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season2. 20. 내 어둠은 너다(1)
season 2
20. 내 어둠은 너다(1)
기찬은 김하익이라는 인간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그는 분명 송지연이 사전에 약속한 대로 움직이지 않은 것을 의심할 것이다.
그의 성격이 원래 의심이 많은 데다 간이 작아 불안한 요소를 그냥 두고 넘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유를 캐물을 거야. 납득이 될 때까지 확인하겠지.’
한 번 의심이 들면 좀처럼 그 의심을 거두기가 쉽지 않다.
사실을 말해도 믿기 어렵고, 자꾸 뭔가 있을 것 같고, 불신과 배신감만 더 커지게 된다.
그러다 보면, 확인하는 방법이 거칠어지게 마련이다.
특히 김하익처럼 잔악하고 포악한 성정의 속 좁은 밴댕이라면 더욱더.
운전 중에도 많은 생각을 빠르게 정리한 기찬은 이대역 근처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송지연의 집까지는 급한 걸음으로 이동했다.
‘별일 없어야 할 텐데….’
사실 송지연의 안위를 걱정한다기보다, 그녀가 공포에 질려 전부 불어버리게 되는 상황을 걱정했다.
그녀의 입에서 성기찬이라는 이름이 나와서 좋을 게 하나도 없다.
기찬은 지나가는 사람처럼 그녀가 사는 원룸 빌라 앞을 몇 번 왔다 갔다 하며 주변에 주차된 차량 등을 파악했다.
아무리 살펴도 송지연의 차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집이 2층 2호라는 기억에 창을 확인했다.
역시 불빛 없이 어두웠다.
‘나보다 먼저 출발했어. 시간상 이미 도착했어야 한다.’
기찬은 멈추지 않고 계속 걸으면서 가만히 생각했다.
만약 누군가 송지연을 도중에 납치했다면….
차량 통행이 적은 곳에서 접촉 사고를 낸 후, 운전자를 밖으로 나오게 해 신병을 확보할 수 있다.
혹은 같은 상황을 만들고 강제로 차 안으로 들어가 차량 채로 납치하는 경우도 가능하다.
송지연의 차가 없어 해 본 추측이었다.
하지만 곧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번거롭게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었을까? 나라면….’
들어가려고 마음만 먹으면 빌라 문 여는 건 일도 아니다.
주인 없는 빈집, 먼저 도착해 숨어있다가 귀가한 무방비의 그녀를 잡아두면, 목격자 걱정도 없어 찜 쪄 먹든 끓여 먹든, 자유롭다.
나름의 근거를 토대로 결론을 내린 기찬은 이제 어떻게 할지를 고민했다.
사실 모른 체 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송지연을 챙기기로 했다.
‘이 여자, 쓸모가 많아.’
송지연 또한 자신의 휘하에 두기로 한 것이다.
빛이 있으면 반드시 그림자도 있는 법.
그녀의 쓰임을 이번에 확실히 목격하고 경험했다.
‘재영이가 나의 빛이라면, 앞으로 나의 어둠을 담당하는 건 너다.’
마침 그녀도 자신에게 이미 반은 넘어와 있는 상황으로 판단했다.
수치화된 지표가 있는 건 아니지만, 느낌이라는 게 그랬다.
확신이 들 만큼의 느낌이라면 믿을 만했다.
물론, 돌다리도 두들겨 건너라고, ‘만약’이라는 것과 안전장치는 준비해야 한다.
‘그건 지금부터 마련하면 되고.’
기찬은 은밀히 빌라 내부로 들어가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그녀의 집 문 앞에 섰다.
그리고 가만히 안의 기척을 살폈다.
환생 후 유난히 좋아진 신체적 능력 덕에 청각도 평범 이상이었기에, 작은 기척을 잡아낼 수 있었다.
‘누군가 있다.’
그 정도 정보면 충분했다.
이제 이 야심한 시간에 여자 혼자 사는 집 문을 두드릴 타당성만 갖추면 된다.
