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2부 78화 - 카랄 프릿즈 한센.
잠깐 기다리라는 말을 끝으로, 차에서 내린 나는 묘한 쇳내음이 스미는 아포칼립스의 세상 속으로.
마치 옥에 티 처럼 모여 있는 눈 앞의 사람들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유심히 그들을 살핀다.
온 몸을 감싸는 방호복을 입고 있는 사람. 알 수 없는 수많은 장비들을 균열과 연결하고 있는 전선. 그리고 그 수많은 전선들 옆으로 경직된 채 서 있는 이종족들…
도대체 지금 무슨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눈앞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건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는데… 그 순간 나를 발견한 누군가 가 종종 걸음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누구지? 느낌이 헌터 같지는 않은데...)
"..."
안경에, 뒤로 묶은 포니테일 머리. 그리고 어딘가 모르게 묘한 표정으로 굳어 있는 어두운 안색.
마치 연구실이나 병원에서 튀어나온 듯한 흰 가운을 걸친 여자는 20대 중 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인간인 것 같았는데, 아무리 봐도 나를 썩 반기는 듯한 눈치는 아닌 듯했다.
"... 혹시 관계자 분이신가요?"
"아뇨. 여기서 일하는 헌터인데 길을 막고 있길래 무슨 일인가 싶어서..."
"아... 그게 연구 때문에... 죄송하지만 이쪽으로 가는 건 좀 삼가해 주셨으면..."
"... 연구?"
"네, 그래서 말인데 그... 이쪽 라인을 피해서 우회해 주실 수 있을까요?"
"무슨... 연구를 하길래…”
"그건...”
"..."
말하기 곤란한 듯, 쉽사리 나오지 않는 대답.
그러는 사이 내 시선은 다시금 저 뒤로 보이는 이질적인 광경으로 향하고. 동시에 나는 어딘가 익숙한 느낌을, 군인 시절의 기억이 무의식 중에 떠오르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아무리 봐도 저 분위기는... 어디 작전이나 전쟁터에 나가기 전 맴도는 일종의 적막이었기 때문이었다.
"... 혹시 크라우치와 연관이 있는 겁니까?"
"예? 아뇨... 그건 아닙니다만... 어떻게 크라우치를 알고 계시는 거죠?"
"그날 현장에 있었거든요. 제가 해치웠습니다."
"진짜요?"
"..."
느껴진다. 처음 만났던 그 순간 보다 훨씬 더 긍정적으로 그녀의 표정이 변하는 것이.
하지만 그 뿐이다. 약간의 호감을 얻었을지는 모르겠지만 고작 이 정도로는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없었고, 그 순간 이 상황을 정리하기라도 하듯 또 다른 누군가 가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아주 무겁고, 육중하게 말이다.
(시발… 저건 또 뭐야?)
- 보통 인물이 아닌 듯하니 주의하십시오.
"..."
보기만 해도 무거워 보이는 붉은 갑옷. 양손에 들린 살벌한 곤봉. 그리고 어딘가 모르게 생기가 없는 딱딱한 표정.
얼핏 봐도 2M는 넘어 보이는 거구는 마치 엘프와 오크를 섞어 놓은 듯한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문제라면 아무리 봐도 나를 썩 달가워하는 눈치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뭐야... 무슨 일이지?"
"아... 그... 헌터분이신데, 무슨 실험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고..."
"... 헌터? 헌터면 인간인가?"
"그... 런것 같은데요? 한국어를 되게 잘하시는데... 한국인 아닐까요?”
"..."
이세계어로 말을 주고받던 두 사람의 시선이 내게로 향하고, 나는 멋쩍음에 잠시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어차피 뒤집어쓴 모자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는 않겠지만... 저렇게 이상한 사람 보듯 쳐다보니 괜히 찔리는 것이었다.
"... 뭐 됐다. 어서 너네들 말로 가라고 그래."
"아... 네. 그러면 어... 죄송하지만 우회해 주시겠어요? 실험 내용에 대해서 말하는 건 기밀이라 알려드리기는 좀..."
"..."
역시나 이렇게 되는 건가?
그런데 이대로 물러나기는 아쉬운데… 혹시 내가 이세계인이라는 걸 어필하면 뭔가 좀 달라지려나?
