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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19화


19화 그래서 사냥에도 엄격한 절차와 순서가 정해져 있었다. 짐승이 몰려오면 처음엔 공작이, 그다음은 서열순으로 영주들이 돌아가며 각기 세 마리씩 짐승을 사냥하는 것이었다. 점차로 몰려오는 사냥감 중에 가장 두각을 드러내는 것은 단연 곰이었다. 겨울잠을 대비해 기름진 먹이로 살이 오른 흑곰은 덩치가 다른 곰의 서너 배는 되어 보였다. 개와 몰이꾼들의 나팔 소리에 놀란 곰이 산을 타고 영주들에게로 달려들었을 때, 발드르가 생각한 것은 저 털결이 자르르하고 포근해 보이는 모피로 외투를 만들면 어떨까 하는 것이었다. 누구의 외투인가 하면 그 여자의 외투였다. '그 옷으론 얼어 죽고 말지. 이곳의 겨울은 춥다고 몇 번이나 경고했는데,' 여자는 스카디령의 여름과 가을만 경험했을 뿐, 겨울에 대해선 몰랐다. 체감해 보지 않은 것을 알려 주려 해 본들 피부에 와닿을 리 없다. 그러니 비가 올지도 모르는데 나무 아래서 얇은 옷차림으로 잠이 들고 그 희고 부드러워 보이는 두 다리를 훤히 드러내고 사과를 줍지 않겠는가? 발드르가 보기에 잔느는 너무도 무방비했다. 그는 가정 교사가 걱정스러웠다. “공작 각하, 뒤로 물러서십시오! 궁병들이 먼저 힘을 빼 놓겠습니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곰은 지척까지 달려들고 있었고 병사들이 그의 앞을 막아서려 들었다. 그러나 발드르는 그렇게 하지 않고 대신 말에 탄 채로 석궁을 들어 곰의 아가리를 노렸다. 석궁이 곰의 아가리에 박히고 곰은 몸부림치며 산의 능선에서 굴러 내려갔다. 그는 곁의 병사에게서 창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곰의 모피가 상하지 않게 조심하며 가까이 다가가 이번엔 곰의 눈에 재차 창을 박아 넣었다. 그다음 몰이꾼이 몰아온 사냥감 중 발드르가 선택한 것은 회색 늑대였다. 사냥은 사흘간 이어졌고, 각기 귀족 가문의 깃발 아래 사냥감이 산처럼 쌓였다. 민가에서 차출된 백성들은 영주들이 사냥한 사냥감을 즉시 고기와 가죽으로 분리하고 고기와 가죽에 충분히 소금을 뿌려 염장했다. 그런 고기 중 일부는 민가에, 또 일부는 군사들에게 분배되었다. 그리고 대량으로 생산된 값비싼 가죽들은 영주들이 전리품으로 가졌다. 발드르는 가죽 절반을 영주들에게 분배해 주었지만 가장 좋은 가죽은 그녀의 몫으로 남겨 두었다. ❖ ❖ ❖ 곰 외투는 신비한 물건이었다. 입는다고 해서 곰 같은 힘이 생기지는 않았지만 걸치기만 해도 콧잔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정도로 더웠다. '이렇게 더운 옷을 입는다고?' 여름은 선선하고 겨울은 건조하다. 이것이 이제까지 내가 생각하는 계절이었다. 그런데 가죽옷을 입을 정도로 추운 계절이 온다고? 눈이라는 것이 바깥출입을 하지 못 할 정도로 많이 내린다고? '눈이 오는데 왜 밖에 나가질 못하지? 어차피 해가 뜨면 다 녹지 않나?' 들어도 전혀 와닿지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곧 알게 되었다. 이곳에서 겨울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첫눈이 내린 뒤 약 한 달여 뒤, 내가 잠든 새 엄청난 양의 눈이 내렸다. '추워!' 잠에서 깨 눈을 뜨는데 코와 귀가 시려 죽을 것 같았다. 자는 동안 벽난로의 불이 꺼져 있었던 것이다. 부지깽이로 불씨를 살려 보려 했지만 난로를 아무리 뒤적거려도 재밖에 날리지 않았다. 나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숨을 내쉬자 입 밖으론 하얀 김이 퍼져 나왔다. 창밖으로 가까이 가자 바람이 윙윙거리는 소리가 저 밖에서 들려왔다. 살벌한 소리였다. 밖을 내다보자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들어 다른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름답긴 하지만 뭔가 무서운 광경이었다. 벽난로의 불씨를 살리는 데 실패한 나는 몸을 녹이기 위해 한참이나 제자리에서 발을 구르고 양손으로 팔뚝을 비벼야 했다. 그때였다. 얼마 전 손에 들어온 외투가 생각난 것은. 곧장 외투를 두르자 그 추위가 그나마 가셨다. 그나마! 나는 외투의 소매에 차가운 코를 묻었다. 하녀 아이가 평소보다 뜨거운 세숫물을 들고 들어올 때까지 나는 그대로 있었다. 물을 길어 오는 파이프가 얼었기 때문에 세숫물은 눈을 녹여 쓴 것이라고 아이는 말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어둡니? 아직 해가 안 뜬 거니?” “해도 내리는 눈에 가려졌을뿐더러, 창문도 다 막았으니까요.” “창문을 막아? 왜?” 아이는 오히려 이상한 질문을 받은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야 바람이 들어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지요.” 