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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13화


13화 그게 서로에게 죽음과 뭐가 다를까? '나는 모든 것을 잃었어.' 사랑하는 사람들이 너무 그리운 날에 나는 울었다. '다 잃었어. 이렇게 살아 봤자 대체 무슨 소용이 있지?' 베갯잇을 축축하게 적시며 대체 여기서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했다. 알 수 없었다, 아직은. 그런 밤이 지나고 날이 밝으면 나는 퉁퉁 부은 눈으로 일어났고, 공작 각하께서 명령한 것보다 몇 바퀴 더 뛰었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뛰고 나면 고통은 한결 나아져 있었다. 그렇기에 점점, 나는 뛰는 것이 좋아졌다. 뛰는 동안은 모든 걸 잊을 수 있어서. ❖ ❖ ❖ 가을이 무르익는 동안 발드르 드 스카디는 여자를 다시 보게 되었다. '며칠이나 갈까?' 처음에 길면 일주일이겠지 생각했다. 게으른 귀족 출신의 여자가 새벽에 일어날 수도, 훈련에 참여할 수도 없을 것이라고. 그러나 잔느는 일주일이 지나도 나타났다. 처음엔 그녀가 나타날 때마다 놀라고 두리번거리던 사병들은 점차 잠시 그들의 뒤를 쫓았다 사라지는 그녀를 하나의 풍경처럼 여기게 되었다. 하지만 발드르는 그럴 수 없었다. 전혀 풍경처럼 느껴지지 않고, 이상하게도 계속 시선이 갔다. 추월할 때마다 새빨갛게 터질 것 같은 얼굴로 헐떡거리며 숨을 내뱉고 있었으나 잔느는 세 바퀴를 다 채울 때까지 멈출 줄을 몰랐다. 발을 끌며 걷다 뛰다 하기는 해도 언제나 정해진 바퀴 수를 다 채우고 사라졌다. '몸은 허약한데 생각보다 근성은 있군.' 발드르는 날씨가 궂은 날에도 굳이 하인을 보내 나오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어떻게 하는지 보고 싶어서였다. 그런 날도 잔느는 나왔다. 그리고 그녀는 날이 가면 갈수록 잘 뛰게 되었다. 허름한 하녀복을 입고, 어느 날은 그가 명령한 것보다 좀 더 뛰고 가기도 했다. 그런 날에 그녀의 갸름한 얼굴은 좀 부어 있었다. 커다랗고 아름다운 두 눈가도 운 듯이 붉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드디어 잔느가 제 사병들과 같은 속도로 뛸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본인은 몰랐겠지만 발드르는 계속 그녀의 성장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그는 속으로 감탄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프랑의 귀족답지 않게.' 어쩌면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중앙에서 온 귀족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잔느 드 툴루즈라고 했던가?' 마침내 발드르는 잔느에 대한 첫인상을 바꾸게 되었다. 자신도 모르는 새에. ❖ ❖ ❖ 점심 식사 후 다음 날의 수업 준비를 마치고 난 뒤 나는 침대 위에 멍하니 누워 있었다. 졸리지는 않았지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집에 가고 싶어.' 우울감이 내 가슴을 무거운 돌처럼 짓눌러 올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는데 저녁 식사를 하기엔 좀 이른 시간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어 보니 방을 돌봐 주는 하녀 아이가 서 있었다. “무슨 일이니? 저녁 시간은 되지 않았는데.” “공작님께서 만찬에 초대하셨습니다.” 머리 위에 벼락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음⋯⋯ 왜? 무슨 일로?” “이유는 듣지 못했습니다.” 하기야 하녀에게 무슨 일로 식사에 초대하는지까지는 알려 주지 않았을 것이다. 식사 시간까지는 얼마 남지 않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나는 돌아서려는 아이의 손목을 쥐어 가볍게 끌어당겼다. “혹시 시간 좀 있을까?” 폴린느 부인께 받은 옷 대부분은 옆구리나 앞에 호크와 단추를 다는 등 혼자서 입을 수 있도록 수선했지만 그래도 드레스를 입는 것은 품이 드는 일이었다. 특히 정찬에 입을 만한 드레스는 더욱 복잡했다. 나는 내 옷차림을 마뜩지 않아하던 공작 각하의 싸늘한 눈빛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목둘레가 어깨 부근까지 파인 진홍색 드레스를 골랐다. 하녀 아이가 옷 입는 것을 도와주고 머리를 빗어 틀어 올려 주었다. 귀와 목이 드러나는데 장신구는 달리 없는 것이 민망했다. 값싼 것이나마 사 두어야 했던 것일까? 무슨 지적을 받을지 몰라 벌써부터 체할 것 같았다. “정말 아름다우세요, 아가씨.” 단장을 도와준 아이의 칭찬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귀부인들을 많이 보지 못한 아이의 눈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으리라. 