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6화 스물한 번째 이야기 - 연연불망(戀戀不忘) (112)
526.
그곳을 지나가....
사라져버린 우태 오빠의 뒷모습을 그리며....
떠올렸다.
그를 쫓아서 함께 나가서는...
병원 정문까지...
함께 걸었다.
살랑살랑 불었던 바람.
도란도란 나누었던 잡담.
살포시...
팔짱을 끌어안으며 걷고 싶었는데....
차마 그러지 못했던 아쉬움.
하아....
오빠...
집에 도착...했을까?
전화를 걸고 싶다는 생각에....
핸드폰을 쥐고 있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 으휴! 뭐하니?! "
툭....
등을 치면서 말을 거는 건 다희 언니였다.
가늘어진 눈....
못마땅하다는 마음이 가득 담겨 있는...
시선.
언니의 눈가에도 어느새 잔주름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 아무 것도 아니야... 왜애? "
난 괜스레 얼른 핸드폰을 집어넣고는....
양손으로 치맛단을 털면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이미 사고를 쳤는데 뭐...
그래도....
언니는....
싫은 소리.....
하지 않을 거지?
눈을 깜빡이며 마음속으로 묻고 있는데....
다희 언니는 여전히 샐쭉거리며 톡 쏘았다.
" 으휴... 멍하니 정신 놓고 있지 좀 마! 너 때문에 얼마나 심장 졸리는 줄 알아? "
" 훗... 몰라....? "
" 암튼... 예전부터... 대형 사고는 다... 치는 주제에... 웃기는! "
난 다희 언니의 손을 잡으며 애교를 피웠다.
차갑지만 가늘고 예쁜 손가락의 느낌.
처녀 때는 더 보드라운 감촉이었는데....
주부라는 시간이 약간의 까끌거림을 만들어냈다.
" 사고는 언니가 훨씬 많았잖아. 벌써 다 잊었어? 아빠 고함소리는 다.... 언니 때문이었는 걸? "
" 하... 그건.... 그냥.... 그래...! 대부분 일상 속 잔소리였지! 넌... 진짜 대형...사건 사고였고. "
" 훗... 나중에 아빠한테 물어봐야지... 누가 더 속 썩이는 딸이었는지. "
" 아이고... 말 참... 예쁘게 한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어서 방에 들어가 봐. "
" 응? 방에...? 방에는 왜? "
" 고모할머니께서 너 보고 싶다고 찾으셔. 으휴... 갑자기 왜 널 보자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암튼 어여 가봐. 엄마까지 뛰어나오면 잔소리 옴팡 쏟아내실 걸? "
" 아... 알았어. "
고모할머니...
예전엔 집안에서 대장 노릇 하셨다는...
여장부.
물론...
지금은 많이 연세를 드시고는 덩치도 작아지긴 했다.
그래도....
꼬장꼬장한 성품은 변함 없으셨다.
건강하셔서 다행이긴 한데....
무슨 말씀 하실지....
걱정이 살짝 들긴 했다.
설마....
우태 오빠 얘기를 들으신 건 아니겠지?
" 엄마도 같이 있으니까... 표정.... 신경 좀 쓰고.... 입 조심하고! "
그 사이 걱정이 담뿍 담긴 말을 덧붙이는 다희 언니.
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응. 조심할께. "
다시 한 번 씽긋 웃어 보였다.
그래....
밝게 웃으면서 대답하자.
그래야....
언니도 덜 걱정할 테니까.
**************
시간은 어김없이 흘러갔다.
출발 시간.
오전 시간에 맞춰서....
장례식장에서 화장터로 이동한 뒤....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소각로로 들어갔다.
작은 유리창 건너로....
화장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는데....
어머니는 다시 눈물을 흘리며 소리죽여 울음을 터뜨리셨다.
언니들도....
눈가에 물기가 맺히며....
어머니를 감싸 안았다.
나도 그 안에서 함께...
끌어안으며 엄마의 등을 토닥였지만....
그때도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
역시나....
난 아직도 아빠를...
원망하고 있나 보다....
생각했다.
옷을 입을 때 단추를 잘못 꿰게 한 탓을....
아직도 마음 속 깊은 곳에...
묻어두고 있구나....
라고.
하지만....
붉게 어른거리는 불꽃을 보면서....
