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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5화


5화 내가 몸을 떨기 시작하자 공작은 내 반응을 눈여겨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마시오. 유배 온 귀족들은 상황이 훨씬 나으니까. 그대를 포함하여 귀족들은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고급 인재지 않소? 나는 이곳에 유배 온 귀족들에겐 주로 공문서, 서신 등을 대신 작성하고 회계 기록 등을 필사하는 일을 맡겨 왔소.” 그 말인즉. '그러니까 당신은 지금까지 정쟁에 휘말려 여기로 유배 온 귀족들을 필경사로 부리고 계셨다는 거군요.' 스카디 공작은 수도에서 보내온 유배인들의 노동력을 알차게 뽑아 먹고 있다는 말이었다. 귀족이나 일반 범죄자나 할 것 없이. '귀족들을 일하게 하다니⋯⋯.' 지금까지 입으로만 싸울 줄 알았지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살던 왕궁 귀족들이 들으면 대경실색할 만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나는 그 이야기에 오히려 안심했다. '그 정도면 괜찮지 않나? 일을 준다는 건 일단⋯⋯ 여기서 먹고살게는 해 주겠단 거잖아.' 나는 어차피 프랑에서도 일을 했고, 필사 업무가 곡괭이 들고 땅 파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도 스카디 공작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했다.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유폐, 감금되어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일을 하는 게 시간도 빨리 지나갈 테니 더 좋을 것 같았다. 내 머리는 빠르게 굴러갔다. “그럼, 저는 언제부터 그 업무를 시작하면 될까요?” 내 말에 공작은 놀랍다는 듯이 한쪽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빨리 받아들이는군.” '그렇군.' 나는 그 말을 공작이 이 제안을 했을 때 다른 귀족들은 저항했다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저는 왕궁에서도 직업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공작 각하.” “그래, 가정 교사였다고 했지. 그에게 무엇을 가르쳤소?” “다른 나라의 언어들과 인문학과 논리, 수사학, 산술을 가르쳤습니다.” 내 말에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대는 꽤 젊어 보이는데, 어떻게 그 나이에 다방면에서 국왕의 자식을 가르칠 만한 지식을 쌓았소?" “제 가문은 지금에 와서는 한미하나 제 조부께선 이름난 시인이자 학자셨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그분의 무릎에 앉아 모든 것을 배웠지요.” 하지만 그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더니 대뜸 외국어로 말했다.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그대의 학식과 깊이를 확인해야 할 이유가 있어 그러니 그대를 시험하는 것을 이해하시오.” 그렇게 나는 그와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내가 할 수 있다고 말한 여러 가지의 언어들로 논리, 수사학과 그가 읽어 오거나 내가 읽어 온 책들에 대해서. 대화가 이어지면서 나는 점점 놀라기 시작했다. '공작은 군인이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이런 지식과 교양을 쌓았지?' 나도 모르게 편견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공작이 사람을 죽이는 법에는 능할 지언정 인문학에 대해선 모를 줄 알았다. 그러나 그의 학식은 풍부했고 말에는 냉철한 논리와 사유가 엿보였다. 그와의 대화는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대화는 이쯤 하기로 하지.” 그리고 그는 다시 모국어로 돌아왔다. “나는 그대가 내 자식의 가정 교사가 되어 주었으면 하오.” 그건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가정 교사?' 보통 유모와 가정 교사를 구하는 권한은 집안의 안주인이 가지고 있었다. '왜 공작 부인이 아니고 공작이?' 내 의문을 읽은 듯이 스카디 공작이 말했다. “내겐 아내가 없소, 하지만 내가 맡길 아이는 사생아가 아니오.” “⋯⋯.” “그대가 가르칠 아이는 내 양녀이자 조카요. 원래는 형의 자식이었는데 세상을 떠나 내가 양육을 맡게 되었지. 올해 열세 살이 되었는데 나는 그대가 이 아이의 교육을 맡아 주었으면 좋겠소.” '형? 형이 있다면 후계자 계승 원칙에 따라 작위를 형이 물려받았을 테고, 그 형이 죽고 남은 조카가 한 명뿐이라면 그 조카가 작위를 승계해야 하는 것 아닌가?' 공작이 하는 말에 뭔가 이상한 점이 좀 있기는 했지만, 그제야 그가 마엘 도련님의 편지에 코웃음을 치면서도 내게 식사를 권한 것이 이해가 갔다. 그는 나를 양녀의 가정 교사 후보로 보고 있었고 나는 방금 전 시험에 통과한 것이다. “어떻소? 