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3화. 메인 퀘스트
눈을 떴다.
정확히 말하면, 이제야 제정신을 차렸다.
기절하듯 쓰러진 건 알겠지만 분명 잠깐 눈을 감았을 뿐인데 시계는 이미 네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몸은 그대로였다.
꿈이 아니었다.
가슴 위의 무게감은 사라지지 않았고,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미묘하게 균형이 어긋났다.
그보다도 명확한 건 하얗게 남은… 다리 사이의 액.
“……하.”
짧게 숨을 뱉었다.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차가운 감촉이 아니라 부드럽고 낯선 피부가 손바닥에 닿았다.
거울은 더 이상 보지 않았다.
…아까 이미 충분히 봤다.
눈앞에 상태창은 떠 있지 않았다.
그게 더 불안했다.
사라진 건지, 아니면 기다리고 있는 건지.
나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으응….”
어정쩡히 다리를 오므리고 선 채 귓가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낮게 말하려고 했는데도, 자연스럽게 흘렀다.
그리고 꺼진 모니터 속에 보이는 여자의 실루엣.
'……창 언제 떠.'
어딘가에서 다시 무언가가 깜빡일까봐 두리번거리다 언뜻 시선에 걸린, 침대 아래 굴러 떨어진 무언가를 집어들었다.
얇은 천.
새하얀 브라와 팬티.
"...이건 어디서 난 거야?"
나는 속옷을 앞에 들고 한참을 바라보다가 결국엔 입었다.
아무것도 안 입고 있는 것보다 나았다.
하필이면 이게... 안정감처럼 느껴진다는 게 싫었다.
분명히 지금의 몸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들이었으니.
[ ※ 안내: 전환체는 기존 의복 착용 시 피로도가 증가할 수 있습니다. 권장 의복 착용 시 감각 보정 효과가 활성화됩니다. ]
띠링—
드디어 띄워진 상태창.
...빨리도 알려준다.
“…피로도?”
나는 자연스럽게 지금 입고 있던 속옷을 내려다봤다.
확실히 아까부터 어딘가 쳐지는 맨살보단... 움직일 때마다 미묘하게 당기고, 균형도 잘 안 맞고.
“그러니까… 이게 더 낫다는 거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모니터 앞을 바라봤다.
당연하게도 여전히 꺼려졌지만 아까만큼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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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 보정 적용]
- 불필요한 자극 감소
- 신체 인식 안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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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짧은 탄성이 나왔다.
점점 익숙해지니 아까까지는 가만히 있어도 신경 쓰이던 감각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난 느낌.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이 몸을 받쳐주는 브라와 팬티 하나 입었다고 통제 가능 범위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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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 퀘스트 보너스]
신체 적응도 +3%
[메인 퀘스트 진행 중]
남은 기간: 29일 19시간 28분 17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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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이 천천히 접혔다.
“결국은… 방송이네.”
방금까지 두루마리 휴지로 다리 사이의 애액을 닦던 손이 마우스를 툭, 건드렸다.
바닥으로 떨어질 뻔한 마우스를 잡은 손끝이 잠깐 떨렸다.
한참 만에 컴퓨터를 켜니 부팅음조차 낯설게 들렸다.
“…후우.”
짧은 숨을 뱉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딱 한 번, 가볍게 삐걱거리는 소리.
익숙한 소리인데 그 앞 화면 속엔 여자 하나가 있었다.
나는 그저 입술을 한 번 다물고,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그래. 이제는 좀 봐줄 만하네.”
화장은커녕 머리도 제대로 손질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화면에 비친 모습은 나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좋았다.
빛이 닿은 머리칼, 자연스럽게 벌어진 입술, 그리고 위로 올라온 가슴선.
딱 ‘그런 여캠’의 외형.
“…아무리 봐도, 이거 미끼잖아.”
누가 봐도 남자들이 좋아할 얼굴.
뭘 하지 않아도 들어올 수 있는 외형.
[캠 연결됨]
방송 관리 페이지.
스트림 키.
‘방송 시작’ 버튼.
딱 거기까지 가서 멈췄다.
‘미친 거지, 내가.’
이 몸으로 방송을 켠다고?
카메라를 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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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퀘스트 진행 중]
권장 환경: 실시간 반응 기반 플랫폼
권장 활동: 방송 스트리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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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장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혼잣말을 하면서도 시선은 버튼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만약 이게 진짜라면.
만약 이게 꿈이 아니라면.
그리고 만약, 이 말도 안 되는 조건을 피할 수 없다면.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도망칠 데가 없었다.
방송 말고는.
의자를 끌어당겨 앉아선 뒤에 걸어던 후드티를 집어 들었다.
이 몸에는 몇 치수 정도 더 큰 후드티.
괜히 몸선을 가리고 싶어서.
그게 지금은 위안이었다.
켜져있던 카메라는 끄고, 마이크만 켰다.
...방송에는 최소한의 목소리만.
손가락이 마우스 위에서 잠깐 떨렸다.
“……시작하면, 끝까지 가야 한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클릭.
방송이 시작됐다.
익숙한 알림음.
하지만 오늘은 심장이 같이 울렸다.
시청자 수: 0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어… 안녕하세요.”
말이 조금 흔들렸다.
아무도 안 보는 하꼬주제에 평소랄게 있냐만은 평소보단 훨씬 더.
“그냥… 오늘도 방송 켰습니다.”
몇 초.
아무 반응도 없었다.
역시라는 생각이 들 무렵 숫자가 움직였다.
0 → 1
눈이 먼저 갔다.
“아.”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반응이 먼저 나왔다.
채팅이 올라왔다.
— 여캠만보는육수 : 신입 여캠임?
이상하게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어… 그게…”
핑계를 찾으려다 말이 막혔다.