"실험을 하고 있다고 하길래… 무슨 실험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요."
"... 뭐야? 인간이 아니었나?"
"제 이름은 트레페 피그디오. 이세계출신의 엘프입니다.”
"..."
자연스럽게, 덩치를 향해 슬쩍 건네 보는 손.
살벌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남자는 잠시 고민에 빠진 듯 망설이더니, 이내 들고 있던 무기 한쪽을 내려놓고는 내 손을 잡았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정말 살짝 잡았음에도 장난 아니라는 게 느껴질 정도의 악력이었다.
"엘프라… 내 이름은 카랄 프릿즈 한센이다. 만나서 반갑군."
"..."
카랄 프릿즈 한센… 뭔가 느낌 있는 이름이네.
라고. 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손을 흔드는 것이었지만… 이 새끼, 왜 손을 안 놓는 거야?
"... 그. 이제 악수할 만큼 한 것 같은데..."
"아... 그렇군. 크흠... 그나저나 너, 혹시 나를 모르는 건가?"
"네? 어..."
"..."
뭐지? 꼭 알아야 되는 건가? 설마 이세계의 유명인... 뭐 그런 거야?
존나 당황스러워서 말도 안 나오는데, 내가 이러고 있으니 저쪽도 뻘쭘한 모양이었다.
"크흠... 아니다. 내가 부족한 탓이지. 그리고 미안하지만 실험에 관한 건 말해 줄 수 없다. 애초에 너 같은 아마추어는 모르는 게 약일 테니."
"..."
뭐야... 그러면 너는 뭐 된다는 거야?
이 새끼. 은근히 말 짧은 것도 그렇고 말투도 영 재수 없는데…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들이받으면 괜히 피곤해 질 것 같으니 그냥 참는 걸로 하자.
"뭐... 알겠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실험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씀대로 저 같은 놈이 알아서 뭐하겠습니까?"
"..."
살짝 비꼬자, 어딘가 언짢은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남자.
하지만 그 뿐이다. 그 역시도 더 이상 이렇다 할 말을 하지 않았고, 나 역시도 기분 나쁜 표정으로 뒤 돌아서던 그때였다.
"... 어이, 거기 너 소속이 어디지?"
"제가 소속을 밝히면 알려주면 뭐 하는지 가르쳐 주는 겁니까?"
"하아… 뭐, 좋다. 솔직히 나도 네놈의 소속은 별로 궁금하지 않아. 다만 이 말 만큼은 전하고 싶군."
"...?"
남자의 말에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춘 채 고개를 돌리고, 그는 내게 마치 조언이라도 하듯 말했다.
요즘 균열이 심상치 않으니 조심하라고 말이다.
***
곧장 차로 돌아온 나는 도대체 뭣 때문에 저렇게 사람이 많냐는 세 사람의 질문에 어떠한 실험 때문이라고 답했다.
물론, 그 뒤로 이어지는 무슨 실험이냐는 질문에는 답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 그래?"
"그래... 대답을 안 해주더라. 인상 사나운 덩치가 나 더러 갈길 가라는데 뭐 어쩌겠냐?"
"흐음... 도대체 무슨 실험을 하길래 그러는 거지? 혹시 두 사람은 뭔가 짐작 가는 거 있어요?"
"어...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근데 현님. 그 덩치라는 사란 혹시 길드 사람이었슴까?"
"..."
길드? 어... 아마도? 잘은 모르겠지만 느낌상 일반 헌터는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니 그 사람 좀 유명한 것 같던데... 혹시 얘네 둘은 알고 있나?
"근데 너네들 말이야… 혹시 칼랄 브릿즈 앙셍이라고 아냐?"
"칼랄 즈릿즈 앙샌...? 혹시 카랄 프릿즈 한센 말씀하니는 검까? 붉은 갑옷의 카랄 프릿츠 한센?"
"..."
어... 그거 맞는 것 같은데?
라고. 내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어떻게 카랄 프릿츠 한센을 모를 수 있냐는 두 사람의 호들갑이 운전하고 있는 나를 찔러 대기 시작한다.
"아니... 그 정도야 그 사람이? 엘피 너는 알고 있었어?"
"아니..."
"두 분 다 이상함다!! 그래도 인간 세상 오기 전에는 이세계에서 일 하신 거 아님까?"
