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7화 스물한 번째 이야기 - 연연불망(戀戀不忘) (103)
517.
조심스러운 말투.
조심스러운 목소리.
석진씨였다.
얼른 휴대폰을 집어넣고는 몸을 돌려 그를 보며 답했다.
" 대학 선배에요. 같은 과 선배. "
" 아하..... "
석진에게 대학 때 아는 사람을 소개하는 건 이번이 처음인 듯 싶었다.
하긴....
결혼식장에서도 본 적 없는 영석 선배였으니....
애초 그때 대학 시절 지인이 누가 왔더라.....
나래....
소민.....
둘이 왔었던 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우태 오빠도.
비록....
기둥 뒤에서....
어두운 곳에서 보고 있었지만....
그때 보았던 그의 모습은 언제나 마음 속 깊은 곳에.....
새겨져 있었다.
아마도....
평생 잊지 못한 기억.
그 사이 어깨를 감싸는 손길이 느껴졌다.
석진씨였다.
" 날이 은근히 춥네요. 어여 들어갑시다. "
" 네에... 그래요. "
어쩌면 석진이 이끄는 대로 몸을 내맡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전등불이 환하게 켜진 실내로 들어서는데 문득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일부러 봐야지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거울 앞을 지나면서 보았던 석진씨의 얼굴에 어두웠기에....
나도 모르게 보게 되었다.
그리고....
애잔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그렇게 자신의 모습을 잘 감추는 석진씨였건만....
역시 이틀째 밤을 맞이하니 완벽히 숨기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원래 밤을 잘 새지 못하는 체질이었다.
어제 일찍부터 병원에 와있었다고 하니....
그 사이에도 더더욱 무리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안타까운 사람.....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은 꼭꼭 숨기고....
언제나 웃는 얼굴로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그의 모습이....
한편으로는 대단하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안쓰러웠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는....
그가 만들어주는 그늘 속으로....
도망쳐도 괜찮겠다....
생각했었지만....
함께 살면서 그 그늘이라는 것이....
자신의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만들어내는....
희생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서....
고마움에....
또 안쓰러움에.....
옆에서 같이 나누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마음으로 계속 함께 하는 게....
맞는 길일까?
" 석진씨.... "
발을 멈추고 그를 불렀다.
내 목소리에 석진 또한 멈춰 섰다.
올려다보는 내 시선 끝에 그의 눈동자가 있었다.
물음표가 떠있는 석진의 눈동자.
마침 주변에 다른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난 마른 침을 삼키며 마음을 추슬렀다.
두근두근.....
심장 고동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고....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가슴 한 가운데에서 요동쳤다.
**************
익숙한 멜로디.
그리고....
가슴을 울리는 목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몽롱한 상태에서....
갑자기 나를 감싸고 있던 유리창이 깨지며....
그게 꿈이 아닌 현실의 소리임을 깨닫게 되었다.
" 기어이 우리가 만나면...... "
핸드폰에서 울리는 노랫소리.
아이유의 노래....
시간의 바깥이 한창 울려대는 중이었다.
핸드폰이 온힘을 다해 쏟아내는 멜로디.....
전화 수신음....
벨소리로 지정했었다.
어쩌다 들은 노래가 마음을 울려서....
들을 때마다 심장을 울리고....
나를 울려서 저장했던...
바로 그 노래였다.
핸드폰을 집어 들자마자 화면에 보이는 발신자 이름....
그렇게 기다리던 민희였다.
" 아아... 미안.... "
깜빡 졸았어 라는 말은 애써 삼켰다.
생각도 못한 물건을 찾은 뒤....
마음이 싱숭생숭해진 탓도 있었지만....
그 뒤 청소는 하다말다 아버지에 관련된 물건을 정리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소파에 기대있던 사이 잠이 든 모양이었다.
그래서 전화를 받자마자 나온 말이 미안이었다.
바로 받지 못한 마음이 사과부터 쏟아냈다.
하지만 차라리 잘된 일이라 생각했다.
보고 싶었다....
기다렸다는 말보다....
차라리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이 훨씬 나았다.
" 오빠... 미안.... 내가 너무 늦었지? "
가냘픈 민희의 목소리.
속삭이는 건 아닌 듯 하지만 주변도 조용하고....
민희의 목소리도 작게 들렸다.
장례식장 어딘가에서 거는 모양이었다.
하긴....
상주인 그녀가 장례식장을 벗어날 리 없었다.
" 아니야.... 늦긴.... "
슬쩍 본 핸드폰 시간은 새벽 세시를 넘었다.
" 피곤하겠다.... 좀 잤어? "
잠을 못잔 건 우태나 민희나 똑같았다.
자신은 이렇게 졸기라도 했는데 민희는 좀 쉬기라도 했는지....
걱정이 앞섰다.
그 사이에도 민희의 목소리는 계속 들렸다.
" 생각보다 피곤하진 않네. 오빤... 좀 잤어? 내가 괜히 깨운 건 아니지? "
" 깨우긴 무슨.... "
이렇게 전화준 것만으로도....
너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너무도 좋은데....
너무 마음이 따듯해지는데....
괜히 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 오빠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어. 들으니까... 좋다. "
" 나도... 너 목소리 들으니까 좋아. "
안심이 된 달까.
돌아가신 그녀의 아버지껜 정말 죄송스럽지만....