깊은 숨을 길게 토해냈다.
좋은 곳에 가세요....
그리고...
아빠....
우리 다음에 만날 땐....
그냥 딸과 아빠...
사랑하는 가족으로 뵈어요.
문득....
불꽃 속에서 아까 석진씨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밤을 새우는 시간....
문상객도 거의 없고....
엄마와 언니들도 잠깐 눈을 붙인 사이....
결국 마주할 수 밖에 없었던 석진과의 단둘이 하는 자리.
아니....
사실은 내가 일부러 석진씨에게 갔었다.
" 석진씨.... 무리하지 않아도 되요. "
이쯤 되면 내가 정말 뻔뻔해졌구나 생각했다.
나쁜 년이란 말도 동시에 떠올랐다.
하지만...
약간은 반발심이 생겨서 였을지도 모르겠다.
너무 태연하게 장례식장에서 일하고 있는 석진씨가....
그냥 아무렇지 않게 지금까지의 관계를 이어가려고 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려는 듯 행동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절대 그런 일은 이루어질 수 없다고....
말해주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래서....
사람은 잔인해지는 건가 싶도록.
왜 착한 사람에게 점점 독해질 수 밖에 없을까?
" 무리라니... 그런 건 없어요. 민희씨도 잠깐 눈 붙이지 그래요? 한 시간이라도 자둬요. "
하지만 석진은 전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부드러운 목소리.
부드러운 시선.
모든 것을....
다 품어줄 것 같은....
표정.
" 졸리지 않아요. 저... 석진씨... 내 말 기억하죠? "
" 응? 어떤 말이요? "
난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그의 넓은 가슴 쪽에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 이..혼하자는 말이요. 그러니까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요. "
말은 하면서도 그의 얼굴을 볼 순 없었다.
사실...
솔직히 말하면 말하면서도 심장이 콩콩...
빠르게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누군가에게 모진 말을 한 것은....
인생에서 절대 잊을 수 없는...
그 남자를 빼곤 처음이었다.
가끔...
악몽에서 나타나는...
괴물과 같은....
그 남자.
악몽 속에서....
날 발버둥 치게 하고...
때론 내가 칼을 들고...
흉악한 일을 하게 하는...
그 사람을 제외하곤...
처음이었다.
물론 내 말의 대가가 어떤 것인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석진씨가 내 말대로 순순히 장례식장을 떠나버리면....
그 후폭풍은 어마어마할 게 뻔했다.
당장....
형부들....
친인척들의 시선이 화살같이 내게 꽂힐 테고...
엄마나 언니들은...
해명하려고 진땀을 흘리게 될 테지.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이미...
타인의 시선...
타인들이 만들어내는 구설수는...
지긋지긋하게 겪었다.
그딴 것들....
안 듣고...
안 보고...
모두 무시해버리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누리고 싶은 것을....
누리며 살겠다고...
결심했잖아.
그간...
바보처럼.....
놓쳐버린 시간들이 너무 아깝다.
다시는...
찾지 못한 시간들.
그리고...
그건 석진씨에게도....
마찬가지....
소중했던 시간들이었다.
그도...
이런 광대놀음....
연극으로....
그의 인생을 낭비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머리 위....
석진의 입에선 아무런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어떤 움직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난...
다시 한 번 입술을 깨물고는...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검은 색...
넥타이.
하얀 셔츠.
그리고...
목에 묶인 타이 모습.
번거롭게 손으로 매듭을 묶지 않아도....
그냥 슬라이드 방식으로 풀었다 맸다 할 수 있는...
지퍼형 타이의 삼각형 매듭 위로...
그의 턱선이 보이고...
입술이 보였다.
그 뒤...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과 마주쳤다.
욱씬...
시선 속에 무언가 있다 느껴지는 순간.
그러나...
석진의 시선은 날카로운 무언가가 있지는 않았다.
아까처럼...
가늘게 웃는 가운데...
입가에 미소도 그대로 였다.
" 그건 장례식 마치고 얘기해요. 그리고 이건 내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이에요. 그렇게 신경 쓰지... 말아요. "
하지만 신경이 쓰인다고요....!
그의 말에 바로 대꾸를 하고 싶었지만....
더 이상 말해도 소용없다는 생각에 얘기하지는 않았다.
