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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19화. 술방


나는 술병과 미온이 따라준 컵을 번갈아 보다가 조금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가 안 됐다며 남의 채널에 와서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저, 저요? 아, 네.” 괜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바니걸 의상이 의자에 닿으며 살짝 말려 올라갔지만 최대한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할 수 있는 건 뭐가 있을까? “어…” 하얘진 머릿속을 감추려 마른 입술을 한 번 적시고 천천히 말을 골랐다. 수많은 주류 광고 모델들이 스쳐지나갔다. “이건요.” [이번에 나온 예쁜 패키지, 연말연초 다같이 모이는 자리에서 마시면 좋을 술! 여자들한테 인기 만점!] 얼타고 있는 순간 모니터 하단에 작은 자막이 하나 떠올랐다. 앞에서 스태프가 치는 속도 그대로. 능숙하게 그걸 본 칸쥬가 컵을 내려놓고 대신 병을 내 손에 쥐여줬다. 차가운 유리 감촉이 손바닥에 닿았다. 라벨이 생각보다 묵직했고, 손에 감기는 두께가 안정적이었다. 칸쥬가 웃으며 말했다. “패키지도 예쁘잖아.” 나는 병을 내려다봤다. 검은 바탕에 과하지 않은 로고, 반짝이지 않는 무광 질감. 카메라를 향해 병을 조금 들어 올렸다. 의식적으로 라벨이 정면으로 오게. “어…” 잠깐 숨을 고르고. “이게, 디자인이 되게 깔끔해요.” 손가락이 병목을 따라 자연스럽게 미끄러졌다. 라벨 가장자리를 짚는 동작이 괜히 또렷하게 잡혔다. “집에 두고 마셔도 부담 없는 느낌?” 괜히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선물로 받아도, ‘아 이거 괜찮다’ 싶은.” 옆에서 미온이 맞장구를 쳤다. 나는 민망해서 웃으면서도 병을 다시 한 번 천천히 돌렸다. 반대편에선 칸쥬가 그 병을 받으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자, 광고주님~ 그리고 형님들 보셨죠? 그런 술입니다. 앞으로 많은 구매 부탁드리구요! 우리 먼저 식전주로 한 잔~” “밑장 빼기 없기~” 으레 눈치껏 신입 밀어주기로 빠져있던 하루비가 웃으면서 먼저 컵을 들었다. “그럼, 짠~” 모두의 건배와 함께 잔을 입술에 가져가자 유리 가장자리가 차갑게 닿았다. “…응.” 첫 모금. 이 몸으로 처음 맛보는 술이었다. 방송으로 협찬이 들어와도 좋은 건 좋은 건가, 허울뿐만이 아니라 부드러운 맛에 은근히 놀라 숨이 잠깐 늦어졌다. “어때요?” 입 안에 남은 새 엄지를 치켜 들던 사이, 잔에 남아 있던 마지막 한 방울이 미처 입술에 닿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졌다. “…아.” 나도 모르게 모아진 다리였다. 하지만 그 전에 시야를 가득 메우는 살덩이를 따라 자그마한 술방울은 그대로 살결을 타고 내려가 끝점으로 떨어졌다. 간신히 유두를 가리고 있는 검은색 옷감이 살짝 젖을 만큼. "아앗...!" 순간 그대로 문지를 뻔 했지만, 방송 중에 지금 그런 짓을 했다간 참아냈다. “왜?” 옆에서 하루비가 물었다. 그때 쵸비가 아무 말 없이 휴지를 하나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나는 그걸 받아 눌러주듯이 톡톡, 아주 조심스럽게 가져갔다. — 대가리를없애도록: 폭유는다르네 — 내성생긴박테리아: ㅋㅋ후~~ “어우, 맛집.” 말과는 달리 대부분 의상 탓인지 식사보다는 PPL인 술을 마시는 시간에 가까웠다. “무릎에 앉아서 귀에다가 ASMR 톤으로 섹드립 속삭이기.” 