"아... 그게... 그렇긴 한데 엘피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워낙 세상사에 관심이 없어서..."
라고. 나는 대충 핑계를 대며 여러가지 의미로 텐션이 올라간 두 사람을 진정 시키려 애써보지만... 시발 그 놈의 앙센인지 오랄인지 어지간히 유명한 모양이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조랑 라가도 언천 깡촌에 살았는데 그 정도는 암니다."
"... 그래?"
"그렇슴다!! 애초에 두분 도시 출시니지 않슴까?"
"..."
그... 랬나? 그런 설정이었던가?
워낙 예전에 했던 말이라 기억도 잘 안 나는데... 어찌 됐거나 나와 엘피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모른다는 말 뿐이었다.
"어떡게 이럴 수 있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라가?"
"그러게..."
"아니... 그래서 그 앙센이라는 놈이 누군데? 내가 아는 앙센은 아이언맨 1에 나오는 그 앙센밖에 없는데..."
"... 그건 앙센이 아니라 잉센이잖아."
"아이옹 맨? 그게 멈니까 현님?"
"..."
아니야 시발... 이상한 드립해서 미안해.
말 한마디 잘 못했다가 아주 그냥 차 안 분위기가 엉망진창이 됐는데... 어찌 됐거나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도대체 그 잉센이 뭐 하는 놈이야?
"잉센이 아니라 한센입니다 현님... 시르 드 마지 길드의 오른팔 칼랄 프릿즈 한센... 진짜 모르십니까?"
"..."
아... 맞다. 기억났어. 물론, 전혀 기억나지 않았지만 나는 일단 그렇게 말 해본다.
그런데 시르 드 마지라는 이름은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뭐더라?
- 확인 중… 시르 드 마지라는 길드는 들어 본 적이 없는 걸로 확인됩니다.
(… 그래?)
- 네, 다만 제가 알고 있는 정보를 알려드리자면… 시르 드 마지 길드는 이세계에서 알아주는 거대 길드 중 하나 입니다. 그리고 그런 길드의 오른팔이니 이세계에서도 한따까리 하는 놈이겠죠.
(그렇다는 건… 아까 봤던 그 실험이라는 게 보통 일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거네.)
별것도 아닌 일로 그런 대단한 사람이 직접 현장까지 행차할 일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시발…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저렇게 난리인 거지?)
- 글쎄요. 굳이 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정 찝찝하시다면 부장님에게 한 번 여쭤보는 걸 추천 드립니다.
"..."
그럴까? 확실히 알트가 말 한 것처럼 부장님 정도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데… 일단 지금은 그런 것 보다도 눈 앞에 있는 일에 집중해야 할 시간이었다.
"오케이... 알겠어. 알겠으니까 이제 잉센이고 한센병이고 집어 치우고 일이나 하자. 여기서 제일 가까운 4급 균열이 어디야?"
"어… 제일 가까운 규녈은 여기서 우회전 임다!”
"... 여기서? 아니… 여기는 우회전이 없는데?"
"아... 아! 더 가서 우회전임다.”
"..."
어이, 믿어도 되는 거지?
엘피는 영 시원치 않아서 자신 있다는 놈에게 맡겼거늘... 어째 불린도 느낌이 썩 시원치가 않은데?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라가에게 맡길 걸… 아니, 지금이라도 라가로 바꾸는 게 좋으려나?)
어째 풍경도 영 시원치 않은 것이 정녕 이 길이 맞나 싶은 생각만 드는데… 그 순간 우회전 하라는 불린의 말이, 동시에 코너를 틀자 한 차선을 통째로 가로 막고 있는 불길한 심연이 저 멀리서부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제가 말했지 않슴까! 저 지도 잘 봄니다 틴장님…!!!”
“알겠어. 알겠으니까 좀 가만히 있어? 응?”
그렇게 방방 뛰면 사고 난다고.
나는 불린을 진정시키며 별 생각 없이 균열을 피해 핸들을 꺾는 것이었지만… 그 순간 난생 처음 보는 이상한 광경이, 씨끄러운 두 엘프마저 일 순간 침묵하게 하는 기괴한 현상이 눈 앞에 펼쳐진다.
“뭐야… 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