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5화 스물한 번째 이야기 - 연연불망(戀戀不忘) (111)
525.
" 나도 한잔 할래. "
순간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민희였다.
언제 왔는지 주희 씨를 지나서 내 옆에 온 민희에 나도...
언니인 주희 씨도 동시에 바라보았다.
" 어머... 잔이 없네...? 잠시만 기다려? 후딱 가져올께? "
나와 주희의 시선에 빙긋 웃고는...
말 그대로 후다닥 주방으로 가서 잔을 가져오는 민희.
" 엄마는? "
민희가 앉자마자 바로 주희씨의 질문이 튀어나왔다.
" 엄만 좀 쉰다고 방에 들어가셨어. 언니가 한번 가볼래? "
대답과 함께 슬쩍 떠넘기는 민희의 솜씨에 조금은 감탄을 하고 있는데....
정작 그 당사자는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아랫입술을 깨무는 듯한 모습과 함께...
바로 가늘어지는 눈이 조금은 날카롭게 느껴지는데....
툭 튀어나오는 한숨과 함께 짧은 답이 돌아왔다.
" 하... 알았다. "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싱글거리는 민희.
" 고마워, 언니. "
" 으휴.... "
바로 일어서는 주희씨는 눈을 살짝 홀기곤 자리를 떴다.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민희가 잔에 혼자 소주를 채우곤 들이켰다.
" 크... 시원하다. "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잔을 내려놓는 민희에 난 피식 웃었다.
" 너.... 술꾼... 다됐다? "
" 훗... 오빠 덕분에 배운 술이잖아. 다 오빠 때문이야. "
" 그래...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 "
" 풋... 잘못했다는 말이 아니었는데? 오히려 고맙다는 말이었어. "
민희는 미소 지으며 또다시 자신의 잔을 채웠다.
그리곤 내 잔이 빈 것을 보고....
또로록....
잔을 채워주었다.
" 언니가 뭐래? 무슨 말 했어? "
" 아니야. 아! 첫째 언니.... 내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나 봐. 하긴... 한번인가 봤는데 기억하긴 좀 어렵긴 하더라. "
이건 언니뿐만 아니라 나를 위한 변명이기도 했다.
" 훗... 서운했어? "
" 서운하긴... 당연한 것을. 아! 둘째 언니는 내 이름 기억하더라? 나... 깜짝 놀랬잖아. "
" 하하... 원래 다희 언니가 좀 기억력이 좋아. 언니 기억력에 나도 그렇지만 가족 모두 깜짝 놀라고 그래. "
" 그렇구나... "
" 훗... 오빤 울 언니들... 이름... 기억해? "
" 하하... 난 전혀 못했어. 그러고 보니 남동생 이름은 뭐였지? "
" 훗... 종석이... 서.종.석... "
" 아.. 종석이었구나... 완전... 컸더라. 옛날보다... 더 늠름하달까? 그땐 진짜... 그냥 학생 같았는데. "
" 피이.. 원래 종석이는 늠름했는걸? 군인도 갔다 와서 더 의젓해졌지. 훗.... "
" 군대도 갔다 왔구나... "
아...
다시 느껴지는 세월의 무상함...
하긴 남자는 군대 갔다 오면 삭는 느낌이긴 했다.
군대 짬밥이 문제인지...
그 시간이 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남자 연예인 꽃미남들도 군대 갔다 온 뒤 모습이 변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었으니....
확실히 무언가 있는 건 맞는 듯 싶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군대 갔다 왔는데 그 용모 그 모습 그대로 있는 경우도 있었으니....
신기하기도 했다.
아무튼.....
막내 동생도 군대까지 갔다 왔다니....
생각이 더욱 복잡해졌다.
" 오빠.... "
" 응? "
" 오빠 왜... 국화꽃 올렸어? "
팔짱을 끼고 탁자에 기대서는....
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인 민희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 그냥.. 그래야 할 거 같아서. "
난 소리 없이 웃으며 답했다.
" 피이.... "
순간 민희의 입술이 삐죽거렸다.
눈동자는 반짝거리며 웃음이 함께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 뒤...
말이 이어지지는 않았다.
다만....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계속 나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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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잔인하다고 할지라도 (3)
사람은 흙에서 태어나서 흙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사실...
왜 흙에서 태어난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다만...
땅에 묻혀서....
결국 흙의 한 부분으로 돌아가는 건....
바로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흙으로 돌아갈 수 없다.
매장을 할 토지가 점점 줄어들어서....
언제부터 납골당이라는 좁은 공간에...
갇혀서....
오랜 시간 보내야 했다.
살아서는 아파트라는 닭장에서 살다가...
죽어서는...
보관함 같은 납골당 신세.
물론...
우리 집 같은 경우야 아파트는 아니었지만...
뭐 따지고 보면 크게 다를 것도 없긴 했다.
아무튼....
언젠가...
그 좁은 공간을 떠나서....
자연의 품으로 돌아갈 순간을 가지긴 하겠지만...
아직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의 모습을...
아버지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곁에 두고 싶었기에.
물론...
불효자라....
자주 찾아뵙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언제든 찾아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민희는 어떤 생각일까?
민희도 과연....
나와 같을까?
아마도...
지금이라면....
장례식장을 나왔을 것이다.
화장터에 있을지도....
빠르다면....
납골당에 갔을지도 모른다.
과연...
민희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목소리가 듣고 싶다.
아니...
