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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4화


4화 몸을 씻고 나오자 하녀는 보이질 않고 침대 위에 옷과 브러시, 머리를 묶을 끈이 준비되어 있었다. 수수한 적갈색 드레스를 만져 보니 옷감이 평소 입던 것보다 훨씬 도톰했다. 추운 날씨 때문일 것이다. 새 옷으로 갈아입으며 나는 앞으로 이곳에서 어떤 처우를 받게 될지 상상해 보았다. '당연히 좋지는 않겠지⋯⋯.' 발목까지 오는 드레스는 옷감의 질 자체는 좋아 보였지만 방금 전 내 시중을 들던 하녀의 제복과 앞치마를 제외하면 별다를 것이 없었다. 어쩐지 이 옷이 공작이 앞으로 나를 어떻게 대할지를 알려 주는 척도처럼 느껴졌다. 나는 옷을 입고 젖은 머리를 손으로 빗어 머리 위에 틀어 올렸다. 그리고 침대에 앉아 방을 바라보았다. 왕궁에 있던 내 방과 비교되는 무척 황량한 방이었다. 화장대도, 거울도, 책상도 없이 침대 옆에 초를 올려 두는 작은 협탁이 있다. 다행히 화장실은 딸려 있지만 천장은 석재 구조가 그대로 보였다. 침대와 붙은 면의 벽엔 손바닥만 한 창이, 그 옆 벽에는 벽난로와 쌓인 장작이 있고 융단은 깔려 있지 않아 돌바닥이 노출된 채였다. '하녀들이 쓸 법한 방이군.' 나는 침대에 앉아 잠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곧 결론을 내렸다. 비록 내방이 금박과 천장화로 가득 찬 아름다운 방에서 이 방으로 바뀌긴 했지만, 오기 전에 상상했던 것만큼 비관적이지만은 않다고. '그래, 벌써부터 우울해질 것 없어. 생각해 보면 자작 부인도 내게 이런 방을 줬었잖아? 그땐 천장이 경사진 다락방인 데다 욕조도, 화장실도 없었어.' 그래서 방 안에 요강을 두어야 했고 씻을 때는 커다란 대야에 따뜻한 물을 부탁해 직접 방까지 들고 올라오는 수고를 들여야 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나는 사용인 대접에 익숙해 있었다. 하지만 귀족으로서 특권을 누리다 갑자기 전락하게 되었더라면 이보다 심한 충격에 휩싸였을 것이다. '그때보다는 나아. 더군다나 나는 이제 죄인의 몸이 아닌가. 그런데도 이만한 취급을 해 주다니 감사해야지.' 어쨌거나 낙마하지 않고 유배지에 살아 도착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지하 감옥에서 짓지도 않은 죄를 소상히 자백하라며 끔찍한 고문을 받을 수도 있었고, 재판이 무기한 유예되어 차가운 돌바닥에서 시름시름 앓다 죽었을 수도 있었다. '최악은 아니야.' 거기까지 생각하다, 아무 뒷배도 없다고 생각했던 내게도 의지할 만한 것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마엘 도련님의 존재였다. 물론 애초에 도련님의 가정 교사가 되지 않았더라면 유배 올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분의 가정 교사가 아니었더라면 지금까지 가족들을 무슨 수로 먹여 살렸을까? 마엘 도련님은 누명을 쓴 나를 빼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스카디 공작에게 편지를 써 편의를 돌봐 달라 부탁할 힘은 있었다. 그러나, 난데없이 왕비 소생이 아닌 왕의 아이, 마엘 도련님의 측근을 떠맡게 된 공작 각하께선 내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을까. '골칫덩이겠지⋯⋯.' 생각만으로도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래도 어쨌든 공작에게 잘 보여야 했다. 스카디 령에서의 생활 전반을 공작의 자비에 기대야 하는 형편이었으니. '그런데 어떻게?' 그에게 중앙의 귀족을 대하는 방식이 먹히지 않을 것은 분명해 보였다. '자비라니? 야만족의 피가 흐르는 공작에게 자비라는 게 존재나 할까?' 나는 처음 본 남자에게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스카디 가문에 대한 편견이었다. '무서운 사람들이라는데⋯⋯.'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배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배고파⋯⋯.' 억지로 먹었던 스튜가 막상 식욕을 돋운 모양이다. 잠들었던 허기가 눈을 떴는지 갑작스럽게 나는 몹시 배고파졌다. 그때부터 식사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 고역이었다. '그런데 왜 내게 식사를 청했을까? 그래도 귀족이라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창밖을 내다봐도 날이 워낙 어둡고 우중충해서 때를 가늠할 수 없었다.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마침내 하녀가 돌아왔을 때, 나는 그녀가 반가울 지경이었다. 이후 정찬실에 도착한 나는 두 가지 상황에 놀랐다. 