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걸스 토크
1. 남겨진 둘
"나 화장실 좀. 둘이 얘기 좀 하고 있어."
태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 쪽으로 사라졌다.
북적거리는 펍의 소음 속에 여자 둘만 남겨졌다.
보윤은 태인이 사라지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대신, 다리를 더욱 꽉 꼬았다.
그가 없으니 긴장이 풀리기는커녕, 옆에 앉은 설아의 시선이 더 부담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설아는 맥주잔을 우아하게 기울이며, 오프숄더 니트 위로 드러난 하얀 어깨선을 으쓱했다.
"보윤아, 재미없어?"
훅 들어오는 질문에 보윤이 화들짝 놀랐다.
"어? 아, 아니... 아니야. 재미있어."
"표정이 영 아닌데? 하긴, 태인 오빠가 좀 느끼하긴 하지. 말도 많고."
설아는 피식 웃으며 감자튀김 하나를 입에 쏙 넣었다.
오물거리는 입술이 붉고 탐스러웠다.
"아냐, 진짜 그냥... 회사 일이 좀 힘들어서 그래."
"으, 직장인. 대단하다. 난 아침에 일어나는 거 죽어도 못 하는데."
설아는 턱을 괴고 보윤을 신기한 동물 보듯 쳐다봤다.
악의는 없어 보였지만, 그 시선은 보윤의 겉모습뿐만 아니라 속사정까지 꿰뚫어 보는 듯해 불안했다.
2. 연결 고리
"근데 지은이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야?"
설아가 화제를 돌렸다.
보윤은 잠시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취업 스터디에서 만났어. 그때 지은이가 날 많이 챙겨줬거든..."
보윤은 씁쓸하게 대답했다.
그때는 합격만 하면 인생이 탄탄대로일 줄 알았다.
이렇게 회사 책상 밑에서 상사의 성기를 빨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아~ 취업 스터디? 열심히 살았네, 우리 보윤이."
설아는 '얌전한 고양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며 눈을 반달처럼 휘었다.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는 뒷말을 생략한 뉘앙스였다.
"너는? 지은이랑 어떻게 알게 됐어?"
보윤이 용기 내어 되물었다.
"나? 음... 라운지 바에서? 지은이가 노는 거 좋아하잖아. 건너 건너 아는 오빠들이랑 놀다가 합석했는데, 성격이 시원시원해서 금방 친해졌지."
설아는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그녀의 말속에 등장하는 '아는 오빠들', '라운지 바', '합석'.
그 단어들이 내포하고 있는 은밀하고 방탕한 세계가 그려졌다.
보윤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도 이제 그 세계의 공범이 되어버렸으니까.
"그때 지은이가 취해서 나한테 그랬거든. 너처럼 사는 게 부럽다고."
설아는 자신의 풍만한 가슴을 당당하게 펴고 테이블 위에 놓인 샤넬 백을 톡톡 두드렸다.
"응. 뼈 빠지게 공부하고 스펙 쌓아서 겨우 취직해봤자, 매일 야근에 월급은 쥐꼬리만 하잖아. 스트레스는 엄청 받고."
설아는 보윤의 퀭한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근데 난 그냥 예쁘게 꾸미고, 맛있는 거 먹고, 사진 좀 찍어 올리면 돈이 들어오니까. 멍청한 남자들이 알아서 갖다 바치고."
그녀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삶이 훨씬 효율적이고 똑똑한 선택이라는 확신이 차 있었다.
"어릴 땐 나도 너네처럼 사는 게 정답인 줄 알았어. 근데 살아보니까 아니더라. 가진 거라곤 몸뚱이 하나뿐인데, 이거라도 비싸게 팔아먹어야지. 안 그래?"
설아의 말은 보윤의 가슴을 후벼 팠다.
보윤은 '성실하게' 살아서 대기업에 들어왔다.
하지만 결과는 무엇인가? 낮에는 박 차장의 책상 밑에서, 밤에는 윤 대리의 모텔 침대에서 '공짜로' 몸을 유린당하고 있다.
반면 설아는 자신의 몸을 '비싸게' 팔아 명품을 두르고 대우받으며 살고 있다.
'내가... 바보인 건가.'
보윤은 스커트 아래, 정액이 말라붙어 쩍쩍거리는 허벅지를 움켜쥐었다.
수치심과 함께 묘한 패배감이 밀려왔다.
"보윤아, 너 향수 뭐 써?"
설아가 갑자기 보윤의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어...?"
보윤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냄새가 나서 묻는 건가? 정액 냄새가 들켰나?
"아니, 그냥. 너한테서 되게 은은하고 좋은 냄새 나서."
설아는 보윤의 목덜미 근처에서 킁킁거리더니 미소를 지었다.
"머스크? 살 냄새 같기도 하고. 되게 청순하다, 너."
보윤은 안도감과 동시에 극심한 괴리감을 느꼈다.