얼굴을 마주 보며....
그녀의 존재를 느끼고 싶다.
그냥....
민희가 보고 싶다는 말을...
이런 잡생각 속에서...
빙빙 돌릴 뿐이었다.
곁에서...
그녀의 손을 잡고....
위로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쓸데없는 잡소리 속에...
숨길 뿐이었다.
**************
석진이 장례식장에 돌아온 것은....
우태가 가고도 한참 시간이 흐른 뒤였다.
하지만...
장례식장의 분위기는 이미....
이전처럼 될 수 없었다.
나중에 자리에 없었던 형부들이 돌아온 뒤....
이상한 느낌을 받았는지 대놓고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다가....
바로 끌려가서는 언니들의 면박을 받았다.
그래도 이 와중에 변함없는 것은 석진이었다.
여전히 웃으며 친근하게 말을 건네고 문상 오는 손님들 접대까지....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그대로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내고 있었다.
오히려....
언니들이나 엄마가 그런 석진의 모습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너무 티가 나서....
나중에 어떻게 설명들을 하려나....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물론...
석진씨는 나에게도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까 병원 앞에서....
나와 우태 오빠를 만난 일은....
전혀 없었던 것처럼.
근데...
그때 오빠에게 그가 한 말은 뭐였을까?
구면이라....
구면이란 이미 한 번 얼굴을 봤다는 의미.
대체 언제...
언제 오빠와 만났다는 것일까?
물론....
우태 오빠는 해명을 하긴 했다.
일 때문에....
방송 일 때문에 봤다고.
하지만 그런 이유로 석진씨와 우태 오빠가 만났다는 말....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우태 오빠의 몸은 언제나처럼 정직했다.
바보....
오빤 거짓말을 할 때....
너무 티가 나는 걸....
우태 오빠는 거짓말을 할 때면 언제나처럼...
내 시선을 피해 왼쪽 아래를 보면서 침을 삼키는 버릇이 있었다.
본인은 전혀 모르는 듯 싶지만....
그런 건 마주 보는 사람만 알 수 있는 일이긴 했다.
내내 그를 지켜보는 사람만.
그만큼 내가 우태 오빠를 알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뜨겁게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문이 해소되는 건 아니었다.
대체...
언제....
무슨 일로 만났을까?
분명 좋은 만남은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오빠를 만난 뒤에....
다시 만나러 간 다음에....
둘이 만나게 된 건 아닐까....
그럼....
석진씨가 오빠를 불러낸 것일까?
연락처는 어떻게....
의문과 동시에 해답이 끌려나왔다.
하긴 석진씨가 내 핸드폰을 보려고 했다면 언제나 볼 수 있었다.
비밀번호로 잠겨 있지만 그건 타인이 보는 것을 막는 것이지....
가족(?)이 보는 것을 막는 건 아니었다.
특히....
한 이불을 덮고 자는...
누군가가 보는 것을 막는 건.
실제 석진씨 핸드폰 또한 나도 언제든 볼 수 있었다.
다만...
서로 보지 않을 뿐이었다.
상대방이 허락하지 않는 한 열어보지 않는다.
그것이 암묵적인 규칙이자....
상대방에 대한 믿음이었다.
대신 내가 처리해야 할 금융 건이 있으면 석진씨가 대신 해주었고....
석진씨가 바쁘면 내게 대신 해달라고 부탁할 때나....
서로의 핸드폰을 열고 처리해주었다.
필요에 따라서....
서로 허락이 있을 때만 상대방의 핸드폰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건 언제든 깨질 수 있는 것이긴 했다.
암묵적인 규칙이라는 게 깨지지 않는 불변의 법칙 같은 건 아니었으니까.
보려고 했으면....
오빠...
연락처도 볼 수 있었겠지....
내가...
오빠와 만난 것들도...
다 알고 있었을까?
사실 핸드폰에 거창한 것이 있진 않았다.
문자 메시지도 모두 보관하는 건 아니었다.
의식하고 그런 건 아니었지만....
내 무의식 속에서도 이런 건 남기면 안 된다는....
그런 생각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실제 진실은 다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은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제일 먼저 떠올리기 마련이었다.
저 멀리 웃으며 주방 이모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석진씨가 시야에 들어왔다.
언제나 보던...
그의 모습.
그의 얼굴.
하지만....
문득 지금은....
조금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완벽하게 자신을 감추고....
또 다른 자신을 연기하는 그의 모습이....
처음으로 조금은...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마음 뒤에는....
다른 색깔의 감정이 바로 끼어들었다.
가여운 사람....
그랬다.
석진을 바라보는 내 마음엔....
그를 불쌍하게 여기는...
동정심이 더욱 크게 자리 잡았다.
동병상련(同病相憐).
유유상종(類類相從).
그에게서 은은하게 풍기는 그 분위기...
그 향기는 나에게서도 풍기는 그것과 같았다.
그래서....
편하게 그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인지도...
그런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그를 무서워할 이유가 있을까?
그래....
언제나 자신을 연기하며...
진짜 자기 모습은 감추면서 사는 사람이잖아.
그래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가여운....
불쌍한 사람...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미 한 번....
그에 대해 이해하게 된 순간에 겪었던 감정이기도 했다.
그리고....
장례식장의 입구 쪽으로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그곳엔 종석이가 있었다.
친구와 함께 테이블에 앉아서 손님이 없는 사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내 시선은 동생을 보고 있지 않았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