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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20화


20화 '허⋯⋯.'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풍만해졌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궁정의 모든 부인들 은 방타두르 부인의 몸을 조롱하고 모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를 닮으려 애썼다. 억지로 먹고 움직임을 극단적으로 제한하는 것이 궁정 귀부인들의 유행이었다. 하지만 내가 국왕 폐하의 정부가 될 것도 아니고, 되고 싶은 것도 아니다. 더군다나 이렇게 살이 찌면 문제가 생긴다. '이러면 옷을 다 못 입겠는데.' 장만한 겨울 드레스를 다 새로 사야 한다는 문제가. 궁에서도 나는 다섯 벌의 옷을 돌려 입었다. 그것도 입궁할 때 큰마음 먹고 산 것이다. 옷은 재봉사와 재단사로부터 만들어지는 아주 비싼 제품이었고, 나는 궁정 여인들처럼 유행이 바뀔 때마다 물 쓰듯 돈을 써 드레스를 바꿀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나는 이미 이곳에서 옷에 많은 돈을 썼다. 이곳은 계절마다 날씨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체형이 바뀌었다고 또 옷을 새로 사 입어? 그럴 수는 없었다. '빼야 해.' 나는 살집이 군데군데 잡히는 몸을 주물럭거리며 결심했다. '빼는 수밖에 없어.' 살을 빼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간단했다. 살이 찌는 방법을 반대로 하는 것이다. 덜 먹고 움직여야 했다. ❖ ❖ ❖ 스카디령의 겨울은 길고 춥고 어둡고 무료한 계절이었다. 스노 스콜이 시작되면 성 안에서 농성하듯 문을 닫아걸고 눈보라가 가실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일이 겨울 내내 반복되었기 때문에 다들 본인 나름의 겨울 나는 법을 갖고 있었다. 하녀들의 경우 난롯가에 앉아 이불감과 침대보, 겨울철 겉옷을 만들며 수다를 떨었고, 하인들의 경우는 농기구를 손질했으며, 병사들은 오랜만에 막사 안에서 한가로운 휴식을 취하며 여름의 전투를 준비했다. 스카디 공작가가 저택에 왕궁 부럽지 않은 충실한 서재를 갖추고 있는 것도, 발드르가 무장이면서도 인문학자 수준의 교양과 지식을 갖춘 것도 마찬가지였다. 바로 매서운 눈보라가 치면 책을 읽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는 혹독한 겨울 때문이었다. 겨울이 오자 발드르는 서재에서 책을 골라 그의 집무실 벽난로에 앉아 읽는 시간을 가졌다. 사실 그는 겨울을 가장 좋아했다. 그의 집무실은 따뜻하고 아늑했고, 창밖의 눈보라가 으르렁거리며 유리창을 긁어도 감히 그 안으로는 침입하지 못했다. 그런데 폭설이 멎고 오랜만에 흐릿하게나마 해가 뜬 어느 날이었다. 눈은 멎었다 해도 사람 무릎쯤 쌓인 눈은 아직 녹지 않았고, 바람이 땅을 긁어 땅 날림 눈이 몰아치고 있었다. 앞뜰은 통행을 위해 대충 눈을 치워 놓았으나 결코 산책을 할 날씨는 아니었다. 코, 귀, 손가락, 발가락을 잃고 싶거나 폐병에 걸리고 싶어 정신이 나간 멍청이가 아니고서야 말이다. 그리고 공작은 한가로이 책을 읽다 그 정신이 나간 멍청이를 보게 되었다. 발드르는 잠시 시선을 창밖으로 던졌다가 책을 탁자에 내려놓고 두 눈을 비볐다. '저게 뭐지? 곰인가?' 처음엔 곰인 줄 알았다. 먹을 것이 없어 숲에서 나온 곰이 앞뜰까지 들어온 것인가 싶었다. 그렇다면 가솔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곰을 쫓아내야 했다. 그런데 확인하기 위해 창가로 가까이 다가갔더니. '설마⋯⋯?' 몰아치는 땅 날림 눈을 헤치고 앞뜰에서 꾸물거리며 움직이고 있던 것은 흑곰이 아니라 곰 가죽 털모자와 외투를 입은⋯⋯ 가정 교사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과 코를 얼어붙은 유리창에 붙이고 밖을 내다보았다. '미친 건가?' 보고 있는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저 여자, 뭐 하고 있는 거야?' 가정 교사는 장장 30여 분 동안 앞뜰을 빙빙 도는 기행을 하고 사라졌다. 예상을 심하게 뛰어넘는 기행이라 그는 말릴 생각도 하지 못했다. 가정 교사가 떠나고 나서도 그는 그녀가 뭘 하고 간 건지 알지 못했다. '정말 미친 거야?' 그저 미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 ❖ ❖ 흑곰 가죽은 정말 마법이 걸린 물건이었다. 세찬 바람이 얼어붙은 눈을 긁어모아 채찍처럼 얼굴을 후려치고 추위에 뺨도 눈도 코도 따갑고 얼얼하긴 했지만, 모자를 귀까지 눌러 덮고 외투에 털 신발까지 신자 놀랍게도 가죽에 덮인 부분은 춥지 않았다. 비록 가죽에 덮이지 않은 신체 부위에서 감각이 사라지긴 했으나, 오랜만에 마신 신선한 공기와 바깥에 나는 흥분했다. '살 것 같다!' 외투가 무겁고 땅이 군데군데 얼어 있는지라 뜀걸음은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걸을 만은 했다. 나는 여력이 되는 만큼 앞뜰을 빙빙 돌았다. 