이렇게 잠깐이라도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너무 감사했다.
이렇게....
밀어를 속삭이는 것이 죄송스럽지만...
멈출 수 없었다.
" 보고 싶다. "
나도 모르게 속마음이 흘러나와버렸다.
이미 불경스러움에 천벌을 받는다 해도...
멈출 수 없었다.
" 응.... 나도... 나도 보고 싶어, 오빠..... "
수화기 너머 민희의 목소리도 함께 죄를 나눠 받자고 말하는 듯....
바로 따라 흘러나왔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처럼....
원죄를 나눠 짊어지는 듯 싶었다.
" 무리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자.... "
" 으응.... 오빠도 이제 좀 자.... 오빠... 언제 출근해? 출근하려면 자야지.... 그래야 출근하지..... "
" 훗... 출근 안 해.... 휴가 냈잖아.... "
순간 말하고는 아차 했다.
같이 여행가겠다고 낸 휴가인데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민희가 듣고 자신의 탓을 하는 거 아닐까 싶어.....
후회가 샘솟았다.
" 그랬구나.... 언제까지 쉬는데? "
작게 들리는 민희의 목소리에 바로 미안함이 묻어났다.
난 애써 밝은 톤으로 빠르게 대답했다.
" 이번 주 주말까지는 휴가야. 그러니까 내 걱정 말고 민희 너나 몸 챙겨. 지금은 문상객 없을 꺼 아냐. 이런 시간에 자는 거래. 안 그러면 몸 상해. 알았지? 조금이라도 꼭.... 꼭 자. "
" 알았어.... 나도 잘 거니까 오빠도 한숨 자. "
" 그래. "
" 그럼.... 전화 끊을께. 또 시간 되면.... 연락할게. "
" 응... "
전화가 끊어졌다.
사실....
자라고 말하기 전....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잠깐이라도 볼래?
잠깐이라도....
우리 볼까?
심장에서 턱 걸려서 계속 간질거렸다.
시간이 늦었다고 해도....
택시타고 간다면....
못갈 것도 없는 곳이었다.
심야 시간이라 꽤 요금이 나오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지 못한 일도 아니었다.
정말....
십분이라도 볼 수 있다면.....
당장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 큰 욕심이었다.
아마 말했다면....
민희도 오라고 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역시나....
상중인 그녀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차라리....
문상을 하는 거라면 모를까....
문상....
문상이라....
그 옛날....
결혼을 승낙 받기 위해 찾아갔던 날의 기억이...
천천히 소환되었다.
후회가 가득했던 그 날의 기억.
냉랭하게 대했던....
민희 아버지의 모습들.
하지만....
그날의 분위기는 분명 또렷하게 떠올랐는데....
정작 그때 민희 아버지의 얼굴은....
흐릿한 것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
석진에게 말하려고 했던 말은 결국 하지 못했다.
어렵다.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말을 한다는 건.
지난날...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 쏟아냈던 그 순간 빼고는...
한 번도 그런 말을 하지 못했다.
습관이 되지 못한 것일까?
하지 않아 버릇했으니....
습관이 될 수 없었다.
아니....
애초...
그런 건....
습관으로 삼을 수 없는 일이었다.
" 피곤해 보여요. 그러니까.... 집에 가서 쉬어요. 나도 있으니까.... 언니들한테는 말해 놓을께요. "
" 하하하! 피곤하긴... 괜찮아요. 그런 말하는 민희씨나 집에 가서 쉬고 와요. 올라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
" 아니에요. 아빠... 곁에 있어야죠 석진씨.... 잠자리 바뀌면 잠도 잘 못자잖아요. 그러니까... 집에서 조금이라도 자고 와요. "
" ....... "
결혼 생활이라는 것을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사람에겐 숨겨진 면이 있고 함께 살다보면 그것을 나도 모르게 알게 된다는 점이었다.
물론....
은연 중 보여줘야 하는 것이긴 했지만.....
사람이 24시간....
모든 것을 감추고 살긴 힘들었다.
좋은 사람으로 사는 석진에게도 쉴 공간이 필요했다.
그게...
집이고 민희와 함께 사는 공간이었다.
자신의 어머니와 사는 집은 진정한 쉼터가 되지 못했다.
민희가 아버지가 있는 집에서 나오고 싶어 했던 것처럼....
석진도 그의 어머니가 있는 곳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착한 아들.
자랑스러운 아들.
언제나 시어머니에게 공손한 그였지만....
그렇기에 더욱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마음을 깊숙히 숨기고 있었다.
아마....
민희와 서로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눈치 챌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시간이 걸려서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결국 그와 닮았다는 점에서....
조금은 허탈한 미소를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처음 본 순간부터 가졌던 호감이라는 것이 어쩌면 닮은 꼴....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가졌던 감정과 같았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 알았어요. 그럼.... 집에 갔다 올께요. "
희미한 미소.
석진이 약간은 힘이 빠진 미소를 보여주었다.
유일하게 그의 진심이 보일 때 짓는 표정이었다.
아이가 잘못하고 그것을 들켰을 때 지을 법한 표정.
그것이 미소로 포장되어 있다고 하지만...
너무 얇아서 그 아래 담겨 있는 마음이 전부 보일 거 같은...
그런 표정.
그건...
울음이 터지기 직전 튀어나올 법한 얼굴이었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