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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7화 스물한 번째 이야기 - 연연불망(戀戀不忘) (113)


527. 납골당까지 안치가 끝나고.... 집에까지 오는 시간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이제 정말.. 가족들만 남아있는 시간. 그리고....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가야 할 시간. " 엄마 곁에는 내가 있을께. " 큰 언니가 오늘 하루 엄마와 함께 집에 있겠다고 말하는 덕분에... 나와 다희 언니는 각자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집에는 종석이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엄마 옆에 누군가 있어주는 편이 나았다. 내가 그 역할을 하려고 했지만... 언니들이 눈짓을 주면서 고개를 저었다. 역시... 석진씨와의 일부터 해결하라는 의미였을지도. 아니면... 우태 오빠와 해결하라는 뜻이었을까? 마침내 서로의 보금자리로 훌훌 떠나가는 순간 인사를 주고받았다. 다희 언니가 우리 쪽으로 다가와서 석진씨에게 말을 건넸다. " 고생했어요, 제부..... " 그리곤 나를 슬쩍 보는 언니. 잠시 잠깐 마주친 시선엔 역시 걱정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 시선도 바로 거두었다. 석진씨가 웃으면서 말을 건넸기 때문이었다. " 별말씀을요. 처형도 힘드셨죠? 어서 들어가세요. " 빙긋 웃으며 반듯한 예의를 차리는 그를 보고 있자니 난 남몰래 한숨을 쉴 수 밖에 없었다. 어쩌면.... 이 사람은 변하지 못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변하든.... 변하지 않든.... 그건 이제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었다. 정말.... 매듭을 지어야할 시간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석진과 함께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석진과의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도망치고 싶었다. 이대로 바로... 우태 오빠를 보러 가고 싶었다. 그리고... 석진과.... 함께 가는 것도.... 부담스럽긴 했다. 머릿속으로는 매듭지어야 한다고 생각을 했지만.... 그간 쌓아왔던 인간관계를 부숴야 하는 시간을 마주하는 건.... 역시 힘든 일이었다. 아무리 석진의 모습을 보아왔다고 해도.... 그 순간 그와 단둘이 있는 것은.... 망설일 수 밖에 없었다. 같이... 가도 될까?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스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으리라. 그리고.. 남자의 보이지 않는 부분을 경험했던 나로서는... 역시나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냐... 석진씨는... 그런 사람이 아니잖아. 더러운 생각을 떨쳐내듯... 머리를 세게 흔들고는... 인사를 마친 석진과 함께.... 주차된 차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 #26. 잔인하다고 할지라도 (4) 가장 행복할 때.... 나락으로 떨어지는 꿈을 꾼다고 했던가? 수많은 영화... 드라마.... 소설.... 창작물 속 만들어지는 클리셰(cliché)들.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보통 그런 악몽은.... 행복이 올 것 같은 순간.... 이제부터 행복한 시간이 펼쳐질 것 같다는... 그런 희망찬 시간에 찾아오는 법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지금.... 잠을 잘 수 없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행복한 시간이 시작될 것 같은.... 작은 희망이 지금 내 마음 속에 깃들어 있기에... 오히려 너무도 불안했다. 기대와 불안.... 희망과 안 좋은 예감.... 모든 것이 뒤죽박죽.... 뒤섞여서 마음이 카오스로 흘러가는... 이 순간이... 너무도 길고 시간마저... 흐르지 않는다. 민희를 만나러 갈까... 하지만.... 지금은 아무리 생각해도.... 남편과 함께 있을 시간이었다. 아무리 장례식장에서 봤다고 해도.... 이런 시간에 만나러 간다거나... 민희에게 전화를 걸어서... 괜한 분란을 만들 수는 없었다. 