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6화
6화
자작 부인의 아가씨를 가르칠 때와 업무가 비슷해 따로 물어볼 것이 없었다.
“수업을 하기 위한 교재는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요?”
“서재에서 구할 수 있으시죠!”
폴린느 부인은 만면에 웃음기를 머금었다.
“이 저택엔 왕실에 버금갈 만큼 책이 많답니다. 방에서 기다리고 계시면 서재로 안내할 아이를 보내드리로독 하지요. 혹 아가씨 교육에 필요한 것이 더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더 궁금한 점이 있으신가요?”
“아니요, 감사합니다. 폴린느 부인.”
아, 참. 그리고, 공작님께서는 필요하다면 수업 중에 매를 들어도 좋다고 하셨답니다.”
매? 그 말에 나는 움찔했다.
“매를요?”
“매를 아끼면 아이를 망친다는 속담도 있잖아요? 아무래도 예쁜 자식에게 매 한 번 더 드는 법이니까요. 공작님께서도 예전엔 매를 참 많이 맞았답니다.”
보통 부모가 요구하는 것은 그 반대 아닌가? 나는 일단 이 말을 학생을 조금 더 엄히 가르쳐도 좋다는 뜻 정도로 알아들었다.
“그럼 이만 가 보도록 하지요.”
폴린느 부인은 할 말을 다 마치고 허리춤의 열쇠 꾸러미를 짤랑거리며 물러갔다. 방문을 닫은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가정 교사로 취직하게 된 건 행운이지만 앞으로는 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혼자가 되고 나니 새삼 감정이 북받쳐, 다시금 두 눈에서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혹시 맡게 된 아이가 죄인이라고 나를 무시하고 괴롭히면 어떻게 하지? 도움을 요청해 봤자 아무도 내 말을 들어 주지 않으면? 자작저의 아가씨는 내가 할머니와 친분이 있는 걸 알고 괴롭힘을 그만두었지만 여기선 아무 뒷배도 없는데. 만약 해고당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이제 내겐 돌아갈 곳도 없는데⋯⋯.'
부정적인 감정이 마구 몰려들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마음을 강하게 먹어야 하는데⋯⋯.'
약해진 마음을 추스르려 노력했지만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울어 봤자 해결될 일도 아니고, 도와줄 사람도 없는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 걸까.'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좀 더 일찍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건데.
'내 휴가만 기다리던 어머니와 동생의 품으로⋯⋯.'
손등으로 눈물을 얼마나 닦고 있었을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문을 열어 보니 내게 음식을 가져다주었던 앳된 아이가 램프를 들고 서 있었다.
“서재 열쇠를 전해 드리고 안내도 해 드리라 하셨습니다. 아가씨, 지금 안내해 드려도 괜찮을까요?”
“그럼!”
나는 애써 씩씩한 척 대답하곤 아이의 뒤를 따라 저택의 복도를 한참 걷고 내려가기를 반복했다. 밖을 보고 싶었지만 이미 어두워져 창이 검게 물들었을 뿐 내다보이질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곤 어두운 유리에 비친 내 얼굴뿐이었다.
하녀가 육중한 나무문 앞에 멈춰 섰다.
“이곳이 서재입니다.”
문을 열고 서재로 들어선 나는 왕실에 버금갈 만하다던 폴린느 부인의 말이 저택 관리인으로서의 자부심에서 나온 과장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책이 정말 많군.'
온 세상의 책이 다 모인 것만 같을 정도였다. 커다란 서재 안엔 문 정면으로 쭉 이어진 복도 양편으로 날개를 펼친 듯이 책이 빼곡히 채워진 책장이 늘어서 있었다.
'어쩌면⋯⋯ 장서량만으로 치면 왕궁보다 많을 수도 있겠는데?'
공작의 학문적 지식은 바로 이 서재에서 나온 듯했다.
'그간 가정 교사를 많이 해고했다더니⋯⋯ 이해가 가는군.'
자신의 수준이 높으니 지금까지 고용한 가정 교사들이 못 미더웠을 것이다. 그렇지만 보통의 귀족 가문 여식에게 부모가 기대하는 교육 수준은 사실 그리 높지 않았다.
공작은 대체 양녀의 교육 수준을 어디까지 끌어올리고 싶은 것일까?
'하기야 보통 귀족이 아니라 공작가의 여식이지. 나중 다른 나라의 왕자에게 시집갈 수도 있으니 왕궁을 휘어잡을 수 있을 만큼의 교양과 지식이 필요할지도.'
한 나라의 왕비가 되면 자식을 위해 정치 싸움에 관여해야 할 수도 있고, 어린 아들을 대신해 섭정을 해야 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공작이 이전에 가정 교사를 여럿 해고했다던 말이 이해가 가는 동시에 걱정도 몰려들었다.
