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6화 스물한 번째 이야기 - 연연불망(戀戀不忘) (62)
476.
약간의 기대....
아니 설레임으로 재빨리 휴대폰을 들었는데....
화면에 지역번호가 찍혀 있는 전화번호에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거기에다가 휴대폰 번호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어플에는....
<< 설문 조사 >>라는 정체성까지 떡 하니 밝혀주고 있었으니....
맥이 탁 풀려버렸다.
바로 분노 섞인 종료로 칼같이 끊어버리고 내려놓는데....
그와 동시에 다시 전화 통화가 들어왔다.
채 가시지 않은 짜증이 해일처럼 밀려오는 것을 느끼며....
다시 전화를 끊으려는데 순간 가슴이 펄떡펄떡 뛰기 시작했다.
발신 번호에 찍힌 세 글자.
<< 서민희 >>
서둘러 통화를 눌렀다.
손가락이 파르르 떨리는 듯 싶었다.
그리고.....
" 오빠.... 오랜만이야. "
수화기 너머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
마치 어제 통화했던 것 같은...
담담함이 묻어 있는 목소리에.....
약간의 서운함.....
약간의 화가 치밀어 오르면서도....
안도감 속에 벅찬 설레움이 넘쳐서는....
대꾸하는 내 목소리가 요동치는 것 같았다.
" 그...래. 오랜만이네. 바빴나 보다. 잘 있었어? "
" 훗... 그렇지 머.... 오빠는? "
" 나야 뭐.... 별 일 없었지. 직장인이 뻔...하잖아. "
별일 없이 지낸다는 남자에게서....
여자는 매력이 찾지 못한다는 글을 어디서 읽었던 것 같은데.....
입은 아무런 고민 없이 내뱉고 있었다.
왜 연락이 없었는지....
묻고 싶어 하는 마음이 튀어나오는 것 보다....
서운함에 이미 바빴냐고 나온 말 보다.....
더한 것이 나올까 봐 전전긍긍하는 것 보다야....
훨씬 나은 선택이었지만.....
역시나 말하고 나서 조금은 후회하고 있었다.
조금은....
서민희....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민희의 다음 말에 더욱 깜짝 놀라고 말았다.
" 훗.... 참 오빠! 저녁 먹었어? "
" 아니.... 아직. 이제 먹어야지. "
이때까지는....
평범한 대화......
평범한 전개였다.
그런데...
" 그럼 지금 나올래? 나 오빠 집 근처인데.... 배고프다. 같이 저녁 먹고 싶은데 오빠는 어때? "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아니, 푹....
송곳에 찔린 듯 아프고 덜컥 멈춰 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단지 한마디 말 뿐이었는데....
정신이 아득해지고 몸이 굳어졌다.
" 오빠? 응? 오빠 머해? "
" 아!!! 아니야. 아... 나갈께. 지금 어디 있는데? "
" 흐음.... 여기 공용주차장 있는 곳인데..... 상가들 쭉 모여 있고.... 아! 근처에 죽동 아파트라고 있어. "
" 아... 어딘지 알겠다. 거기 조금만 가면 지에스 편의점 있을 꺼야. 거기서 기다려. 바로 나갈께. "
" 아항.... 여기서도 보이네. 알았어. 어서 와. "
통화 종료.
나는 바로 방 안으로 들어가서는....
보이는 대로 청바지부터 급하게 다리에 꿰어 넣었다.
순간 미끄러지며 하마터면 자빠질 뻔 했다.
간신히 책상에 손을 짚으며 중심을 잡았다.
넘어지면서 잘못했으면 팔이 부러질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허리가 삐끗할 뻔 했다.
민희도 만나기 전에....
119....
구급차에 실려 가는 찬스를 얻을 뻔 했다.
진정해라...
김우태....
진정해.
심호흡을 하고 다시 옷을 챙겨 입었다.
평소보다 세 배는 더욱 조심히 계단을 내려와서....
그녀가 기다리는 장소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아니...
어느새 빨라진 걸음은 달리기로 바뀌고 말았다.
귀 옆으로....
쌀쌀한 공기가 마구 빠르게....
흘러갔다.
**************
편의점 간판....
언제나 환히 밝혀진 조명.....
커다란 창문 안에 민희의 모습이 보였다.
분홍색 라운드 티셔츠.
그 안에 살짝 보이는 하얀색 칼라.
그리고 청바지 차림이....
마치 예전 대학 시절의 그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특히나 머리 뒤....
큰 핀 하나로 정돈한 헤어스타일이.....
더욱 기억 속의 모습을 생각나게 하였다.
어느덧 그녀의 시선도 나를 향하고는 생끗 웃었다.
그리고는 이내 바로 캔 커피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보니까 따지도 않은 상태였다.
내 시선이 닿자마자....
멋쩍은 듯 미소 지으며 말했다.
" 그냥 있으려니까 좀 민망해서... 훗, 마실래요? "
잠시 그냥 기다리면 되는데....
그 시간을 아무런 대가 없이 이용하는 것에 부담을 느꼈으리라.
민희는 원래 그랬다.
조금은 그냥 모른 척 해도 되는 일에도....
언제나 미안해하고 또 고마워했다.
그렇기에 같이....
함께 조로 공부하면서도....
나에게 신경써주고 관심을 가져주었다.
" 아니야... 아참. 배고프다고 했지?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
" 흐음... 글쎄? 배는 고픈데 딱 먹고 싶은 게 생각은 안나. 여기는 오빠 동네니까.... 오빠가 먹고 싶은 데로 가자. "
<< 아무거나 좋아 >> 와 맞먹는.....
어려운 주문이었다.
하지만 순간....