하아....
무거운 숙제를 끌어안은 채....
바닥에 닿지 않은 수영장 한가운데 있는 기분이었다.
이러다가....
그래도....
가라앉은 것 같은 느낌.
하지만....
이번에도 내 마음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냥....
놔둘 수 밖에 없는...
상황들.
그렇다고 해서 영원히 미뤄둘 수는 없었다.
어찌 됐든....
이 장례식이 끝나면....
결국 매듭지어질 일이었다.
**************
" 으.... "
머리가 깨어질 듯한 두통과 식도에서 타는 듯한 느낌 속에서 힘겹게 일어난 우태는 절로 신음소리부터 흘렸다.
어제....
민희가 있는 장례식장에 갔다 온 뒤...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서 멍하니 있다가...
결국 집 안에 있던 양주병을 땄다.
선물로 받았던 것들 중 오랜 시간 자리만 지키고 있었던 병 하나를 골라서....
마시다 보니 결국 새 거였던 그 병을 홀랑 비워버렸다.
한 밤에 갑자기 민희가 오라고 할 일도 없었고...
연락을 기다리면서도 그녀가 연락하기는 어려울 것이란 사실에...
마시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 위안이 된다는 건....
그렇게 마시다가 제풀에 곯아떨어진 뒤....
그 견디기 힘든 시간이 훌쩍 많이도 지나버렸다는 점이었다.
벌써....
오전 11시가 넘어버린 시간.
하지만 깨자마자 제일 먼저 확인한 것은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핸드폰이었다.
혹시나...
그 사이 연락 온 것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
그러나....
핸드폰에는 무정하게....
시간만 알려주는 숫자가 크게 자리 잡고 있었을 뿐이었다.
단 하나의 메세지도....
단 한통의 부재 중 전화도....
오지 않았다.
우태는 인상을 찌푸리며 비틀비틀 거실 소파를 짚고 일어섰다.
아직도 술 냄새가 진동하는 가운데....
두통도 심했지만 당장 입이 바짝 마른 채...
목이 너무 말랐다.
그대로 냉장고로 걸어가서는 생수병을 꺼내서 입을 대고는 벌컥벌컥 마셨다.
뱃속에 불이 난 듯한 속쓰림을 일단 찬물이 쏟아져 들어가면서....
진화 작업을 해주면서 그 시원한 느낌 속에 조금은 진정되는 듯 싶었다.
간만에 이렇게 술을 마셨던 터라....
숙취도 독하게 몰려오는 듯 싶었지만...
그나마 양주라서 그런지 막걸리나 소주 보단...
덜한 느낌이었다.
그래도 두통은 여전했다.
다시 거실로 돌아와 핸드폰을 들었다.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는...
이 밉살스런 전자제품을 소파 위로 툭 던져 놓은 뒤...
욕실로 향했다.
아무래도 시원하게 찬물로 샤워라도 해서 이 찜찜한 기분을 씻어버려야 할 듯 싶었다.
여삼추(如三秋).
일각(一刻)이 여삼추(如三秋)라고 하는 말이...
문득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빠르게....
집 안 풍경이 회오리를 그리며 돌아가는 가운데...
그 옛날 시간으로 돌아가는 듯 싶었다.
민희를 그리워하며....
민희 만을 생각하면서 보냈던 시간들....
그 옛날 옛적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문득 고개를 돌려 보이는 거울 속에는....
이미 나이를 먹은 채...
떡진 머리로 푸석거리는 얼굴을 한 채...
멍하니 보고 있는 자신이 보였다.
하아....
알코올 기운은 담고 있는 한숨이 길게 쏟아졌다.
흘러가버린 시간은 야속하다.
잊으려고 애썼던 그 시간들이....
더더욱 야속하고 너무 허무했다.
지금 흘러가는 시간도....
마찬가지.
우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뒤 천천히 욕실로 향했다.
역시...
샤워부터 하고....
자기 자신을 추스리는 것부터 해야 할 듯 싶었다.
일단...
뭐라도 해야....
시간이 흘러갈 테니까.
마음 한편으로는 흘러가는 시간을 잡고 싶으면서도....
빨리 시간이 흘러버렸음 하는 마음....
둘이 치열하게 부딪치며....
무거운 한숨만 만들어 냈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