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VIP룸
1. 영롱한 붉은 병
정장을 입은 지배인이 하얀 면장갑을 끼고 룸으로 들어왔다.
그가 조심스럽게 받쳐 들고 온 것은 술병이라기보다 하나의 예술 작품에 가까웠다.
"주문하신 '루이 13세' 준비해 드렸습니다."
바카라 크리스털로 세공된 영롱한 병.
둥근 곡선과 뾰족한 장식들이 조명 아래서 보석처럼 붉은 빛을 뿜어냈다.
설아는 입을 틀어막으며 감격했다.
"미쳤어, 진짜 영롱하다... 오빠, 진짜 짱이야!"
하지만 보윤은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술병이 예쁘긴 했지만, 왜 저렇게까지 난리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아는 비싼 술이라고 해봐야 면세점에서 파는 발렌타인 30년 정도가 전부였으니까.
보윤은 설아의 귀에 대고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야... 이게 그렇게 비싼 술이야?"
설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보윤을 쳐다보더니, 귓속말로 답했다.
"너 몰라? 이거 면세점에서도 4~500만 원은 줘야 해. 근데 여기 가게 술값으로 치면... 아마 1,200만 원은 넘을걸?"
"뭐, 뭐...?! 천이백?!"
보윤은 저도 모르게 헉 소리를 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신의 반년 치 연봉에 가까운 돈이 저 병 하나에 담겨 있다니.
갑자기 테이블 위에 놓인 술병이 시한폭탄처럼 무섭게 느껴졌다.
2. 인플루언서
"매니저님, 죄송한데 저희 사진 좀 찍어주시겠어요?"
설아가 휴대폰을 내밀며 매니저에게 부탁했다.
"물론입니다."
지배인은 익숙한 듯 공손하게 휴대폰을 받아 들었다.
설아는 테이블 위에 자신의 샤넬 백 로고가 잘 보이도록 각도를 맞추고, 그 옆에 루이 13세 병을 배치했다.
그리고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앉았다.
"하나, 둘."
찰칵.
설아는 셔터 소리에 맞춰 능숙하게 포즈를 바꿨다.
그녀는 오프숄더 니트를 살짝 아래로 당겨 어깨선을 더 과감하게 드러내더니, 양팔을 안쪽으로 모아 테이블을 짚었다.
그러자 가슴골이 깊게 파이며, 터질 듯한 볼륨감이 적나라하게 부각되었다.
"보윤아, 너도 같이 찍을래?"
"아, 아니... 난 괜찮아."
보윤은 손사래를 쳤다.
저 옆에서 초라하게 비교당하고 싶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1,200만 원짜리 술과 함께 박제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설아는 만족스러운 듯 사진을 확인하고는 바로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업로드했다.
3. 은밀한 장치
"자, 이제 오픈해주세요."
태인의 지시에 지배인이 조심스럽게 크리스털 마개를 열었다.
퐁-.
경쾌하면서도 묵직한 소리와 함께, 수십 년 묵은 코냑의 깊은 향이 룸 안을 가득 채웠다.
태인은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테이블 구석에 놓인 태블릿 PC를 집어 들었다.
"분위기 좀 띄워볼까?"
그가 화면을 터치하자, 벽면을 채우고 있던 영상이 꺼지고 노래방 화면으로 전환되었다.
웅장한 사운드가 룸을 메우기 시작했다.
보윤의 눈길이 벽면에 매립된 길쭉한 스피커에 머물렀다.
'Bang & Olufsen'
무슨 브랜드인지는 모르겠지만, 은색 알루미늄으로 마감된 디자인이 한눈에 봐도 엄청나게 비싸 보였다.
소리 하나하나가 고막을 때리는 느낌이 일반 노래방과는 차원이 달랐다.
"아, 여기 음향 쩐다! 대박!"
설아가 박수를 쳤다.
"그럼. 방음 완벽하니까 소리 지르고 싶으면 맘껏 질러도 돼. 아무도 안 들어오니까."