내 양녀의 가정 교사가 되어 주시겠소?” “예! 하겠습니다! 가정 교사!"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나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노역도 안 가고 비좁은 문서실에 갇혀 하루 종일 받아쓰기를 안 해도 되는데 웃지 않을 이유가 대체 뭐가 있겠는가? “제게 귀한 자녀를 믿고 맡겨 주시니 그저 감사드릴 따름⋯⋯.” 스카디 공작이 나를 가정 교사로 삼겠다는 것은 나를 단순한 유배인으로 취급하지 않겠다는 것과 일맥상통했다. 하지만 나는 감사의 말을 다 잇지 못했다. 행복감에 젖어 가슴이 벅차올라서였냐고? 아니었다. “⋯⋯우욱, 우우욱!” 말을 하다 말고 그대로 토해 버렸기 때문이다. 웨에에엑 촤아악ㅡ. 더부룩한 속을 무시하고 음식을 계속 밀어 넣었던 게 문제였을까? 메스꺼움을 느끼자마자 식탁 아래로 고개를 숙인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지만, 식탁이 적나라한 소리까지 막아 줄 수는 없었다. “⋯⋯.” 촤아아아악ㅡ. 말하다 뜬금없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그대로 구토해 버린 나도 나지만, 그 상황을 맞닥뜨린 공작 각하는 얼마나 황당했을 것인가. '세상에⋯⋯.' 시큼한 위액의 맛을 느끼며 고개를 들자 공작이 나를 보고 있었다. “⋯⋯.” 두 눈을 크게 뜨고 살짝 입을 벌린 채로. 어떨 땐 말보다 표정이 더 많은 말을 하는 법이다. 나는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황급히 변명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여독이 다 풀리지 않아서 몸이⋯⋯.” 그리고 나는 보았다. 그가 얕은 한숨을 내뱉으며 아주 살짝 고개를 젓는 것을. 이후 그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시종에게 말했다. “툴루즈 양을 방까지 모셔다드리고 필요한 것을 챙겨 드리도록 하게.” “⋯⋯.” “방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폴린느 부인이 방문할 거요. 나는 내일 이곳을 떠나니 아이들 교육에 필요한 것은 모두 부인에게 말하도록 하시오.” 첫인상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처음부터 며칠 씻지 않은 몰골을 보인 데다 토하기까지? 이보다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 ❖ ❖ 방으로 돌아와 혼자가 되자마자, 나는 침대에 엎드려 머리를 감싸 쥐며 절망했다. '어떻게 거기서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지?' 식사를 대접했는데 거기다 대고 토악질을 하다니 무례한 정도를 넘어서는 짓이었다. 스카디 공작에게 이 지역의 요리가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 놓고 지적 한 것으로 느껴지진 않았을까? '하필이면 왜? 거기서?' 수치심에 몸부림치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어 보니 땅딸막하고 혈색 좋은 노부인이 맞잡은 두 손을 배 근처에 얹은 채 서 있었다. “잔느 드 툴루즈 양 맞으신지요?” 노부인의 검은 드레스는 수수했으나 품질 좋은 고급 목공단으로 지어졌고 허리춤에 찬 벨트에는 열쇠 꾸러미가 달려 있었다. 저택의 고가 물품을 보관해 두는 창고의 열쇠임이 분명했다. 그 차림새를 보고 나는 그녀가 공작 각하께서 말한 폴린느 부인임을 알았다. “저택의 가사 전반을 돌보고 있는 폴린느라고 합니다. 앞으로 잔느 양께서 할 일을 알려 드리고자 왔습니다.” 폴린느 부인의 말씨는 예의 발랐으나 저자세는 아니었다. 공작가에 안주인이 없는 만큼 그녀가 이곳의 안살림을 맡고 있는 모양이었다. “잔느 양이 가르치게 될 분은 아나 아가씨로 올해 열세 살이 되셨습니다. 공작님께서는 아가씨를 양녀로 거두신 후 그간 여러 가정 교사를 고용했지만 모두 마음에 차지 않아 곧 해고하셨지요. 하지만 잔느 양은 잘하실 수 있을 겁니다. 왕실에서 공작 부인의 아드님을 가르치신 경험도 있으시니까요.” 폴린느 부인은 방에 들어오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내가 해야 할 일과 알아야 할 일에 대해 말해 주었다. “수업은 내일부터 해 주시면 됩니다. 그간 가정 교사가 없어 아가씨의 수업이 많이 지체되었거든요. 잔느 양이 할 일은 아나 아가씨께 숙녀로서의 소양을 차근차근 쌓아 주시는 겁니다. 공부방은 같은 층의 동쪽에 있는데 첫날은 길을 안내할 아이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수업은 아침 식사 후부터 점심 식사 전까지인데, 점심은 아가씨와 함께 해 주시며 식사 예절도 같이 가르쳐 주시면 됩니다. 점심 식사는 공부방으로 올려 보내도록 하지요. 저녁은 방으로 보내 드리고요. 잔느 양도 사용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것은 불편하시겠지요? 그리고 수업이 끝난 후에도 아가씨께서 책을 읽어 주기를 원하시거나 산책을 함께하려고 하신다면 언제든지 응해 주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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