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9화 스물한 번째 이야기 - 연연불망(戀戀不忘) (115)
529.
살면서 석진 씨가 이런 표정을 짓는 것을 본 적이 있었을까?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시선엔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이 섞여서...
마치 덜덜 떠는 듯한 모습으로....
입술마저 살짝 틀어진 상태로....
가만있지를 못했다.
언제나...
침착하고....
언제나 차분한 모습으로....
단정하고 고요한 가운데 미소마저 보여주던...
여유만만함으로 바라보던 석진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하긴....
말을 꺼내기 전에 나도 짐작은 했었다.
세상의 어떤 날카로운 비수도....
이것보다 날카로울 수 없다는 것을.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정말 몰랐다.
인간은 역시 보지 못한 것은....
상상할 수 없는 법이니까....
끝내 말을 이어가지 못하는 그의 모습에...
뚝뚝 피고름이 흘러내리는 듯한....
석진 씨의 음성에...
내 심장이 오히려 무너지는 듯 싶었다.
빨리....
끝내자.....
그게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나을 테니까.
난 재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 사실... 궁금했어요. 당신 같이 완벽한 사람이 왜... 왜 나 같은 사람을 선택했을까? 아니... 애초 석진 씨... 당신 같은 사람이 왜... 혼자였을까? 당연히... 나 말고도... 훨씬 더 좋은 여자가 진작... 당신과 결혼할 기회가 있었을 텐데.... 왜.... 나 같은 사람에게 기회가 왔을까.... 알 수 없었어요. "
" ..... "
숨을 몰아쉬며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석진 씨를 보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하긴...
그의 말을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 잠시는.... 나를 구원해줄 그런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어요. 무슨 동화 속.. 왕자님처럼.... 백마를 탄 왕자님처럼 나타난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긴 해요. "
사실이었다.
반은 체념했던 나인데....
우태 오빠를 버리고....
끊어내고 다시는 남자를 만나지는 못할 거라....
생각했던 나에게 석진 씨는....
잠시 동안 정말 왕자님이었다.
" 그런데.... 한편으로 안심하기도 했어요. 당신이 어쩌면.... 숨겨진 여자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하게 되면서....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죠. 집에는 말하지 못하는 연인이 있었고... 그걸 가리는 상대로 날 선택했을지도 모르겠다. 아! 이건 결혼했을 때 한 생각은 아니었어요. 우연찮게.... 당신의 옷을 정리하면서 맡았던 화장품 냄새 때문에... 하게 된 망상이었어요. "
" 화..화장품? "
" 훗... 아마도 그때... 석진 씨... 회사일이 너무 바빠서 정신없었던 시기 였을 거에요. 스트레스도 많이 받던 시기였고... 집에 잘 들어오지 못하고 야근도 계속 잦았던... 아마 그래서... 당신도 꼼꼼하게 챙기지 못했던 거겠죠. 미리 사과할께요. 미안해요. 당신이....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불안했을지도 몰라요. 갑자기... 당신에게서 여자 화장품 향기가 나다니... 조금 놀라긴 했거든요. "
내 목소리는 나름 밝게 내었는데도....
석진의 얼굴은 차갑고 어두웠다.
" 그래서.... 민희씨.... 날... 미행했어? "
난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석진은 뒷걸음질 치고는....
창문에 등을 맞댄 뒤 멈춰 섰다.
그리곤 연신 숨을 내쉬었다.
결혼 생활 속에서 행복을 느꼈다면 그건 아니었다.
집에서 탈출하고 새로운 가정에서 누군가와 함께 하는 생활 속에서....
난 또 다른 연극을 시작한 셈이었다.
그래도....
집에서 말라버리는 것보단....
조금이라도 따듯한 사람과의 삶이 나을 거라 생각해서 내린 결단이었다.
그런데 그것 또한 쉬운 건 아니었다.
남과 사는 삶이....
단순히 호감만 가지고 평생의 반려자로 삼을 수 있을 거란....
내 오만함에 치러야 할 대가에 대해선....
눈을 감고 귀를 막는 것으론 결국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결혼은 단순히 두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왜 가족과 가족들 간의 결합이라는 말이 있었는지....
새삼 깨닫게 되면서....