4. 첫 번째 위기
"자, 건배."
셋의 잔이 부딪쳤다.
보윤은 손을 떨며 1,200만 원짜리 액체를 입술에 적셨다.
목구멍이 뜨거워지면서 복합적인 향이 코를 찔렀다.
입안에서는 돈의 맛이 느껴지는데, 다리 사이에서는 여전히 찝찝하고 비릿한 굴욕의 맛이 느껴졌다.
술이 한 순배 돌자, 태인은 소파 등받이에 팔을 넓게 벌리고 보윤과 설아를 양옆에 끼고 앉았다.
"보윤아, 근데 너 땀 냄새가 좀 나는 것 같다? 더워?"
태인이 보윤의 어깨를 감싸 쥐며 코를 킁킁거렸다.
보윤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올 것이 왔다.
"아... 그, 그게... 오늘 현장 다녀오느라 좀..."
"그래? 그럼 좀 씻고 오지. 저기 화장실에 샤워부스도 있는데."
태인이 턱짓으로 룸 안쪽의 화장실을 가리켰다.
"같이 들어가서 등이라도 밀어줄까?"
농담인 척 던지는 말이었지만, 태인의 손은 이미 보윤의 허리 라인을 타고 스멀스멀 내려가고 있었다.
보윤은 사색이 되어 몸을 굳혔다.
"아, 아니에요! 저 혼자 씻을게요. 금방 하고 올게요."
태인의 손이 허리에 닿으려는 찰나, 보윤은 화들짝 놀라며 욕실로 도망치듯 뛰어 들어갔다.
등 뒤로 태인의 큭큭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달칵.
문을 잠그고 돌아선 욕실 내부는 밖보다 더 호화로웠다.
바닥과 벽면은 온통 대리석으로 마감되어 있었고, 세면대와 수도꼭지는 무려 번쩍거리는 황금색이었다.
은은한 디퓨저 향기가 공간을 채우고 있었고, 세면대 옆에는 이솝 핸드워시와 최고급 어메니티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보윤은 떨리는 손으로 옷을 벗어 던졌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나신은 처참했다.
허벅지 안쪽에는 하얗게 굳은 자국들이 흉터처럼 남아 있었고, 엉덩이 골은 흘러나온 액체로 번들거렸다.
"흐으..."
보윤은 샤워기를 틀었다.
따뜻한 물줄기가 쏟아지자 억눌러왔던 눈물이 핑 돌았다.
그녀는 바디워시를 타월에 듬뿍 묻혀 거칠게 몸을 문질렀다.
박 차장의 흔적, 윤 대리의 흔적, 그리고 그들의 냄새를 모조리 지워버리고 싶었다.
허벅지가 빨개질 정도로 문지르고, 질 안쪽까지 손가락을 넣어 남은 찌꺼기를 긁어냈다.
비누 거품과 함께 더러운 오물들이 하수구로 빨려 들어갔다.
5. 준비된 자세
물기를 닦고 다시 옷을 입어야 할 시간.
하지만 보윤에게는 갈아입을 속옷이 없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맨살 위에 바로 스커트를 꿰어 입었다.
완벽한 노팬티 상태로 블라우스 단추를 잠갔다.
달칵.
보윤이 젖은 머리를 대충 털며 욕실 밖으로 나오자, 룸 안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방금 전까지의 찌든 모습은 사라지고, 비누 향을 풍기며 뽀송뽀송해진 얼굴로 나온 보윤.
"개운해? 역시 씻고 나니까 인물이 사네."
태인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설아도 보윤의 말끔해진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보윤아, 훨씬 낫다. 개운하지?"
"네... 감사합니다."
보윤은 조신하게 대답하며 다시 소파 구석에 앉았다.
피부에 직접 닿는 가죽 소파의 차가운 감촉에, 저절로 허리가 꼿꼿하게 펴졌다.
다리를 꼬자 맨살끼리 맞닿는 미끄러운 느낌이 생경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지만, 스커트 속은 무방비 상태였다.