쌀쌀한 날씨와 맞물려서 생각나는 곳이 있었다.
따듯한 국물도 먹을 수 있고....
나름 언제나 손님들이 득실거리는....
동네 맛집.
" 민희야 그럼..... 버섯매운탕은 어때? "
" 버섯매운탕? 아.... 칼칼한 국물에 먹는 거? "
" 매운 국물도 있는데 여긴 맑은 국물을 고를 수도 있거든. 그럼 찜 같은 것도 먹을 수 있고..... 요새는 그냥 시원한 게 좋아서..... 따듯한 국물도 먹을 수 있고 소고기 샤브도 괜찮아. "
" 풋... 울 오빠 이제 자극적인 건 별로인가 봐. 나이 들었어. 노인네 입맛.... 큭큭..... "
" 하하.... 그럴지도. "
노인네 입맛이라는 말에 속이 살짝 쓰려왔지만....
또 그것을 거부할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정말....
맵고 얼큰하고 그리고 간이 센 국물을 좋아하던 나였는데....
이제는 정말 시원단백한 것이 더 좋아졌으니까.
그 순간 민희가 내 옆에 와서 팔짱을 꼈다.
뭉클거리는 느낌.
분명 브래지어를 하고 있었을 텐데....
컵이 주는 딱딱한 느낌이 아니고....
좀 더 부드러운 감촉이....
팔에 하나 가득 느껴지고 있었다.
마치....
노브라인 것 같은....
자연 그대로의 느낌......
" 가자.... 맛있겠다...... "
민희의 나직한 목소리.
분명 수수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는데....
은은하게 풍겨오는 화장품의 향기가....
화려하게 차려입은 것보다 훨씬 더욱.....
내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
이미 늦을 거라는 사실은....
미리 얘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저녁도 따로 준비하고 있지 않았다.
창밖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는 동안....
아파트 주차장으로 하나 둘.....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서서히 붉게 물들어가는 석양 속에서 눈에 들어왔다.
한낮에 보았던....
캐나다 관련 다큐멘터리에서 이어진....
회상 하나.
그것이 시발점이었다.
박나래.
나래의 말대로....
난 그를 보러 가고 말았다.
마치 굳게 봉인 했던 상자를 한번 열어보는 것처럼....
조심스럽지만 그래도 한번 뒤적이고 싶은 마음으로.....
어떻게 봐야할까 고민도 했었다.
그냥....
가볍게 카페에서 만날까 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듯 싶었다.
오빠가 연락처를 바꾸지 않은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마지막 연락했던 전화 번호.
추억을 담은 상자.
또한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아파서 열지 않았던 그것을 열어보고는....
그 안 깊숙이 있는 작은 메모까지....
하나씩 다 보게 만드는 것처럼....
욕심이 순식간에 부풀어 올라서 한없이 커져만 갔다.
결국....
그냥 하루를 그와 함께 보내기로 했다.
그간 알고 지냈던 시간이 있는데....
그 정도는 함께 나누어도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오빠를 만나는 김에.....
멀리 바람을 쐬러 간다는 핑계를 붙여서는.....
언제 혼자 쓸쓸하게 보았던 동해 바다에 그와 함께 가고 싶었다.
그렇게 그를 보면....
마음에 쌓였던 무언가가....
조금씩 녹아서 괜찮아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오히려 제법 긴 시간.....
오전에서 만나서 거의 자정에 가까운 시간에 헤어졌는데도....
끈적거리는 마음은 마음속에서 또 다른 싹을 틔우고.....
장마철 갑자기 쑥쑥 자라는 수풀처럼.....
더욱 주체할 수 없이 커져 버렸다.
보고 왔는데도....
또 보고 싶었다.
울렁이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다시 그를 다시 보고 싶었다.
볼일 때문에 나갔던 시내.
내비게이션에서 그가 다닌다는 회사의 주소지가 나오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거기에다가....
때마침.....
점심시간.
그도 이 시간에는 잠시 나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결국 연락하고 말았다.
미친년처럼....
앞뒤를 재지 못하고.....
오빠를 불러냈다.
연락을 차라리 받지 말기를 바라면서도....
내 심장은 두근거리며 기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만났다.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뜻밖의 만남이었다.
납골당에서의 만남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바라지 않았다.
조용히....
내 기억 속에서.....
조용히 미소 지으며 나를 바라보던.....
오빠의 아버님을 만나러 갔을 뿐이었다.
서툰 솜씨로 만든.....
유부초밥을 너무 맛있게 드셔주셨던.....
따듯한 봄날의 기억을 만들어주신 그분을 기억하며....
또.....
오빠를 잠시 떠올리며 마음을 달래고 싶어서.....
찾아갔던 길이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생각하지 못한 만남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후.....
같이 하지 못했던 시간이.....
내 마음을 주체할 수 없게 흔들었다.
시어머니와의 시간이 거기에 기름을 부었다.
이젠....
더 이상 나를 상자 속에 가두고.....
아무렇지 않은 듯 시간을 보낼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아니야...
그것보다.....
역시....
박나래....
그녀와의 만남....
그녀가 내게 들려준 말이.....
결정적이었다.
아......
" 아직도.... 너 기다리고 있더라. 그 사람. "
" 민희야.... 가서 한번 만나봐. 아직 마음이 있으면...... "
나래의 목소리가 계속 반복해서 들렸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옷을 골라 입고 어느새 화장을 하고 있었다.
주차장에서 차를 빼서 그에게 달려가는 동안....
두근거리는 심장 고동 소리가 귀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후끈거렸다.
습관적으로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들리는 목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
다만.....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오빠가 살고 있는 동네로 차를 몰았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