아침에 뿌린 향수의 잔향이 아직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보윤이 느끼기엔, 그 향수 냄새보다 다리 사이에서 올라오는 비릿한 밤꽃 냄새가 훨씬 진동하고 있었다.
"그냥... 올리브영에서 샀어..."
"그래? 나중에 나도 알려줘. 난 좀 진한 거 쓰거든."
설아는 자신의 손목을 코끝에 대보았다.
그녀에게서는 명품 브랜드 특유의 화려하고 관능적인 꽃향기가 났다.
화려한 오프숄더 니트를 입고 좋은 향기를 풍기는 설아.
겉옷 속엔 속옷도 입지 않고, 허벅지에 말라붙은 정액을 감추고 있는 보윤.
둘은 마주 보고 웃고 있었지만, 보윤은 자신이 설아 옆에 있는 오물 덩어리처럼 느껴졌다.
"근데 보윤아."
설아가 맥주잔을 뱅글뱅글 돌리며, 뜸을 들이듯 운을 뗐다.
"너 저번에 그 파티... 처음 아니지?"
"......어?"
보윤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최대한 잊으려고 노력했던 그날 밤의 기억.
약에 취해 수많은 남자들에게 돌림빵을 당하고, 짐승처럼 엉겨 붙었던 난교의 현장.
"아, 아니... 나 진짜 처음이었어. 캔디가 그런 건 줄도 몰랐고..."
보윤이 손을 내저으며 다급하게 해명하려 했다.
자신이 원해서 간 게 아니라는 사실을, 억지로 당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라도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설아는 보윤의 말을 '겸손'이나 '내숭' 쯤으로 받아들인 듯 피식 웃었다.
"에이, 거짓말. 처음이라기엔 너무 잘 놀던데?"
3. 배운 변태
설아는 턱을 괴고 보윤을 빤히 바라보며 눈을 반짝였다.
"와, 진짜 사람은 겉만 봐선 모른다니까. 이렇게 얌전하고 청순하게 생겨서는... 공부도 잘하고 대기업 다니는 엘리트가, 밤에는 그렇게 변할 줄 누가 알았겠어?"
그녀의 말투에는 악의가 없었다.
오히려 순수한 감탄에 가까웠다.
"우리 같은 애들이야 뭐, 원래 노는 거 좋아하니까 그렇다 쳐도. 너는 잃을 것도 많은 애가 더 과감하더라? 역시 머리 좋은 애들이 호기심도 더 많나 봐."
"아니야, 설아야... 그게 아니라, 나는..."
보윤은 입술을 달싹였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약 때문이었어. 강제로 먹인 약 때문에...'
이 말을 해야 하는데, 설아의 확신에 찬 눈빛을 보니 목구멍이 턱 막혔다.
만약 약 이야기를 꺼낸다면? 태인이 알게 된다면? 그리고 설아가 '그럼 왜 신고 안 했어?'라고 묻는다면?
수만 가지 공포가 보윤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날 너 진짜 섹시했어. 남자 셋이 붙어서 하는데도 지치지도 않고... "
설아의 칭찬은 보윤에게 끔찍한 모욕이자, 지울 수 없는 낙인이었다.
설아는 감자튀김을 입에 넣으며 말을 이었다.
"부럽다, 성보윤. 난 먹고살려고 이 바닥에서 구르는 건데, 너는 번듯한 직장도 있으면서 이런 데까지 와서 즐기는 거잖아."
설아는 보윤의 '일탈'을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아닌, 가진 자들의 여유로운 취미 생활로 해석하고 있었다.
"낮에는 커리어 우먼, 밤에는 난교 파티의 여왕. 크~ 진짜 인생 다 가졌네."
"아니야..."
보윤은 고개를 숙였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자신은 상사들의 정액받이 노예가 되어 하루하루 말라가고 있는데, 남들 눈에는 '쾌락과 성공을 모두 거머쥔 여자'로 보인다는 사실이 너무나 비참했다.
스커트 아래, 허벅지에 말라붙은 정액 껍질이 살을 찌르는 듯 따가웠다.
이 더러운 흔적조차, 설아의 눈에는 '즐기다 묻은 영광의 상처' 쯤으로 보일까?
"왜 그래? 부끄러워? 하긴, 맨정신에 얘기하려니 좀 그렇긴 하겠다."
설아는 보윤의 반응을 수줍음으로 해석하고 어깨를 툭 쳤다.
"걱정 마. 우리끼린데 뭐 어때. 앞으로 자주 같이 놀자."
보윤은 이제 해명할 의지마저 잃었다.
아무리 아니라고 외쳐봤자, 이미 설아의 머릿속에 보윤은 '밤의 여왕'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오해를 풀기엔, 보윤의 몸과 영혼은 이미 너무 깊은 수렁에 빠져 있었다.
"어, 오빠 온다."
설아의 시선이 입구를 향했다.
화장실을 다녀온 태인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걸린 만족스러운 미소가, 보윤을 향한 소유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보윤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체념한 눈으로 다가오는 포식자를 바라보았다.
