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현실로의 귀환
1. 기상
"으윽... 머리야..."
깨질 듯한 두통과 함께 눈이 떠졌다.
천장이 핑핑 돌았다. 입안은 사막처럼 바싹 말라 있었고, 목구멍에서는 신물 넘어오는 냄새가 났다.
보윤은 신음하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전신을 두들겨 맞은 듯한 근육통과 함께 다리 사이에서 끔찍한 통증이 밀려왔다.
"아악...!"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다시 침대 위로 고꾸라졌다.
그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고급스러운 호텔 스위트룸. 하지만 바닥에는 다 마신 샴페인 병과 찢어진 콘돔 포장지, 엉겨 붙은 휴지 뭉치들이 쓰레기장처럼 널려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덩그러니 남겨진 건 발가벗은 채 널브러진 자신뿐이었다.
'어제... 무슨 일이...'
약 기운이 빠져나가면서, 억눌려 있던 기억의 파편들이 폭력적으로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으으! 좋아! 다 들어와!"
남자 셋, 여자 셋이 뒤엉켜 짐승처럼 교미하던 광경.
"설아야... 너 젖 진짜 커... 맛있어..."
자신이 낯선 여자의 가슴을 탐욕스럽게 빨고, 다리 사이를 비비며 가위치기를 하던 감촉.
"입 벌려! 받아먹어!"
남자들이 뱉어내는 정액을 받아먹으며 히죽거리던 자신의 얼굴.
"우욱... 욱...!"
보윤은 입을 틀어막고 헛구역질을 했다.
꿈이 아니었다.
자신이 스스로 옷을 벗고, 약을 먹고, 음탕한 암캐가 되어 난교 파티의 중심에 서 있었다는 사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수치심과 자기혐오가 쓰나미처럼 밀려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보윤은 떨리는 손으로 침대 밑에 떨어져 있던 휴대폰을 주워 들었다.
액정을 켜는 순간, 보윤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오후 2:41]
"미... 미쳤어..."
아침 9시도, 10시도 아닌 오후 2시가 넘었다.
오전 회의, 점심시간, 그리고 오후 업무 시간까지 훌쩍 넘긴 시간.
단순한 지각이 아니었다.
무단결근
대한민국 직장인에게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단어였다.
휴대폰 상단바에는 빨간색 부재중 알림과 노란색 카톡 알림이 터질 듯 쌓여 있었다.
[부재중 전화 14통]
[카카오톡 42개]
가해자들의 공포
보윤은 공포에 질려 알림 목록을 내렸다.
부재중 전화는 대부분 '박 차장님'과 '윤 대리'였다.
단순히 화가 나서 건 전화가 아니었다. 그녀가 전화를 받지 않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메시지의 내용은 점점 험악하고 기괴하게 변해 있었다.
[박민석 차장님] [08:50] : 성 주임, 어디야? 오늘 아침에 내 방으로 오라고 했잖아.
[박민석 차장님] [09:30] :전화 왜 안 받아? 늦으면 늦는다고 보고를 해야 할 거 아냐.
[박민석 차장님] [11:00] : 야 성보윤. 너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무단결근이 장난이야?
(부재중 전화 4통 연속)
[박민석 차장님] [13:10] : 야, 너 혹시 딴마음 먹었냐? 어제 일 때문에 시위하는 거야? 아프면 말을 해. 사람 불안하게 만들지 말고.
[박민석 차장님] [14:00] : 성보윤. 나 더 이상 커버 못 쳐준다. 신고니 뭐니 헛짓거리 할 생각 말고 당장 연락해. 니 인생 여기서 종치기 싫으면.
박 차장의 문자는 분노로 시작해, 보윤이 혹시라도 자살하거나 노동청에 신고했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이기적인 공포로 변해 있는 것 처럼 보였다.
윤 대리의 카톡은 더 노골적이고 거칠었다.
[윤 대리님] [09:10] : 야 성 주임. 출근 안 하냐? 전화 받아.
[윤 대리님] [10:20] : 차장님 지금 개빡치셨어. 분위기 파악 안 돼? 빨리 튀어와라.
[윤 대리님] [11:40] : 야. 너 일부러 전화 씹냐? 어제 외근 나가서 좀 굴렸다고 지금 시위해?
[윤 대리님] [12:50] : 좋게 말할 때 전화해라. 너 딴 데 가서 어제 일 가지고 입 털면 죽는다 진짜.
[윤 대리님] [13:30] : 객기 부리지 말고 연락하라고.
그는 보윤을 걱정하는 척조차 하지 않았다.
어제 자신이 찍은 영상이나 강요 행위가 들통날까 봐, 혹은 보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해서 자신이 덤터기를 쓸까 봐 미친 듯 불안해 보였다.
"어떡해... 어떡해..."
보윤은 덜덜 떨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자신은 피해자였다. 억지로 끌려가고, 강제로 당하고, 약물까지 투여당했다.
하지만 보윤의 머릿속에는 분노 대신 죄책감과 공포가 먼저 자리 잡았다.
그녀는 자신을 망가뜨린 지은에게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지은에게서는 카톡 하나 와 있지 않았다.
보윤이 보낸 [지은아... 나 지금 일어났어...]라는 메시지 옆의 '1'은 사라지지 않았다.