참을 인... 참을 인(忍)자를... 수도 없이 그리고 있지만.... 그래도.... 연락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끊었던 담배가 너무도 마려웠다. 미치도록.... ************** 돌아오는 차 안. 조용한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창밖으로 무심한 가로등 불빛이 흘러가고 있었다. 평소처럼 음악도 틀지 않았고... 석진 씨도 운전에 집중하고 있을 뿐.... 우리 둘 사이엔 아무런 대화도 있지 않았다. 나도 굳이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석진 씨의 모습이 시야 안으로 들어오는 것도 불편해서.... 고개를 살짝 오른쪽으로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해서.... 바깥 풍경을 집중해서 보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보이는 것을.... 볼 뿐이었다. 멍한 상태로.... 손에 모래를 쥐고 있는 듯.... 시간을 흘려보냈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편이 차라리 나았다. 무언가 끄집어내기 시작한다면.... 댐이 무너지면서 쏟아지는 탁류가 모든 것을 쓸어버리듯... 나 또한 뒤집어 흘러가버릴 거 같아서... 어떤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 점점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나와 석진씨가 살고 있는 곳. 아니... 살아 왔었던 장소. 한때 보금자리였던.... 그 아파트 주차장으로 느릿느릿 들어서는 중이었다. 하아.... 절로 흘러나오는 한숨. 아무리 회피하려고 해도.... 아무리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결국 와야 할 시간은 오고 마는 법이었다. 능숙한 솜씨로 주차를 마친 뒤.... 자신의 안전벨트를 푸는 석진 씨를 보면서... 나도 내 몸을 메고 있던 벨트를 풀었다. 그렇게.... 석진씨가 먼저 내리고 나도 따라 내렸다. 차 앞으로 나가있던 그가 천천히 뒤돌아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석진 씨를 보며 또 다시 한숨이 흘러나왔다. 언제나처럼.... 내가 옆으로 다가서자.... 그제서야 석진이 천천히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었다. 난... 평소보다는 반발자국 뒤에서.... 그를 쫓아갔다. 엘리베이터. 화려한 조명이 비추는 가운데.... 띵 소리와 함께 문이 스르륵 열리고.... 단둘이서 그곳에 들어갔다. 누군가... 우리 사이에 끼어들 것 같은 느낌인데도.... 그런 불청객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사는 층을 누르고 다시 문이 닫히자.... 또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심장 고동이 느껴지는 듯한 시간. 길고 긴 시간이 영원히 이어질 듯 싶었지만.... 생각보다는 빠르게 다시 띵 소리가 들리고는 문이 열렸다. 이번엔 내가 먼저 내렸다. 그나마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오자 숨이 조금 트였다. 빠른 걸음으로 우리 집 앞으로 걸어가서는.... 바로 디지털 도어 자판을 눌러서 문을 열었다. 하지만.... 현관으로 들어가자마자 등 뒤로 석진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빠른 걸음으로 쫓아왔으리라. 하긴... 도망칠 수도 없는 걸... 어디로 가겠어.... 약해지지 말자.... 차분하게.... 그와 얘기해야 돼.... 마음을 가다듬고 신발을 가지런히 두도록.... 자리를 잡고는 천천히 집 안으로 들어갔다. 자동으로 들어와있는 전등. 어느새 석진이 원격으로 집 안의 불을 켜놓은 모양이었다. " 후우... 먼저 좀 씻을께요? " " 아... 그래요. " 갑자기 들린 석진 씨의 목소리에 움찔 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빠르게 답했다. 내가 대답하자마자 그는 갈아입을 옷을 챙기고는 그대로 욕실로 들어갔다. 조금 시간이 흐르고 물소리가 들리자.... 난 맥이 풀려서 그대로 소파에 주저앉았다. 오늘따라 낯선 소파의 감촉. 평소보다 더 차가운 느낌 속에서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잘 할 수 있을까? 심장이 두근두근... 크게 요동치며 뛰는 것이 느껴졌다. 그 순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잘해야 한다는 것과 잘 할 수 있는가의 간격은.... 