'면접은 어찌저찌 통과했지만 내가 그를 만족시킬 수 있을까? 나도 수준이 되지 않아 해고당하면 어쩌지?'
가정 교사 경력은 제법 오래되었지만 가르친 학생은 단 두 명뿐이었다. 나는 그날 밤늦게까지 교재로 쓸 만한 책을 찾고 수업을 준비하느라 잠시 낯선 곳으로 유배 와 있다는 두려움과 불안감을 잊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노크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아침 식사 시간입니다.”
아침 식사는 예의 그 스튜였다.
식사를 마치고 교재를 품에 안은 나는 기다리고 있던 아이를 따라나섰다. 복도로 나가자 햇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하녀의 뒤를 따라 걸으며 힐끔힐끔 창 바깥을 보니 세찬 바람이 비질하듯 장원을 뒤덮은 안개를 쓸어 내는 중이었다.
'공작가에 어울리는 규모의 저택이군.'
울타리 미로와 대리석 분수대는 없었지만 바깥은 그 나름의 운치가 있다. 자연의 일부를 뜰 안으로 데려온 것 같달까. 저 먼 곳에 개울이 흐르는 것이 보였고 그 근처에서 사슴 무리가 풀을 뜯고 있었다. 그 뒤로는 짙은 수풀이 빙 둘러싸듯이 펼쳐져 있었는 데, 낯선 풍경이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수업 후 시간이 된다면 저 먼 곳까지 산책을 나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곧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그냥 가정 교사로 여기 온 것도 아니고.'
도망칠지도 모르는 유배인을 혼자 밖으로 내보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유배인을 산책시키기 위해 감시인을 붙이는 수고도 하지 않을 테고.
'그럼 내내 이 저택 안에서만 지내야 하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공부방에 도착했지만 학생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공부방을 미리 둘러보았다. 널찍한 방이었다. 벽난로엔 장작이 가득 쌓여 있었고 그 옆엔 입식 수틀과 앉아서 페달을 밟는 형식의 하프가 보였다.
'이런, 자수는 자작가 아이를 가르치는 걸 그만두고 나서는 손에 잡아 본 적이 없는 데, 하프도⋯⋯ 아가씨가 나보다 더 잘하면 어떻게 하지?'
방 중앙에는 책상과 의자가, 벽난로 반대편엔 허리 높이까지 오는 책장이 있었다.
책장에는 교재로 썼을 법한 책들이 몇 권 꽂혀 있었는데, 꽂혀 있던 책을 빠르게 넘겨 보자 초보 수준의 문법책임을 알 수 있었다.
'초급? 아가씨가 몇 살이라고 했더라?'
가져온 책을 책장의 빈 구석에 꽂았을 때였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그 말에 푸른색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머뭇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스카디 공작 각하와 같은 흑발에 에메랄드처럼 빛나는 녹색 눈을 가진 소녀였다.
'아니, 이렇게 예쁘다고?'
그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생각해 보면 두려움에 먼저 압도되었을 뿐, 스카디 공작 또한 출중한 외모를 갖고 있었다. 미모는 공작가에 내려 오는 유전인가? 하지만 난 곧 평정을 되찾았다. 궁 왕실에서 마엘 도련님의 가정 교사로 있으면서 아름다운 사람들, 특히 여자들을 아주 많이 봐 왔던 기억을 상기했다.
“당신이 새 선생님인가요?”
소녀는 쭈뼛거리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저는 잔느 드 툴루즈라고 합니다. 툴루즈 백작가의 장녀지요. 절 잔느 선생님이라고 불러 주세요. 저는 이 공부방에선 아나 아가씨를 학생, 공부방 밖에서는 아가씨라고 부르겠습니다.”
호칭 정리를 먼저 한 나는 내 눈치를 보며 자리에 앉는 아나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외모는 천사처럼 아름다운데 표정에는 이상하리만치 수심이 어려 있었다.
'당연히 그렇겠지.'
나는 아가씨의 태도를 얼마 전 가족을 잃었기 때문으로 받아들였다. 갑자기 부모님을 잃고 낯선 환경에 놓였으니 귀족 특유의 거만함을 잃어버린 것이리라고. 나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아직 내가 맡은 학생에 대해 잘 모르면서도 어쩐지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아나 아가씨 앞에 어제 준비한 시험지를 올려놓았다.
“오전 시간엔 먼저 시험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모든 문제를 맞힐 필요는 없으니 여기 문제를 읽어 보고 아는 것만 답을 쓰세요. 시간은 충분히 드릴 테니 먼저 찬찬히 읽어 보시고요.”
시험지는 학생의 수준이 어느 정도 되는지 알려 주는 지표였다. 어젯밤 나는 아가씨의 수준을 확인하기 위해 아주 쉬운 문제부터 고급 문제까지 망라한 시험지를 주제별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