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29화
29화
만약 어머니가 단 한 번이라도 자신을 있는 힘껏 끌어안아 준 적이 있었다면 슬펐을까? 모를 일이다.
발드르가 놀랄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언제나 냉정하고 냉철하던 아버지가 빈껍데기나 마찬가지인 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죽을 때까지 반송장처럼 보냈다. 그제야 그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여자가 자신을 증오하다 못해 벗어나기 위해 죽어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랑했다고? 그 여자를?'
아버지의 변화에 발드르가 느낀 건 끔찍하단 감정뿐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이성에 대해 잘 모를 나이의 그가 보아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다니?
'미친 게 아닌가?'
그것이 발드르 드 스카디가 일찍이 이성에 대해 경계하게 된 이유였다. 그는 절대로 아버지와 같은 덫을 밟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 생각은 어머니를 잃고 급격히 노쇠해져 버린 아버지를 대신해 작위에 올라야 할 형 윌드스카디가 하녀와 함께 사랑의 도피를 하며 굳어졌다.
원래도 어머니를 닮아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형이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럴 줄은 몰랐다. 이렇게까지 방종하리라곤⋯⋯. 친구이자 아버지 같기도 했던 형이, 신분 낮은 귀족도 아니고 일개 하녀와 결혼시켜 주지 않는다 하자 줄행랑을 놓아 버리다니.
'고작 언젠가 사라져 버릴 감정 때문에?'
하녀를 사랑한다면 애인으로 두면 되는 일 아닌가? 믿기지 않는 일에 공작저가 당혹감에 휩싸였던 지난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죽은 사람처럼 지내던 아버지는 오랜만에 생기를 찾고 길길이 날뛰었다. 잠시 ‘얼음 같던 아버지께 필요한 것은 불같은 분노였던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버지는 아들의 추문을 덮기 위해, 대외적으로 아들을 야만족과의 전투에서 죽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인 발드르를 공작 대리로 올리고 칩거에 들어갔다.
이후 이 미쳐 버린 공작저에서 그만이 홀로 이성을 유지했다. 매년 전투가 끊이지 않는 지역에서,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아버지를 대신해 그는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해 나갔다. 내심 속으로는 언젠가 형이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함께 달아난 여자를 버리고 말이다.
'그러면 원래 자리로 물러나야겠지.'
그는 작위에 딱히 미련이 없었다. 그저 가문에 지워진 책임이 있으니, 의무를 다할 뿐.
그러나 형은 돌아오지 않았고 순식간에 12년이 흘렀다. 아버지는 죽었고, 그는 공작 대리에서 공작이 되었다. 원래는 형의 것이었어야 할 작위였다. 그가 정식으로 공작이 되자 여러 나라에서 혼담이 들어왔는데, 그중 가장 무시할 수 없는 혼담은 그의 군주이기도 한 국왕이 보내오는 혼담이었다.
[저는 국왕 폐하의 충성스러운 신하이지만 저희 민족은 예로부터 근친혼을 금해 오고 있습니다.]
그는 빈약한 이유를 들어 거부했다. 그러자 분노한 국왕은 그의 격에 어울릴 만한 여인들과의 혼담을 훼방 놓았다. 공주와 혼인할 것이 아니라면 영원히 혼자 살게 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발드르로서는 오히려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내심 이제라도 형이 돌아와 주길 바랐다. 이 무거운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그러던 어느 날 발드르는 약탈로 쑥대밭이 된 해안가 마을에서 형과 하녀로 추측되는 시신을 발견했다. 둘은 무척이나 남루한 옷을 입고 있었다. 행색을 보아하니 평범한 주민으로 위장하여 이 마을에 정착한 듯싶었다. 그냥 닮은 사람인가 하고 아무리 살펴보아도 분명 형이었고, 형과 함께 도망친 하녀였다. 두 시신은 마치 보물을 지키듯이 가옥의 문밖에 사이좋게 엎어져 있었다.
'무엇을 지키기 위해 집 안이 아니라 밖에서 죽었지?'
발드르는 홀린 듯이 그 집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깨진 집기며 불에 그슬린 벽, 이곳에 귀중한 것이 있으리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공작저에서 보석을 훔쳐 달아났다 하더라도 10년 이상이 흘렀다. 도피할 때 손안에 쥐었던 것은 모두 사라졌을 시간이었다. 그러나 발드르는 집 안을 뒤졌다. 그가 앞으로 찾게 될 것에 대한 불가사의할 만큼의 확신을 갖고.
그리고 찾은 것은, 더러워진 옥수수 껍질 깔개 밑 지하로 이어지는 지하 창고의 문이었다. 깔개를 들추고 문을 열자 눈물범벅이 된 꼬질꼬질한 여자아이 하나가 나왔다.
