되었지요. 춤이 재미있고 재능도 있었다면 많이 아쉬웠을 테니까요.” “무엇이?” “집안이 영세해져 무도회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을 잃은 것이 아쉬웠겠지요. 이 수업이 아니라면 앞으로 제가 춤출 일이 있겠습니까? 먹지 못할 위치에 열린 열매가 맛없다는 것을 뒤늦게라도 알아 다행입니다. 하하.” 나는 웃었지만 그는 웃지 않았다. 그는 내 말에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 않소?” “예?” “이 세상에 먹지 못할 열매가 뭐가 있겠소. 독이 든 게 아니라면야⋯⋯ 높은 곳에 열린 열매라면 사다리를 놓아 따면 되지 않소?” '음? 사다리?' 여기서 갑자기 사다리가 왜 나오는 걸까? 나는 무슨 뜻인지 몰라 마른침만 삼켰다. “벌써부터 재능이 없다 단정할 필요는 없소. 수업을 시작한 지 한 주밖에 되지 않았잖소? 몸에 익으면 서서히 재미도 찾아올 것이오. 나도 처음에는 검술을 왜 배워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소.” “⋯⋯.” “나는 둘째고 전장에 나갈 자는 형이었으니. 그때는 검술을 배워야 할 이유가 없다고 느꼈지. 그러나 배우다 보니 서서히 즐거움이 찾아왔소. 그대도 그렇게 될지 모르오.” 잘 모르겠지만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다시금 술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그런데, 그대에게 온 서신 중에는 마엘 공자의 것도 있더군.” 그리고 다시 화제는 편지로 돌아왔다. “내 메신저가 왕궁에 들렀을 때 그가 편지를 꼭 그대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했소. 이 편지가 오직 그대에게만 닿기를 당부하며 말이오.” “그랬습니까.” “그러나 나는 읽어 보지 않을 수 없었소. 그대를 관리하는 입장으로서.” “예, 알고 있습니다.” 어차피 모든 봉인이 뜯긴 상태여서 알고 있었다. 가는 서신도 읽었으니, 오는 서신도 당연히 그의 손을 거쳐 갔으리라는 것을. “그대가 이곳에 왔을 때도 호송관이 그대를 부탁하는 마엘 공자의 서신을 전해 줬었지. 그는 그대의 신변을 내게 부탁했소. 그대를 잘 부탁한다고 아주 신신당부하더군.” 그리고 공작은 다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며 말을 멈췄다. “묻고 싶은 게 있소. 가능한 한 솔직하게 답해 주길 바라오.” “예.” “그대와⋯⋯ 그는 무슨 관계요?” 무슨 관계냐니? 그 말에 나는 의아해하다가, 이내 공작이 무슨 오해를 하는지 알아차렸다. “저는 마엘 도련님을 열세 살 때부터 보아 왔고 저와 도련님은 열 살이 넘게 차이가 납니다. 그분께서 제게 품는 애정은 아마 손위 누이에게 품는 애정과 비슷할 것입니다. 아가씨께서 저를 언니처럼 따르듯 말입니다.” 그리고 자신 때문에 죄 없는 가정 교사가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유배당했다는 죄책감도 있을 터였고 말이다. 도련님은 다정하고 심성이 무척 고우신 분이니까. “⋯⋯.” 그는 말없이 내 말의 진의를 파악하듯 내 얼굴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그대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군, 마엘 공자가 그대를 누이처럼 생각한다고.” 그랬다. “하지만 그와 아나는 여러 면에서 성질이 다르오. 아나의 겉과 속은 얼음처럼 투명하지. 아나는 모든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오. 그것은 아나가 특별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와도 되었기 때문이오. 그러나 그는 궁정에서 태어나 왕의 아들로 자랐소. 그것도 왕비 소생이 아니라 정부의 소생으로.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아시오?” “⋯⋯.”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나는 출입은 거의 하지 않지만 궁정에 대해선 아는 바가 있소. 그곳은 웃음이 끊이지 않지만 본질적으로 전장이오. 피아가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에선 어쩌면 더 악질이지. 그대의 학생은 그런 곳에 살면서 가장 먼저 진심을 드러 내지 않는 법을 배웠을 거요. 그것이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는 걸 알았을 테니 말이오.” 그의 초록 눈이 나를 거울처럼 들여다보았다. “그런 그가 유배당한 그대를 이름만 알 뿐인 내게 부탁하고, 혹시나 가로채질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편지를 써서 보냈소. 그대는 더 이상 자신의 가정 교사가 아닌데도. 내 말을 다 듣고도 그대의 학생이 그대에게 감정을 드러내는 이유가, 단순히 그대를 손위 누이처럼 여기기 때문이라 생각하시오?” 다 듣고 보니 그 말은 즉, 마엘 도련님이 내게 더 크고 특별한 감정을 품었기에 내게 편지를 보낸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었다. “외람되오나 공작님께서는 정말 큰 오해를 하고 계십니다.” 나는 그의 오해에 눈앞이 다 아찔할 지경이었다. “도련님을 직접 보고 대화를 나눈 적도 없지 않으십니까? 공작님의 말씀대로 궁정은 무서운 곳입니다. 그런 곳이기에 어쩌면 도련님은 제게 좀 더 마음을 열고 다른 사람보다는 조금 더 특별하게 대하셨을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그건 제가 궁정에 출입하되 완벽한 그곳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마엘 도련님과 열 살이나 넘게 차이가 납니다.” “그런가, 그대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그는 한발 물러서면서도 내게 확언을 요구했다. “그대와 그의 사이는 가정 교사와 학생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어쩌면 분노 때문에 말소리가 커졌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하늘에 맹세코 나는 떳떳했다. 내가 단언하자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미안하오,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 그대가 마엘 공자의 숨겨진 애인이라도 된다면 많은 것이 달라지기에 물은 것이 오. 나는 어느 주요 정치 세력에도 속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 왔소. 공작령을 다스리고 보호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벅차기 때문이지. 그런데 내가 만약 유배형을 받은 귀족이 아니라 정부 소생의 애인을 공작저에 보호하고 있다면 사람들이 나를 어찌 생각하겠소? 내가 그의 편을 들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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