"자, 이제 분위기 좀 띄워보자고! 설아, 너 노래 한 곡 뽑아."
태인이 루이 13세를 스트레이트 잔에 따라 돌리며 외쳤다.
"오케이. 내가 오늘 오빠랑 보윤이를 위해 특별히 서비스한다."
설아는 거절하지 않고 마이크를 잡았다.
반주가 시작되자 그녀의 눈빛이 돌변했다.
곡목은 다비치의 '8282'.
"깁미어 콜~ 베이베~ 베이베~"
설아의 노래 실력은 수준급이었다.
아니, 웬만한 가수는 저리 가라 할 정도였다.
그녀는 단순히 노래만 부르는 게 아니었다.
오프숄더 니트가 흘러내릴 듯 말 듯 한 아슬아슬한 몸짓으로 리듬을 타고, 태인의 앞에서 웨이브를 추며 분위기를 주도했다.
쭉 뻗은 고음과 화려한 무대 매너.
설아는 이 룸의 주인공이었다.
"와우! 우리 설아 죽이네!"
태인이 휘파람을 불며 환호했다.
보윤은 기에 눌려 소심하게 박수만 짝짝 쳤다.
자신과는 다른 세상 사람 같았다.
설아의 노래가 끝나자 태인이 마이크를 보윤에게 들이밀었다.
"자, 다음 타자. 보윤이 너도 한 곡 해야지?"
"네? 저, 저 노래 진짜 못해요... 아는 노래도 별로 없고..."
보윤이 손사래를 치며 뒤로 물러났다.
노래방은 회식 때 탬버린 셔틀이나 해봤지, 마이크를 잡아본 적은 거의 없었다.
"아잉, 빼지 말고 나와. 내가 도와줄게."
설아가 보윤의 팔을 잡아끌었다.
저항할 새도 없이 스테이지 중앙으로 끌려 나왔다.
"자, 쉬운 거로 가자."
설아가 예약한 노래는 쿨의 '아로하'.
하지만 보윤은 마이크를 두 손으로 꼭 쥐고, 가사 화면만 뚫어져라 쳐다보며 국어책을 읽듯 노래를 불렀다.
"어두운... 불빛 아래... 촛불... 하나..."
음정은 불안했고, 박자는 뚝뚝 끊겼다.
마치 유치원생이 학예회에서 동요를 부르는 것처럼 정직하고 뻣뻣했다.
옆에서 설아가 화려한 코러스와 율동으로 커버해 주려 했지만, 보윤의 뻣뻣함은 가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의외로 태인의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크크크, 야. 보윤이 귀엽네. 진짜 순진해 보여."
화려한 기교의 설아를 보다가, 잔뜩 긴장해서 또박또박 가사를 읽는 보윤의 모습이 신선하고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태인은 박수를 치며 즐거워했다.
6. 달아오르는 취기
노래가 끝나고 보윤이 얼굴이 빨개져서 자리에 앉자, 태인이 술잔을 건넸다.
"잘했어. 귀여웠다. 자, 마셔."
보윤은 부끄러움을 잊기 위해 독한 코냑을 단숨에 들이켰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뜨거운 액체.
빈속에 들어간 1,200만 원짜리 술은 빠르게 혈관을 타고 돌았다.
머리가 핑 돌고, 시야가 기분 좋게 흐릿해졌다.
"한 잔 더?"
설아가 웃으며 다시 잔을 채워주었다.
알딸딸한 취기가 올라오자, 긴장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맨살에 닿는 스커트의 감촉도, 허벅지 사이가 휑한 느낌도, 왠지 모르게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노래방 조명이 사이키델릭하게 돌아가고, 빵빵한 사운드가 심장을 울렸다.
태인의 손이 자연스럽게 보윤의 어깨를 감싸 안았지만, 보윤은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할 타이밍을 놓쳤다.
이제 이 방 안의 공기는 완벽하게 데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