팔다리를 휘적거리며 걷자 옥죄었던 몸이 풀리고 무기력함이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휴! 내일도 또 해야지!' 저택에 들어가기 전 나는 외투와 신발에 묻은 눈을 탈탈 털었다. 산책을 끝마치고 나니 미칠 것 같은 추위가 몰려오고 이가 딱딱 부딪힐 정도로 온몸이 떨렸다. 그래도 만족스러운 외출이었다. 방 안에 들어가 젖은 외투와 신발을 브러시로 손질한 뒤 제자리에서 뛰며 얼은 몸과 곱은 손을 녹이고 있는데, 누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문을 열자 아이가 목욕물 받는 데 쓰이는 커다란 물통을 들고 서 있었다. 물통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는데 목욕할 시간은 아니었다. “무슨 일이니?” 얼른 물통을 받으며 묻는데 아이가 말했다. “공작 각하께서 따뜻한 물로 목욕하고 곧장 집무실로 오라 하십니다.” “공작⋯⋯ 각하께서? 나보고 목욕을?” “예!” 춥지도 않은데 목욕이란 단어에 등골에 오싹 소름이 흘렀다. “이 시간에⋯⋯ 나더러 목욕을 하고⋯⋯ 오라고?” 그게 무슨 무서운 말이란 말인가? “나를 급히 뵙자 하신다고?” 나는 노처녀긴 했지만 세상 물정도 모르는 무지렁이는 아니었다. 하녀 아이도 내 표정을 보고 내가 하는 생각을 어렴풋이 눈치챘는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만약 내가 생각하는 그 상황이면 어떻게 하면 좋지?' 따뜻한 목욕물에 얼었던 몸이 사르르 풀렸지만 반대로 심장은 얼어붙었다. 나는 목욕물에 잠겨서도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목욕을 하며 가능한 한 오래 시간을 끌었지만 만약 예상이 맞다면 시간을 끈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앞으로의 일이 두려운 동시에 나는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마치 그에 대해 무슨 대단한 기대라도 품고 있었던 것처럼. 어쩌면 공작이 내게 친절하지 않아서 마음속 한구석으로 오히려 안심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나를 이성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더군다나 발드르 드 스카디 공작은 미혼이었다. 결혼해 아이를 여럿 거느렸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에, 심지어 형의 양녀를 입적시키기까지 하는 행보를 보였다. '하지만 그자도 그저 그런 사내였구나.' 가슴 속에서 뭔가 파삭하고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싫다, 하지만 토끼가 싫다고 해서 늑대에게 잡아먹히지 않을 수 있을까?' ⋯⋯그가 만약 단순한 고용주였다면 당장 이곳을 떠났을 것이다. 그러나 발드르 드스카디 공작은 나의 보수 주인이었고, 나는 발이 묶인 죄수였다. 도망칠 수 없다 면⋯⋯ 어쩌면 눈 딱 감고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지도 몰랐다. 며칠은 눈물로 베개를 적시게 되겠지만 말이다. 목욕을 마친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 같은 기분을 느끼며 집무실로 향했다. “미쳤소?” 그리고 마주한 것은 성난 얼굴의 공작 각하였다. “미친 거요?” “예?” “미친 거냔 말이오. 오늘 그대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아오?” 그가 화난 얼굴로 짐승이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내게 화를 내는 상대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스카디 공작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태도에 나는 심장이 멎을 것 같은 동시에 오늘 했던 일이 머릿속에서 새하얗게 사라져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가 뭘 했더라?' 공포에 얼어붙어 있자 그가 초록색 눈을 번뜩이며 내게 다가왔다. 그가 바싹 다가붙자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올 것이 왔구나!' “손 내밀어 보시오.” 그리고 그가 말했다. “예?” “귀가 먹기라도 했소?” 그 말에 나는 조심스럽게 두 손을 내밀었다. 그는 나를 한번 흘긋 쳐다보더니 내 두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덮듯이 모아 쥐었다. 그의 손이 너무 크고 두꺼워서 내 손은 마치 곰의 앞발에 잡힌 생쥐 손 같았다. 나는 벌이 날개를 떨듯 전율했다. '드디어!' 드디어 뭔가 일어나는구나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공작은 고개까지 숙여 가며 내 두손을 요리조리 살펴보고는 다시 손을 놓았다. “운이 좋은 줄 아시오! 그대는 이곳 사람이 아니라 잘 모르겠지만 이런 날씨에 피부를 내놓으면 동상에 걸리라고 비는 것과 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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