나는 아이에게 동전을 쥐여 주었다. “도와줘서 고맙구나. 만찬 시간이 되면 다시 한번 들러 주렴.” 식사 시간까지 침대에 앉아 기다리는데 불현듯 내가 여기 올 때 호송관에게 받았던 주머니가 생각났다. 그 안에는 마엘 도련님이 내게 주신 패물들이 들어 있다고 했는데 나는 그것을 확인하지도 않고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걸 어디 두었더라?' 주머니를 찾아 열어 보니 아마도 방타두르 공작 부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패물들이 들어 있었다. '이렇게나? 팔아서 쓰라고 주신 것이겠지.' 침대에 쏟아 보니 보석이 박힌 귀걸이와 목걸이가 보였다. 아무튼 이것으로 다행히 정찬에 참석할 만한 구색은 갖춰졌다. 서둘러 귀걸이를 귀에 건 뒤 목 뒤에 손을 둘러 찾아낸 장신구의 호크를 채우는데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하녀의 안내를 따라 정찬실로 들어서며, 나는 공작 각하의 눈치를 살폈다. '이 정도면 괜찮나?' 그는 나를 흘긋 보고는 시선을 돌렸다. 내 옷차림 따위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것처럼. '휴.' 내가 원했던 반응이었다. '됐다, 됐어.' 흠이 잡힐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통과인 모양이다. “앉으시오.” 처음 식사했던 때보다 음식들은 입에 잘 맞았다. 아마 그동안 이곳 음식을 먹으며 적응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공작 각하 앞이다, 바로 앞에서 토한 적도 있는. 이번에는 결코 체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나는 음식을 가능한 한 작게 잘라 천천히 입에 넣었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시오, 여전히?” 공작이 말했다. 순간 작게 자른 음식 조각이 목구멍에 걸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기침을 참기 위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혹시 전과 같은 추태를 보일까 하여.” “그렇군.” 침묵 속에서 식사는 계속되었다. 정찬에 초대받은 손님으로서 재치 있는 화젯거리를 찾아내야 했지만 떠오르지 않았고, 솔직히 공작이 나와의 대화를 원하는지도 의문이었다. 훤히 드러낸 목덜미에 땀이 맺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도 초대받은 입장이니 뭔가, 뭔가 말하자. 뭐라도 좋으니⋯⋯. 눈앞에 있는 사람을 미친 남자가 아니라 방타두르 공작 부인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자 나는 드디어 대화 주제를 찾을 수 있었다. 아나 아가씨의 학습 진도에 대해서였다. 그때쯤 식사는 주요리에 이르고 있었다. “저, 요즘 아나 아가씨는⋯⋯.” “꽤 뜀걸음을 잘하게 되었더군.” 그런데 나보다 먼저 그가 말을 꺼냈다. “예?" “전보다 꽤 잘 뛰게 되었다고. 그래도 뛰기 전에 몸을 좀 푸는 게 게 좋을 거요. 일어나 갑자기 뛰기 시작하면 몸이 놀라 다칠 수 있으니 말이오.” “⋯⋯." “그런데 몸 푸는 법은, 아시오?” “예, 예, 알고 있습니다.” 사실은 몰랐다. “그렇군, 그럼 저택에서 몸을 풀고 오는 건가?” “예⋯⋯." “승마는 할 줄 모르시오?” “예?” “여기 왔을 때 죽기 직전이지 않았소? 호송관의 말로는 말을 제대로 못 탔다는데? 승마는 중앙 귀족의 기본 소양 아니오? 승마를 배우지 못한 이유가 따로 있소? 예전에 말에게 물리기라도 한 거요? 아니면 말 위에서 떨어졌다거나?" “예?" “할 줄 아는 말이 '예?'밖에 없소?” “예? 아니, 그게 아니라⋯⋯.” 영문을 알 수 없는 질문이 쏟아졌다. 나는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기는커녕 답을 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었다. “저, 승마는, 예전엔 저희 가문도 말을 가지고 있었지만 승마를 배우기 전 가세가 기울지라 제대로 배울 일이 없었습니다. 이후에도 마차를 이용할 일은 있었지만 말을 탈 기회는 없었기에⋯⋯. 만약 아나 아가씨께 승마를 가르치고 싶으시다면 저는 적임자가 아닙니다. 다른 선생님을 구하시는⋯⋯.” “아나에겐 이미 좋은 승마 선생이 있소. 그렇다면 아무 문제도 없다는 거군.” 그는 내가 하는 말을 자르고 쏘아붙이듯 말했다. “문제요?” “방금 그대가 말 타는 법을 배우는 데 아무 문제도 없다고 하지 않았소?" “예?" “내 말 한 필을 하사하겠소.” “예?” “내 아나의 승마 선생을 붙여 줄 테니 뜀걸음은 그만두고 말타기를 배워 보시오. 체력도 어느 정도 붙었으니 전보다 한결 타기 편할 거요.” “제가⋯⋯? 말을⋯⋯?” 내가 그걸 또 왜 배워야 한단 말인가? “저는, 저는 그 선물을 감당할 능력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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