이미 오래전부터 금이 가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거기에다가....
갑자기 찾아왔던....
나래가 한 말....
나래가 마지막으로 찾아와서 했던 그 말들이....
나를 깨웠다.
" 어차피 한번 밖에 없는 인생이잖아. 후회하지 않는 선택을 하길 바래. 우태 선배는.... 너 밖에 없어. 애초... 너 밖에 없었어. 대학 시절부터... 그리고... "
쓸씁하게 웃으며 덧붙이던....
나래의 얼굴이...
그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했다.
" 지금까지도. "
난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여전히 석진 씨는 시선을 바닥에 둔 채 숨을 몰아쉬는 중이었다.
숨을 가늘게 쉬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입술을 뗐다.
그 사이 약간 말라버린 입술에서 쩍...
하는 느낌이 들었다.
"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난 정말... 그것 때문에 이혼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을 안 뒤에도 한번도... 석진 씨에게 불쾌한 감정을 가지진 않았어요. 아까 말했던 것처럼 좀... 놀라긴 했지만.... "
" 놀랐다고? 고작... 놀라기만 했다는 건가? 1408호... 당신... 그 안에 들어가서... 다 본 것 아니야? "
석진의 얼굴에 갑자기 분노의 감정이 떠올랐다.
남자의 화난 얼굴.
그것을 석진에게서 볼 줄은....
생각 못했다.
그 순간...
하필 왜....
부엌 한편에 있는....
칼들이 꽂혀 있는 꽂이 함을 봤는지 모르겠다.
보지 못했다고 해야 할까?
원룸에 들어가지는 않았다고...
말해야 할까?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들이 휘몰아졌다.
하지만....
괜한 거짓말이 더욱 큰 스노우볼을....
만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1408호....
원룸의 비밀번호가 너무 쉬웠으니까.
평소 석진 씨가 쓰던 번호였기에....
내가 안 들어갔다고 할 수준이 아니었다.
초인종을 누르고 누군가가 나왔다면....
아니....
이미 거기서 여장을 하고 나온 석진 씨를 보면서....
아니 애초 그녀가 석진인지 아닌지도 몰랐다.
다만 여자가 나왔다면 그 안에 석진이 있었을 테니까....
그와 얘기해야겠다 생각하고 무작정 초인종을 눌렀을 뿐이었다.
아무리 눌러도....
반응 없는 방안을 보면서....
오기 같은 마음으로 원룸 도어락 번호를 눌렀고....
그렇게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간 뒤....
나를 맞이했던 방 안의 모습에....
까무러칠 듯한 혼란과 경악은....
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힐 수 밖에 없었다.
그 뒤 한동안....
정말 석진 씨를 마주하면서....
움찔하는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솔직하게 말하는 건....
그를 두 번 죽이는 행위일 것이다.
그리고....
정말 내가 혐오할 만한 일을 했다면....
이렇게 말을 고르고 골라서 하지 않았겠지.
그도 그런 이중생활을 할 정도의 사정이 있었을 것이고...
양쪽으로 나눠진 이중생활을 하면서....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대한 차분히 가라앉는 목소리로....
석진 씨를 달래듯 말을 받았다.
" 석진 씨도 알고 있잖아요. 나도... 석진 씨에게 말하지 못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당신과 마찬가지라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난... 하아... 난 이제 남들을 의식하는 그런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다는 얘기를 하는 거에요. 처음엔... 정말 석진 씨 당신과 남들처럼... 평범한 그런 시간을 만들어갈 수 있다 생각했어요. 남들도 다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사는 건 아닐 테니까... 그냥 살다 보면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또 그렇게 의지하면서 살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그렇지 않았어요. 물론 석진 씨... 당신은 정말 잘해줬어요. 당신이 아니었으면 난 미쳐버렸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무슨.... 나쁜 일을 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것만으로... 당신과 계속 이렇게 살 순 없어요. 이미... 알아 버렸는걸요.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싶어요. "
마침내...
말했다.
그리고 말하면서 더욱...
마음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아...
그래....
이젠 그렇게 살고 싶어.
정말....
석진은 어깨가 들썩거릴 정도로....
숨을 크게 몰아쉬면서 내뱉듯 말했다.