밖으로 나가 보니 과연 창마다 두툼한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고, 벽 등잔이 은은하게 빛을 밝히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택 안은 추웠다. 나는 새로 주문한 겨울옷에 외투를 껴입고 공부방으로 가 보았다. 그곳의 벽난로의 불은 따스하고 숯불 화로까지 설치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춥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선생님, 좋은 아침이에요.” 아나는 미리 와 벽난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 또한 한 마리 곰 같은 차림이었는 데, 나를 보자 반가운 얼굴로 하얀 입김을 뿜으며 인사했다. 이 추위가 그리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너무 춥지 않나요, 아나?” 나는 이제 아나 아가씨를 아나라고 불렀다. “이제 첫 스노 스콜인데요, 선생님.” “스노 스콜이라니요?” 아나는 선생님이 모르는 것을 알려 줄 수 있다는 사실에 신나서 설명했다. 바람을 동반한 강력한 폭설과 지면에 쌓인 눈이 바람에 날리는 땅 날림 눈이 동시에 발생하는 현상을 이곳에선 ‘스노 스콜'이라고 하는데, 이때 밖으로 나가면 날리는 눈 때문에 시야를 잃고 순식간에 체온도 내려가 얼어 죽어 버리기 때문에 절대로 밖에 나가서는 안 된다고 했다. “첫'이라면 이런 눈 폭풍이 자주 있는 건가요?” “그럼요. 겨울이 끝나기 전까진 계속 있죠! 본격적인 겨울이 되면 눈보라는 더 많이 칠 거예요.” “본격적인⋯⋯.” '그럼 지금은 본격적이 아니란 소리인가?' 믿기지가 않는다. “그래서 선생님, 이런 때는 난롯가에 앉아 뜨개질을 하는 게 딱이에요. 감자를 구워 먹으면서요.” “감자요?” 아나는 감자를 겉면이 탈 때까지 구워 배를 가른 다음에 짭짤한 치즈를 뿌려 먹으면 천국의 맛이 난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냥 치즈만 구워 먹어도 맛있고요!”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해 보았다. 그날 우리는 난롯가에 모여 앉아 수업을 하며 치즈와 감자를 구워 먹었다. 내친김에 주전자도 올려 물도 끓였다. 과연, 치즈를 올린 감자는 천국의 맛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방에 돌아오자 내 방 창에도 두꺼운 태피스트리가 쳐져 있었고, 꺼졌던 난롯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태피스트리를 살짝 걷어 밖을 내다보았다. 한낮인데도 밖은 희뿌연 회색일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유리창을 금방이라도 깨뜨릴 듯이 눈보라가 윙윙 울었다. 눈보라는 열흘 동안 계속되었다. 멈추는 일 없이 내내. 그동안 저택 안은 햇볕 한 점 없이 어둑했다. 햇빛 대신 등잔의 기름과 촛불, 벽난로에서 나오는 빛에 의지해야 하니 자연히 일찍 잠들게 되었다. 일어나도 어두우니 아침 같지 않았다. 마치 영원한 밤 속에 머무는 기분이었다. '이곳의 겨울은 추울 뿐만 아니라 캄캄하기까지 하구나.' 혹한에 대항하기 위해 바람이 들어올 만한 곳은 모두 막고, 불이란 불은 모두 맹렬히 태워 댔기 때문에 처음보다 춥진 않았다. 하지만 밖에 나가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도 없고, 햇볕을 쬘 수도 없으며, 일찍 잠들어야 하는 단조로운 생활은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다. 물론 즐거움도 있었다. 난롯가에 앉아 책을 읽으며 치즈와 감자, 사과를 구워 먹는 것이었다. 방 안이 온통 음식 냄새로 가득 차는 것만 감수한다면 난롯불에 뭐든지 구워 먹을 수 있었다. 그중에 구운 사과가 제일 맛있었다. 밀가루에 우유, 달걀, 럼, 소금을 넣고 되직하게 한 반죽에 사과를 적셔 구운 후 그 위에 설탕과 계피를 뿌린 음식이 었는데, 아나와 나는 수업을 하며 이런 음식을 먹고 또 먹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어느 날, 일어나 벽난로에 미리 따끈하게 데워 둔 옷을 입는데 허리부터 옷이 들어가지 않았다. '어⋯⋯ 어어어?' 진땀을 뻘뻘 흘리며 사투한 끝에 어떻게든 옷 속에 들어가는 데엔 성공했지만 허리를 굽힐 수도 숨을 쉴 수도 없었다. 나는 헉헉 얕은 숨을 쉬며 생각했다. '몸이 울룩불룩해. 마치 실로 묶은 햄처럼⋯⋯.' 흐읍, 하고 숨을 들이켜는 순간 옷을 터뜨릴 것 같았다. 믿기지가 않아 나는 배를 만져 보았다. 늘 밋밋하고 판판하던 배에 뭔가 잡혔다. 마치 핸들 같은 것이. 나는 더듬 거리다 두 손을 올려 이번엔 가슴을 만져 보았다. 가슴에도 무언가 잡혔다. 한 번도 잡힌 적 없는 살이라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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