'아빠⋯⋯?'
보기만 해도 형의 자식임을 알 수 있는 어린애 하나. 그는 실망했다. 아주 심하게.
'목숨을 걸어 가며 지킨 게⋯⋯ 고작 이것인가?'
형은 스카디 공작 작위에 오를 후계자였다. 검술 선생을 두고 어릴 때부터 수련을 받은 형이다. 만약 형이 홀몸이었더라면 분명 어중이떠중이인 해적 손에 죽진 않았으리라. 그런데 아버지는 정략혼에 실패하고, 사랑을 위해 작위를 버린 형은 아내와 함께 야만족들의 손에 죽고, 남은 것은 이 아이 하나였다.
'공작저를 떠난 결과가 겨우 이거?'
형은 스카디 공작이 될 수도 있었다. 아니, 가만히만 있었다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하녀를 애첩 삼았으면 지금 눈앞의 아이는 사생아이긴 하나 남부러울 것 없이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녀와 결혼 한 번 하겠다고, 장군으로서 싸우고 전사한 것도 아니고 신분을 숨기며 살다 딸 하나 지키겠다고 칼을 맞아 죽어?'
발드르는 형의 마지막이 너무 허탈해서 한숨도 나오지 않았다.
'형이 마지막에 이리될 줄 알았어도 그 여자와 떠났을까?'
글쎄, 그러나 형이 목숨을 걸어 가며 남긴 유산을 외면하는 것은 동생으로서의 도리가 아니었다. 그럼 형이 정말 개죽음을 당한 셈이지 않은가. 발드르는 형을 그곳에 묻어 주고 아이를 데려왔다.
아이의 이름은 아나였다. 그는 아나를 양녀 삼고 죽은 형의 자식이라 대외에 공표했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형은 이미 10여 년 전에 죽은 사람인데 그때도 아니고 이제 와 왜 아이를 양녀 삼는단 말인가? 사람들은 다들 아나를 발드르가 숨겨 놓은 자식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아나조차도 어리둥절해했다.
'형은 정말 이 아이를 시골 여염집 아이로 키울 생각을 했던 건가?'
그만큼이나 아나는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었고, 자신을 사냥꾼과 평범한 아낙네 사이에서 난 딸인 줄 알고 있었다.
'누군가 네게 이 저택에 오기 전 일을 물어보거든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라.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고.'
발드르는 아나를 공작가의 아가씨로 키울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그게 사실이니까.
그런데 평생을 시골 아이로 자라 온 여자아이를 어떻게 귀족 아가씨로 만들겠는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다른 귀족 아가씨 출신의 가정 교사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잔느 드 툴루즈의 등장은 참으로 시의적절했다.
그는 잔느에게 학식 외에 기대하는 것이 없었고 거만하고 차가운 존재일 것이라 지레짐작했다. 그러나 잔느는 늘 그의 예상을 빗나갔다. 예상보다 허술했고 덜 거만했으며 무엇보다도, 아나를 사랑했다. 아주 쉽고 빠르게.
발드르는 처음에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아나와 자신 모두를 속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잔느는 정말로 아나를 사랑했고, 아나 또한 잔느를 사랑했다. 잔느는 마치 아나가 자신의 동생이라도 되는 것처럼 애정을 퍼부었다. 그는 저택 안에서, 저택 밖으로 나온 여자가 아나의 머리를 땋아 주거나 화관을 만들어 주거나 수업 시간이 아닐 때도 같이 손을 잡고 멀리 산책을 나가는 광경을 종종 보았다.
발드르는 자신을 가르쳤던 가정 교사들에게 한 번도 그와 같은 애정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아나의 애정을 얻기 위해 사랑하는 척하는 거겠지. 그런 그의 편견이 깨진 것은, 잔느가 아나를 구하고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였다.
그날, 발드르는 홑겹 차림의 가정 교사가 외투를 껴입은 아나를 끌어안고 기절하기 전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것을 목격했다.
발드르는 사람이 죽는 것을 정말 많이 보았다. 어머니, 아버지 그 밖에도 영혼이 떠나간 시신들을 보아 온 숫자를 감히 셀 수 없었다. 전장을 경험하면서 발드르는 그 모든 죽음에 무뎌졌다고 생각했다. 그는 피아를 알 수 없이 뒤엉켜 누운 시신들을 보면서도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잠도 잘 수 있었다. 심지어 형의 시신을 묻어 주었을 때조차 자신은 의연했다⋯⋯고 스스로 믿었다.
하지만 그녀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쓰러졌을 때, 발드르는 그 광경을 보고 뒤흔들렸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당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