" 선배라는 사람과 연애하고 싶다면.. 계속 연애해요. 하지만 그 감정... 그 감정이 영원이 계속 되진 않아요. 막상... 해보면... 그게 계속 되진 않을 거에요. 그러니.... "
또 어긋나는 느낌.
난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 설사... 석진 씨 말대로 사랑하는 감정이 계속 안 될 수 있겠죠. 하지만... 그런 결과가 온다고 해도... 괜찮아요. 그것도... 그런 미래가 있다면 마땅히 내가 감당할 일이니까. 하지만 석진 씨와의 결혼 생활을 계속 이어가면서 그런 길을 걷고 싶지는 않아요. 당신도 당신의 생을 살아가길 바래요. 나는... 더 이상 신의 방패로 있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 나를 놔주세요. 이혼해주세요. "
간곡하게 말하면서도 머릿속에선 다른 생각을 했다.
과연....
우태 선배와 다시 시작하고....
그 뒤 헤어지는 미래가 있을까?
말하면서도 그런 미래는 잘 그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미래가 있더라도....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아니...
그런 미래는 없으리라 확신했다.
나중에 헤어지리라 생각하면서...
사랑을 시작하는 연인 같은 게...
이 세상에 있을 리 없으니까.
나도...
그 말에 크게 동감하고 있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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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라는 시간은 묘한 법이었다.
어둠이라는 장막이 아무리....
문명의 빛에 의해 약해졌다고 해도...
시간이 깊어지면 하나씩 꺼져 버리면서....
언제나 점점 그 세력을 넓혔다.
어둠만 짙어지는 것이 아니다.
창문 밖 풍경이 점점 더 어둠 속에 잠겨가면서....
정적 또한 함께 깊어졌다.
낮에는 온갖 소리들이 생생하게 들려오던 주변도....
밤이 깊어지면 하나둘 사라지면서 조용해졌다.
특히나 이 동네는 더더욱 그랬다.
다른 동네는 배달 오토바이 소리가 밤새....
끊임없이 들린다고 하는데....
이곳 주민 평균 연령층이 높아서 그런지....
낮 시간대에도 배달시키는 사람이 없어서....
언제나 조용했다.
특히 밤에는 사람 걸어 다니는 소리조차 거의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반은 죽은 거리처럼 느껴졌다.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
정말 죽어가는 도시의 대표적인 표본처럼도 느껴지긴 했다.
그래서....
더욱 밤이 오면 시간의 흐름이 느리게 느껴졌다.
거기에다가...
대충 소독하고 약을 발랐던 손바닥도...
어느새 욱씬욱씬 거리며 우태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통증이 밀려올 때마다 붙여놓은 밴드를 엄지손가락으로 쓱쓱 문대며....
아픔을 억눌러 보지만 금방 다시 통증이 올라오는 바람에...
눈살을 절로 찌푸렸다.
핀셋으로 꺼낸 사기 조각이 크긴 했었다.
하필이면 깨지면서 제일 큰 조각이 깊숙이 박힌 모양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게 안에서 조각나지 않은 것이었는데....
지금은 그것이 맞는지 아닌지도....
잘 구별되지 않았다.
빨리 뽑아버리고는....
대충 밴드로 마무리 지은 터라...
안에 작은 조각이 남아 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긴 했다.
하지만 역시나....
엄지손가락으로 꾹꾹 상처 부위를 누를 때마다...
그런 이물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 봐선....
상상하는 불상사가 벌어지지 않는 듯 싶었다.
그게...
자기 위로인지는...
잘 구별되지는 않지만.
다시 한 번....
엄지손가락으로 눌러서 통증을 가라앉히고는....
티비라도 켜놓을까 생각하는데....
그 순간 갑자기 띵동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완전히 조용한 실내에 생각지도 못한 초인종 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우태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서 시계를 보는데....
새벽 2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하필....
인터폰은 화면이 고장 나서....
먹통인 상태.
그래서 초인종을 누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다시 띵동띵동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멈춰 있던 뇌가 활동을 시작한 듯 무언가 번쩍 떠올랐다.
그리고....
설마 하는 생각에 벌떡 일어나서는 현관문으로 빠르게 향했다.
차가운 금속 손잡이를 잡고....
돌리며 급하게 문을 여는데....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