전에 하던 랜덤 질문은 거진 미션으로 변해서 시청자들을 대신해 칸쥬를 향해 진행되었다. 하루비는 칸쥬가 앉아 있는 의자 위로 슬쩍, 스커트를 펄럭이며 앉고서 속삭였다. “나랑은 하루에 몇 번이나 할 수 있겠어?” “—이야, 대루비.” 칸쥬는 웃음을 터트리며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댓글들을 보며, “텅텅 빌 때까지 쌉가능.” 그들의 욕망을 대신 표현해주기도 했다. “상대 얼굴 보면서 ‘꼴리게 말해줘’라고 3회 반복” 이건 쵸비 특유의 투명한 도발이었다. 쵸비는 그의 뒤로 가 어깨에 턱 올리고, 허리를 구부려 칸쥬 쪽으로 기대어선 낮고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꼴리게 말해줘.” “꼴리게… 말하라고.” “진짜, 존나 꼴리게.” 칸쥬는 반응 없이 굴려했지만 입꼬리가 의지를 포기할 정도였다. 술이 한 잔, 두 잔 더 들어갈 때마다 천에 스며든 차가움이 서서히 안쪽으로 퍼졌다. 시원한 감각이 생각보다 오래 남아 숨이 조금씩 흐트러졌다. ----------------------------------------------------- [자극 동기 감지] 외부 암컷 개체에 의한 경쟁심 발생 유인 반응 감도 +6% ※ 개체는 주도권 확보를 희망 중입니다. ----------------------------------------------------- “손 잡고 ‘여기 만지면 어떻게 돼요?’ 묻기” 다음 대상자인 미온은, 내가 봐도... 이미 야하지 않아도 야하다. 미온은 살짝 얼굴 붉히면서 칸쥬의 손을 살짝 잡았다. 그녀는 그 손을 그의 허벅지 위로 올린 뒤 고개를 숙여 말했다. “…여기, 만지면 어떻게 되죠?” 몹시도 나긋한 미온의 목소리에 칸쥬는 잠깐 말을 잃은 듯했다. 그는 자신의 손이 허벅지 위에 놓인 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멈춰 있었다. 그걸 뗐다가는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아~! 씨발, 미온! 미쳤나봐, 진짜.” 칸쥬가 결국 웃음을 흘렸다. “이러면 나라 망합니다, 여러분. 예.” 웃음이 터졌지만 그건 풀린 웃음이 아니었다. 술이 한 잔 더 돌았다. 잔이 부딪히는 소리는 가벼웠는데 그 뒤에 남는 정적은 이상하게 길었다. 나는 컵을 입술에 대고 한 모금만 마셨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감각보다 방금 전 장면이 머릿속에 더 오래 남아 있었다. — 목표는누구: 다음 누구냐 — wkmskw1: 은하ㄱ — 살라하트: 대체 전생에 지구를 몇번구한거냐 칸쥬ㅅㄲ 이미 지금의 칸쥬는 더 이상 ‘한 사람’이 아니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움직이지 않아도 그가 앉아 있는 그 자리 자체가 조명과 시선이 모이는 무대가 되어 있었다. 카메라는 그를 중심으로 잡고 있었고, 여자들은 그 프레임 안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반응을 흘리고 있었다. '...내 차례야.' “저는... 상대방 귓볼 핥기.” 술기운은 갑자기 몰려오지 않았다. 조금씩, 숨 사이로 스며들었다. 머리는 아직 또렷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알고 있었고, 지금이 방송이라는 것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스트리머들한테 라이벌 의식까지 느끼는 순간 몸은 자꾸 한 박자 늦게 따라왔다. 칸쥬가 팔꿈치를 소파 위에 걸치자 나는 그걸 의식하지 않으려다 오히려 그 팔을 타고 기어오르듯 굴었다. 그의 팔이 내 가슴 사이에 끼워져선 가려질만큼. 가슴골 사이에 끼워진 팔의 온기가 옷 너머로 분명하게 느껴졌다. 