그래서 급하게 설정한 연기를 시작했다.
디로롱.
망설임 없이 곧장 벨을 누르고 아주 요란하게 문을 두드렸다.
쾅쾅쾅.
“누나, 나야. 연락이 안 돼서 왔어. 문 좀 열어 봐!”
쾅쾅쾅쾅.
자정이 넘은 시간, 이웃에 민폐다.
그러라고 더욱 큰 소리를 냈다.
“누나, 안에 있는 거 알아. 잠깐 얼굴만 보고 갈게!”
쾅쾅!
얼마나 세게 두드렸는지, 철문이 부서질 것 같은 굉음을 내며 마구 흔들렸다.
도저히 안 열고는 못 배기는 소란이었다.
역시나, 그렇게 잠깐의 소란 뒤, 문 안쪽에서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차륵, 달칵.
그리고 천천히 문이 열렸다.
송지연의 얼굴이 반쯤 나왔고,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너무 늦은 시간인데. 내일 얘기해….”
기찬은 그녀의 눈을 가만히 바라봤다.
정말 아무 일 없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 기찬은 그 순간에도 안쪽의 기척을 감지하고 있었다.
송지연 외에 누군가 있다는 걸 확신했다.
‘여차하면 뛰쳐나오겠지.’
기찬의 머릿속에는 이미 그 덩치의 행동이 그려지고 있었다.
“알아. 그러게 왜 전화를 안 해. 내가 할 말 있다고 저녁때부터 말했었잖아.”
기찬은 나름 혼신의 연기를 다 했다.
그러면서도 눈은 그녀의 두 눈을 정확히 마주하고 있었다.
마지막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송지연도 기찬의 행동이 의미하는 바를 이미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여전히 어떤 동요도 없이 기찬의 연기를 거들었다.
“사실, 손님이 있어서, 안으로 들어오라고는 못 하겠는데…. 내가 나갈까?”
기찬은 속으로 감탄했다.
이런 상황에서 저렇게 침착하다니.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자신이 나가겠다는 의사를 보여 안에 있는 사내가 움직이도록 유도했다.
만약 송지연이 그대로 기찬을 따라 불쑥 나가버리면, 정말 곤란해지니 말이다.
송지연의 상황 대처 능력은 기찬이 생각했던 것 이상의 상당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안에서 굵은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안으로 모셔. 이 시간에 어딜 나가려고.”
기찬은 모르는 척 당황한 연기를 했다.
“어? 손님이라는 게, 남자였어요? 누구…?”
주춤하는 듯한 말과 다르게 몸은 주저함 없이 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 소파에는 짐작대로 호텔에서 김하익과 함께 있던 그 덩치가 앉아 있었다.
“뭐 하는 놈이야? 왜 이 시간에 여자 혼자 사는 집에 찾아와서 소란이냐고!”
기찬이 그렇게 불쑥 들어올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지, 덩치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기 위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눈썰미 좋은 기찬은 아무런 대꾸 없이 그 잠깐 사이에 사내와 사내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아까 봤던 옷차림 그대로다.’
하지만, 뭔가 흐트러진 상태임을 느낄 수 있었다.
바지 벨트의 버클 위치, 셔츠의 구겨짐, 발목에 올라와 있는 양말목의 위치….
기찬은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송지연을 돌아봤다.
“전에 말했던 그, 운동한다는 사촌 오빠?”
되는 대로 엉뚱한 소리를 지껄였다.
그러면서 송지연의 상태도 빠르게 확인했다.
‘등의 지퍼가 끝까지 다 올라오지 않았다.’
기찬은 자신이 들이닥치기 전 상황을 거의 확신했다.
다만, 그걸 강간이라고 봐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송지연은 화류계 에이스.
남자관계는 자신이 신경 쓸 이유가 없다.
좋아서 떡을 치든, 화대를 받고 서비스를 하든, 혹은 강제로 당하든, 제가 알아서 할 문제다.