너무도 멀리 있다는 것을. ************** 우태는 깜짝 놀라서 잠에서 깼다.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한쪽 뺨이 눌린 상태에서 침을 흘린 듯한 입가를 손등으로 닦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하루 종일 숙취에 시달리면서도 집안 청소에 매진했다. 그러고 보니.... 무슨 청소에 한이 맺힌 것처럼.... 평생 해야 할 청소를 이번 남은 휴가에 몰아서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단순 작업.... 아무런 생각 없이 몸을 쓰기엔.... 청소만한 것도 없었다. 특히나.... 이 낡은 집은.... 끝도 없는 일거리의 집합체였다. 대충하려면 또 대충할 수 있는 것이 집안 일. 그래서.... 평소엔 보이는 곳만 치우고 말았다. 하지만.... 제대로 광을 내고 청소하고자 하면.... 끝이 없는 무한의 시지프스 바위와도 같았다. 어제도 짐을 정리하고 버렸다 싶었는데.... 또 다시 헤집어 놓으니 금방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마치 직소 퍼즐(Jigsaw Puzzle) 같다고 할까? 열심히 맞춰 놓고는 순식간에 뒤집어버린 뒤 광경을 보는 듯 싶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어차피 할 일도 없었고.... 힘을 쓰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지금 우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기도 했다. 그렇게 작은 방과 거의 창고처럼 되어버린 서재를.... 땀나도록 치우고 나니까 어느새 해가 져버렸다. 그 사이 꾸륵꾸륵 거리는 뱃속이.... 이젠 허하다 못해서 쓰라린 상태가 되자.... 정말 뭐라도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보이는 대로 배달음식을 시켰다. 북엇국 정식. 처음 시킨 곳이었는데도 나름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메뉴 자체가 실패하기 힘든 것이기에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숙취 때문에 속이 안 좋아서 먹지 않기도 했지만.... 그래도 빈속이 계속 되니 배고픔이 식욕을 불러오긴 했던 모양이었다. 약간 식은 듯한 국은 냄비에 덜어서 다시 끓였다. 펄펄 끓는 국을 다시 덜어서 상을 차리니.... 하루 종일 안 좋았던 뱃속마저도 어서 넣어달라는 듯.... 꼬록거리는 소리와 함께 어느새 입안에 침이 고였다. 후루룩.... 숟가락에 국물을 담아 마시는데.... 하아.... 이 한 숟가락이 뭐라고.... 작은 한 모금에도 속이 확 풀리는 느낌이 드는 걸까. 정신없이 북엇국을 홀짝거리며 계속 퍼서 마시는데.... 마음 같아서는 그릇째 들어서 마시고 싶었지만.... 그러기에 너무 뜨거웠다. 같이 온 깍두기와 함께.... 밥도 한술 떠서 국물과 함께 먹으니.... 그나마 괜찮아졌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밥을 말아서 먹지는 못했다. 식은 국물만을 마셔대며.... 식사를 마쳤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국물과 몇 숟가락 안 되는 밥만으로도 배가 채워졌다. 포만감 속에서 어느새.... 소파에 등을 기대로 있다가.... 탁자에 팔을 베고는 쉬고 있었는데.... 그 모습 그대로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곤.... 무슨 꿈을 꾸었는데.... 갑자기 분위기가 확 달라지면서... 뚝 떨어지는 느낌과 함께 깨어나 버렸다. 불안한 느낌. 대체... 무슨 꿈인데 이렇게 식은땀에 흠뻑... 젖었던 걸까? 온몸이 축축한 가운데.... 핸드폰을 들어보니 밤 11시가 넘었다. 그리고.... 액정엔 여전히.... 어디에서도 연락이 온 흔적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다. 민희는.... 아직인걸까.....? 순간 왼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서려다가... 따끔 거리는 통증에 악 소리를 내며 오른쪽으로 몸을 피했다. 엉겁결에 든 왼손바닥엔... 핏물이 한 가닥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하얀 사기 조각이 박혀 있었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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