대신 숨이 조금 얕아지며 시선이 그의 귀 쪽으로 흘렀다. 약간은 기대에 차 보이는 옆선에 술기운 때문이라고 스스로에게 변명할 틈조차 없이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핥짝— “으, 으아아아—!” 칸쥬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리더니 끝내 웃음을 터트렸다. “야, 야… 잠깐만.” 그는 고개를 살짝 젖힌 채 숨을 고르며 말했다. “와… 은하 님.” 그리고 모니터 쪽을 힐끗 보며 마치 시청자들에게 공유하듯 웃었다. “이 분, 생각보다 위험해요. 좀 고양이혀?인 것 같기도...” 그가 소감을 막하며 웃는 사이 나는 그 웃음에 제대로 힘이 빠졌다. 몸이 갑자기 가벼워진 것처럼, 아니. 반대로 너무 무거워진 것처럼. 술기운이 그제야 한꺼번에 올라왔다. “응…?” 중심을 잡으려 했는데 발보다 먼저 몸이 기울었다. 풀썩. 그렇게 그의 쪽으로 그대로 무너졌다. 기대던 칸쥬의 팔을 넘어선 흘러내려 가슴께에, 어깨에. 어디까지가 그의 몸이고 어디부터가 소파인지 구분이 잘 안 됐다. “어어, 잠깐—” 그가 당황해 손을 뻗었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그의 품에 안기듯 고개를 떨궜다. “은하 님?” 대답 대신 짧은 숨이 새어 나왔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소음은 여전히 있었는데, 그게 점점 멀어지는 느낌. 채팅이 떠들고 하루비가 “어머?” 하고 웃는 소리. 누군가 “괜찮아?”라고 묻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이미 반쯤 다른 쪽으로 가 있었다. 칸쥬는 잠깐 멈칫하다가 결국 체념한 듯 웃었다. 그는 한 손으로 내 어깨를 받치고 다른 손으로는 카메라를 향해 말했다. “형님들, 이거 제가 억지로 먹인 거 아닙니다. 귀에 마약 아니고요. 우리 지금 여럿이에요.” — 원룩이혀니: ㅋㅋㅋㅋㅋㅋㅋㅋ — 대은하탐방: ㅋㅋㅋㅋㅋㅋ은하술찔이임? — 엔딩요정쵸비짱: 주량 체크안했나 그의 웃음소리가 귀 옆에서 낮게 울렸다. “은하 님, 오늘 너무 열심히 하셨어요.” 그 말이 마지막으로 또렷하게 들렸다. ...그 다음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조명이 그대로인데도 밤처럼 느껴지는 순간. 무대는 계속 돌아가고 있었고, 나는 잠깐 그 중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건 천장이 보인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다음은 소리. 방송 때와는 전혀 다른, 웃음이 낮고 길게 늘어지는 소리. 컵이 어딘가에 닿는 둔한 소리. “…으응…” 나도 모르게 인상을 쓰며 숨을 골랐다. 머리가 띵했다. 눈을 제대로 뜨기까지 한 박자 더 걸렸다. '촬영, 촬영은 끝났나.' 퍼뜩 생각이 스치고 둘러본 주변엔 스태프나 조명들은 없었고 1인 소파에 칸쥬가 기대 앉아 있었다. '끝... 인가보네.' 내가 제대로 된 역할을 했던가, 그런 생각을 하던 중 스며들듯 들리는 높은 톤의 목소리. “…재밌잖아, 하고 싶으면 하라니까?” 옆엔 그에게 쵸비가 먼저 팔을 걸치고 있었고 미온은 반쯤 몸을 기댄 채 잔을 들고 있었다. 하루비는 거의 안긴 상태로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아선, 멍하니 그걸 바라보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어, 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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