하나는 공작이 이미 먼저 와 자리에 앉아 있는데 식탁에는 아무 음식 없이 식기만 놓여 있을 뿐이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자리에 공작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이 올 예정인지를 살피며 그에게 살짝 드레스 끝자락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공작⋯⋯ 각하, 정찬에 참석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가 앉은 채로 내게 말했다. “앉으시오.” 하인이 내게 그와 가까운 자리를 권했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착석했다.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 주변을 둘러보니 왕궁만큼 호사스럽지는 않아도 대공작가에 필요한 것은 다 갖춰져 있었다. 정찬실의 벽 곳곳에는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었다. 사냥이 주제인 듯했다.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하인들이 음식이 담긴 접시를 들고 들어왔다. 접시에는 음식이 아주 약간, 한 사람이 먹을 수 있을 정도만 덜어져 있었다. 같은 종류, 같은 양의 음식이 든 접시 두 개가 그와 내 앞에 각각 놓였다. '음?' 신기한 방식이었다. “우리는 프랑에서와 달리 한 상에 먹을 음식을 다 내어놓지 않소. 그랬다간 음식이 먹기도 전에 식어 버릴 테니까. 그리고 상석에서 멀어질수록 제대로 된 음식을 먹기도 어렵지. 누군가가 덜어 주지 않으면 말석에 앉은 자는 배를 채울 수도 없지 않소.” '그렇군.' 듣고 보니 합리적인 방식이었다. 왕궁에서는 보통 식탁에 넘치도록 음식을 차려 놓았고 가장 좋은 음식은 상석에 놓였으며, 말단에 앉은 귀족은 상석에 앉은 자가 특별히 나누어 주지 않으면 손이 닿지 않는 음식을 맛볼 수도 없었다. 그러니 국왕 폐하와 가능한 한 가까이, 상석에 앉기 위한 충성 경쟁이 얼마나 치열하겠는가? '프랑과 다른 건 또 뭐가 있을까.' 이내 우리는 음식을 먹었다. 침묵 속에서. “입에 맞소?” 나는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맛있습니다. 공작님의 은혜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사실 끔찍할 정도의 허기에도 불구하고 음식이 아주 맛있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음식은 추운 날씨에 적응하기 위해서인지 하나같이 기름졌고, 소스에선 생전 처음 먹어 보는 맛이 났다. 그나마 소금과 레몬즙을 끼얹은 생선만이 익숙했는데. 오랫동안 음식을 받아들이지 못한 속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긴장되는 자리여서 그런지, 그도 아니면 그 모든 이유 때문인지 나는 금방 속이 나빠지고 말았다. '토할 것 같아.' 하지만 수도에서 유배 온 귀족 아가씨가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다며 먹는 둥 마는 둥 한다면 얼마나 마뜩잖게 보일 것인가? 올라오는 신물과 메스꺼움을 참고 나는 입이 열린 김에 몇 번이나 이곳 음식에 찬사를 보냈다. “음식이 정말 제 입맛에 잘 맞습니다. 특히 이것을 뭐라 하지요, 이 술⋯⋯? 술이 정말 맛있습니다.” “사과주인 시드르라고 하오.” “그리고 방금 전 먹은 고기, 고기도 정말 맛있습니다.” “말린 자두를 넣은 토끼 고기 요리요.” “그렇군요! 그리고 지금 이것도 정말 맛있습니다.” “그럼 더 드시오.” 그는 무미건조하게 이곳 지방의 음식에 대한 찬사를 받아들인 뒤 손짓으로 하인을 불렀다. 그리고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겨우 다 먹은 음식들을 모두 새것으로 다시 한 번 마주하게 됐다. '이걸 또 먹으라고⋯⋯?' 사람이 이래서 거짓말은 하면 안 되는 것이다. “식사를 멈추지 말고 내 말을 들으시오.” 마른침을 삼키며 음식을 바라보는 내게 공작이 말했다. “그곳에선 어떤지 모르지만 이곳에선 남녀노소, 지위 고하를 불문하고 모두가 일하오. 땅은 넓고 할 일은 많은데 사람이 적기 때문이지.” 나는 눈앞의 음식들을 가능한 한 아주 잘게 해체해 입에 넣은 뒤 기포가 부글거리는 사과주를 목구멍에 억지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간간이 수도에서 보내오는 유배인도 마찬가지요. 그들도 마냥 노는 것보다는 일을 하는 편이 정신에도, 육체에도 좋지 않겠소? 내 영지에는 보통 교수형을 겨우 면한 강도나 살인자가 많이 오는 편인데, 나는 보통 그들에게 불모지를 개간하는 작업을 시키오. 북부 대지엔 아직도 사람이 살지 못할 만한 땅이 많으니까.” 그 말에 억지로 음식을 삼키고 있던 나는 스카디 공작을 바라보았다. “성 보수 작업을 시키거나 말이오.” '저도요?' 방금 전에 분명 ‘남녀'노소라고 했다. 겨우 살아나 이곳에 도착했더니 땅 갈고 바위 부수는 인생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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