하지만, 조금 전에 막 결심했다.
‘이제 내가 갖기로 했으니, 내 걸 건드리는 건 용납 못 하지.’
기찬은 송지연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 사내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정중히 인사하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지연 누나 남자 친군데, 급한 얘기가 있어서요. 잠깐 얘기만 하고 갈게요.”
문을 두드리기 전에 설정해 둔 관계를 빠르게 드러냈다.
남자친구라는데, 늦은 시간이건 이른 시간이건, 여자친구 집에 드나드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사내도 곧장 대응하지 못하고 눈만 무섭게 부라리고 있었다.
‘사촌오빠라는 역할로 미리 가둬뒀으니, 어떻게 빠져나올지 궁금하네.’
기찬이 자신을 송지연의 남자친구로 설정한 데는 당장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임기응변이었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김하익을 기만하기 위한 수까지 섞은 것이다.
김하익은 애초에 기찬을 옭아맬 목적으로 송지연을 붙였다.
당시 기찬이 그녀의 핸드백에서 찾아 수거한 녹음기의 목적이 무엇인지, 이번 일을 통해서 확실해졌다.
‘오명환한테 했던 것처럼, 나한테도 같은 수를 쓰려고 했던 거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그의 뜻과 반대로 송지연이 기찬에게 넘어오게 됐지만, 정작 감하익 본인은 아직 그런 상황을 모르고 있었다.
‘내가 송지연과 사귀는 사이라는 얘기를 듣게 되면, 뜻대로 됐다며 좋아하겠지.’
방심은 빈틈을 만든다.
기찬은 이참에 김하익을 위해 설정해 둔 덫을 움직여 볼 생각이었다.
“남자친구 있다는 말은 못 들어 봤는데?”
사내는 위협적인 표정과 말투를 고수한 채로 송지연을 노려봤다.
기찬은 그녀가 반응하기 전에 먼저 선수쳤다.
“사귀기 시작한 지 며칠 안 됐습니다. 그리고, 사촌 오빠에 대한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친오빠나 다름없다고….”
기찬은 처음의 경계심을 싹 거두고 아주 예의 바르고 공손한 말투와 태도로 사내에게 꾸벅 인사했다.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성기찬입니다. 그런데, 처음 뵙는 자리가, 상황이 이래서 죄송합니다.”
기찬의 플랜 B는 이 사내와 한판 붙는 것이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힘에서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기에 가능한 대응 방법이었다.
그래서 남자에게 힘이나 싸움은 곧 자신감이다.
그건 본능의 영역에 있는 문제이고, 기찬은 그 영역에서 피지컬부터 스킬까지 완벽에 가까운 존재였다.
야수로 따지자면 사자로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강자는 강자를 알아본다.
상대도 기찬의 몸을 보고 보통내기가 아님을 알아봤다.
물론 김하익으로부터 기찬이 복싱 선수 출신이라는 얘기도 들었을 것이다.
그 덕에 기찬이 폭력을 쓸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눈을 부라리며 겁박하던 사내는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더니 갑자기 나름의 훈계를 했다.
“뭐, 내가 그 사촌 오빠 맞는데, 아무리 남자친구라도 그렇지, 이 늦은 시간에…. 쯧.”
그는 기찬이 설정해 놓은 사촌 오빠 역할을 맡기로 한 것이다.
본인도 그게 편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아주 멍청한 새끼는 아니네.’
퇴로를 열어주고 선택하게 하는 전략이 이번에도 보기 좋게 먹혀들었다.
기찬은 속으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삼키며, 특유의 친화력을 보였다.
“주의하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워낙 급한 일이라 어쩔 수 없었어요. 너그러이 이해해 주세요. 형님.”
형님이라는 호칭 때문인지, 기찬의 시원시원한 태도 때문인지, 사내는 헛기침을 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그 순간, 사내가 휘청하더니 무너지듯 쓰러졌다.
비틀.
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