그 때, 시야 한쪽에 작은 창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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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연동 감지]
리액션 민감도: 활성 감각 연동
반응: 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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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타이밍에?’
손에 땀이 찼다.
“마이크 설정 좀 만지고 있어서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가 만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채팅이 하나 더 올라왔다.
— 여캠만보는육수 : 목소리 괜찮은데?
괜찮다.
그 말 하나에 이상하게도 가슴 안쪽이 간질거렸다.
내가 숨을 쉬고 있지 않은지도 모를 정도로.
"푸하…."
그러자 상태창이 조용히 반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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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평가 반영]
감각 반응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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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읏…!"
그곳에 눈길이 가자마자 방송을 켠 지 얼마나 됐다고, 나는 한 가지의 생각에 패닉적으로 방송 종료를 눌러버렸다.
아니, 닫고 싶어서 닫았다.
끝까지라는 말이 무색하게 심장이 아직도 제 속도를 못 찾고 있었다.
'미친 놈...'
귀 안쪽이 멍했고 멘탈이 흔들렸다.
…방송만 2년 했다는 놈이 이건 아닌데, 아!
신입 여캠임?
목소리 괜찮은데?
눈을 감아도 그 채팅들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자신의 정의는 앞으로 이래야 한다는 걸 깨달아버린 것만 같았다.
'여캠.'
하지만 계정 꼬라지 좀 봐라.
닉네임, 프로필 사진, 예전 방송 기록.
전부 ‘나’였던 흔적이었다.
그걸 이 몸으로 이어간다?
아무도 모른다 할 지 언정 상상만 해도 속이 뒤틀렸다.
“안 돼...”
단호하게 중얼거렸다.
이건 도망이 아니라 최소한의 정리였다.
나는 놀란 마음을 추스린 후 브라우저를 다시 열었다.
플랫폼 메인 페이지.
우측 상단의 버튼이 눈에 들어왔다.
[회원가입]
클릭.
이메일 입력창 앞에서 손이 멈췄다.
기존 메일 주소는 이미 계정과 엮여 있었다.
잠깐 고민하다가 새 메일을 하나 만들었다.
이름은 아무렇게나.
숫자도 적당히 섞고, 의미 없는 조합.
‘이제부터는… 별개다.’
가입 절차는 금방 끝났다.
인증 메일을 확인하니 프로필 설정 화면이 떴다.
닉네임 입력|
커서가 깜빡였다.
“…….”
뭘로 하지?
원래 쓰던 닉은 바로 지웠다.
그건 더 이상 맞지 않았다.
거기에 너무 튀는 것도 싫고, 너무 평범한 것도 싫었다.
잠깐 고민하다가 아무 의미 없는 단어를 쳤다.
[임시닉네임_001]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 정도가 내 복잡한 심경의 최선이었다.
이어 프로필 사진은?
기본 아이콘으로 두려다 손이 멈췄다.
‘이 계정은… 어떻게 쓸 건데.’
방송.
그것도 여캠 방송이다.
아직 준비할 게 많은가 싶어, 목소리도 최대한 드러내지 않는 쪽으로.
설정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카메라: 비활성
채팅: 활성
알림음: 최소
추천 노출: 기본
마치 전쟁 준비라도 하듯 쓸데없이 꼼꼼해졌다.
설정을 마치자 마지막으로 남은 건 하나였다.
[방송 시작]
이번엔 바로 누르지 않았다.
의자에 등을 붙이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새 계정이니까… 괜찮아.”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듣지 않는데도 나는 설득하듯 중얼거렸다.
‘어차피, 원래 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
그 순간 시야 가장자리에 작은 문구가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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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기록 갱신]
- 기존 정체성 단절
- 신규 관찰 환경 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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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걸 일부러 읽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무슨 의미인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클릭.
방송이 시작됐다.
닉네임 옆에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아이콘 하나.
시청자 수: 0
이번에는 이상하게도 그 숫자가 조금 덜 아팠다.
“어… 안녕하세요.”
말투를 더 낮췄다.
조심스럽게, 평소보다 더 무난하게.
“신규 계정이고요. 그냥… 게임 좀 하려고요.”
채팅은 없었다.
몇 초.
몇십 초.
역시, 라는 생각이 들 즈음 숫자가 움직였다.
0 → 1
심장이 반사적으로 뛰었다.
‘침착하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게임을 시작했다.
이번에도 뉴비 도전기.
잘하는 건 아니었지만 전에 할 때보다는 덜 긴장했다.
그 때 채팅이 올라왔다.
— 흑우받아라 : 뉴비?
손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아, 네. 맞아요.”
짧게 대답했다.
괜히 말을 늘리면 뭔가 더 반응할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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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평가 반영]
리액션 민감도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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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이 계정이든 저 계정이든 방송을 켜는 순간 조건은 같았다.
나는 모니터를 바라보며 천천히 깨달았다.
계정을 바꾼다고 판이 바뀌는 건 아니라는 걸.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방송의 시청자 수는 조금씩 늘고 있었다.
1 → 2
아직은, 아직은 괜찮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게임 화면에 집중했다.
방송을 켠 지 삼십 분쯤 지났을 때였다.
게임은 여전히 못했다.
뉴비 도전기라는 명목이 무색하게 같은 구간에서 세 번이나 막혔다.
그런데도 숫자는 줄지 않았다.
시청자 수: 17 → 19 → 21
‘왜?’
이해가 안 됐다.
재미도 없고 실력도 없고, 리액션도 일부러 줄이고 있었는데.
채팅이 하나 올라왔다.
— 오늘유입 : 소리만 듣고 있는데 괜찮네
다음 채팅.
— asdfg12 : 카메라는 안 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