4. 족쇄
"자, 이제 일어날까? 2차 가야지."
보윤은 이때다 싶어 쭈뼛거리며 가방을 챙겼다.
"저... 저는 내일 출근도 해야 하고 몸도 좀 안 좋아서... 먼저 들어가 볼게요."
최대한 정중하고 단호하게 거절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태인은 손목시계를 톡톡 두드리며 능글맞게 웃었다.
"에이, 보윤아. 지금 밤 9시밖에 안 됐어. 초등학생도 아니고 벌써 들어간다고?"
"그래, 보윤아. 오랜만에 만났는데 너무하다. 우리 버리고 갈 거야?"
옆에서 설아가 보윤의 팔짱을 끼며 매달렸다.
그녀의 풍만한 가슴이 보윤의 팔에 닿아 뭉개졌다.
"내가 오늘 진짜 좋은 데 데려가려고 예약까지 다 해놨단 말이야. 오늘 술값, 안주 값 다 내가 쏜다. 넌 그냥 와서 비싼 거 먹고 즐기기만 하면 돼."
태인이 쐐기를 박았다.
돈, 시간, 그리고 친구의 호소.
삼박자가 보윤을 압박했다.
"진짜 딱 한 잔만 더 하고 가. 응? 너 가면 나 태인 오빠랑 단둘이 있어야 한단 말이야. 어색하게 시리. 한번만 도와주라~ 응? 응?"
설아가 귓속말하듯 속삭이며 보윤을 잡아끌었다.
결국 보윤은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거절을 못 하는 성격, 그것이 보윤의 가장 큰 죄였다.
5. 루이 13세
대리기사는 없었다. 맥주는 음료수라고 떵떵거리더니, 태인은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
차는 청담동의 화려한 골목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간판도 없이 육중한 철문으로만 되어 있는, 멤버십으로 운영되는 최고급 프라이빗 라운지였다.
발렛 파킹을 맡기며 차에서 내리자, 설아는 기다렸다는 듯 태인의 팔에 매달렸다.
"오빠, 여기 위스키 라인업 죽이잖아. 나 오늘 그거 마셔도 돼?"
설아는 태인의 어깨에 턱을 괴고, 눈을 반짝이며 애교를 부렸다.
"그거? 뭐?"
"알면서~ '루이 13세'! 저번에 인스타 보니까 들어왔던데. 응? 나 그거 딱 한 잔만 마셔보고 싶어. 사줘, 응?"
하지만 태인은 쿨하게 웃으며 설아의 엉덩이를 툭 쳤다.
"어우, 우리 설아 눈 높은 거 봐라. 그래, 오늘 보윤이도 왔는데 그 정도는 까야지. 기분이다!"
"꺄! 오빠 최고! 역시 태인 오빠밖에 없어!"
설아는 뛸 듯이 기뻐하며 태인의 볼에 쪽 소리 나게 키스했다.
자본과 욕망이 거래되는 그 노골적인 현장에서, 보윤은 낡은 코트 자락을 여미며 투명 인간처럼 뒤를 따랐다.
스커트 안쪽, 엉덩이 골을 타고 흐르는 찝찝한 액체의 감촉만이 그녀가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임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VIP 룸으로 모시겠습니다."
정장 차림의 웨이터가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그들을 맞이했다.
복도는 어둡고 조용했다.
발소리조차 먹어버리는 두툼한 카펫을 밟으며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달칵, 묵직한 방음 문이 열렸다.
"와..."
보윤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내부는 술집이라기보다 호텔 스위트룸에 가까웠다.
은은한 간접 조명이 대리석 테이블을 비추고 있었고, 벽면을 가득 채운 대형 스크린에서는 재즈 공연 실황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중앙에 놓인 거대한 'ㄷ'자 형태의 가죽 소파였다.
성인 대여섯 명이 누워도 충분할 만큼 넓고 푹신해 보였다.
방 한쪽에는 꽤 넓은 개별 화장실까지 딸려 있었다.
'화장실... 씻을 수 있어.'
보윤은 화장실 문을 보자마자 구원받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저기 들어가서 대충이라도 씻고 싶다는 욕망이 강렬하게 솟구쳤다.
"앉아, 앉아. 편하게 있어."
태인은 상석에 털썩 주저앉으며 재킷을 벗어 던졌다.
"분위기 죽인다. 그치 보윤아?"
설아는 신이 나서 소파 위를 방방 뛰더니, 자연스럽게 태인의 옆에 딱 붙어 앉았다.
"어... 응... 좋네."
보윤은 쭈뼛거리며 두 사람과 조금 떨어진 소파 끝자락에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걸쳤다.
차가운 에어컨 바람이 땀과 정액으로 젖은 보윤의 몸을 식혔다.
쾌적하고 고급스러운 향기가 감도는 이 밀실.
하지만 문이 닫히고 '철컥'하고 잠기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보윤은 직감했다.
이곳은 화려한 파티룸이 아니라, 도망칠 곳 없는 황금빛 감옥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