철저하게 이용당하고 버려졌다.
2. 망가진 껍데기
"가야 돼... 회사 가야 돼..."
보윤은 울면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허벅지 사이에서는 말라붙은 정액과 애액이 우수수 떨어졌고, 엉덩이와 허벅지 안쪽은 누군가에게 맞고 꼬집힌 멍 자국으로 얼룩덜룩했다.
비틀거리며 욕실로 들어가 거울을 본 순간, 보윤은 주저앉고 말았다.
"아......"
거울 속 여자는 성보윤이 아니었다.
헝클어진 머리, 퀭한 눈, 그리고 목덜미와 가슴팍에 새겨진 수십 개의 붉은 키스 마크와 이빨 자국들.
누가 봐도 밤새 짐승처럼 뒹굴다 온 창녀의 몰골이었다.
이 몸으로 회사에 간다고? 저 마크들을 다 가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웃으며 "죄송합니다, 늦잠 잤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불가능했다.
보윤은 차가운 욕실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앙! 흐윽... 으흑..."
그녀의 사회적 생명은 어젯밤 그 호텔 방에서 끝장나 있었다.
휴대폰은 여전히 박 차장의 전화를 알리며 윙윙거리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목을 조르는 시한폭탄의 카운트다운처럼.
3. 도피
보윤은 도망치듯 호텔을 빠져나왔다.
남들이 볼세라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택시에 올라탔다.
택시 기사가 백미러로 힐끔거리는 시선조차 마치 자신의 벗은 몸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아 몸이 덜덜 떨렸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보윤은 현관문에 주저앉았다.
익숙한 공기, 익숙한 냄새. 하지만 안도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은 다 헐어서 쓰라렸고, 허벅지 안쪽은 누군가가 꼬집고 깨문 멍 자국으로 엉망이었다.
거울을 볼 용기도 나지 않았다. 보윤은 씻지도 못한 채 침대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가 몸을 웅크렸다.
휴대폰을 쥔 손바닥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박 차장에게 뭐라고 답장을 해야 할까.
'너무 아파서 응급실에 갔다고 할까? 아니면...'
어떤 변명을 해도 '무단결근'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게다가 어제 윤 대리와 외근을 나갔다가 연락이 두절된 상태.
그들이 마음만 먹으면 보윤을 회사에서 매장시키는 건 일도 아니었다.
지이잉- 지이잉-
그때, 다시 한번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
[박민석 차장님]
보윤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번엔 피할 수 없었다.
안 받으면 더 큰 사달이 날 게 분명했다.
보윤은 심호흡을 하려 했지만, 폐가 찢어질 듯 아파 쇳소리만 새어 나왔다.
"여... 여보세요..."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수화기 너머로 고막을 찢는 듯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야!! 성보윤!! 너 미쳤어?!"
"......"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전화를 이제 처받아! 너 진짜 회사 잘리고 싶어서 환장했냐? 내가 우스워? 어제 윤 대리랑 외근 나갔다가 뭐 했길래 이 사단이야!"
박 차장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평소 같으면 죄송하다며 빌었겠지만, 지금 보윤은 입을 뗄 힘조차 없었다.
"죄... 송합니다... 차장님... 으윽..."
보윤이 겨우 내뱉은 목소리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밤새 비명을 지르고 신음을 흘리느라 성대는 완전히 긁혀 있었고, 쇳소리가 섞인 끔찍한 파열음이었다.
누가 들어도 당장 죽어가는 중환자의 목소리였다.
그러자 길길이 날뛰던 박 차장의 목소리가 순간 뚝 멈췄다.
"어...? 뭐야. 너 목소리가 왜 그래?"
"죄송합니다... 몸살이... 너무 심하게 와서... 약 먹고 기절해 있었습니다..."
보윤은 마른침을 삼키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방금... 이제야 눈을 떴습니다... 연락 못 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사실이기도 했다.
약물과 섹스에 절어 기절해 있었고,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죽어가고 있었으니까.
보윤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끝이다. 욕설이 날아오고, 내일 당장 시말서를 쓰라고 하겠지. 아니면 징계위원회에 회부되거나.
하지만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아... 뭐야. 아픈 거였어?"
박 차장의 목소리에서 날 선 분노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대신 그 자리에 기묘한 '안도감'이 들어찼다.
"난 또... 너 어제 일 때문에 딴마음 먹고 잠수탄 줄 알았네."
"......네?"
"하긴, 윤 대리 그 새끼가 좀 거칠게 굴리긴 하지. 어제 밖에서 무리하게 시켰나 보구만."
박 차장은 혼자 납득하며 혀를 찼다.
그는 보윤이 '아파서' 결근했다는 사실에 오히려 안심하고 있었다.
보윤이 어제 윤 대리에게 당한 가혹 행위 때문에 앙심을 품고 노동청에 신고하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알았어. 아파서 뻗은 애 붙잡고 뭐라 하겠냐."
박 차장의 말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그 부드러움은 보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오늘은 내가 인사팀 김 대리한테 잘 말해서 개인 연차 쓴 걸로 처리해 줄게. 무단결근으로 올라가면 너나 나나 피곤해지니까."
"가... 감사합니다... 차장님..."
"대신, 집에서 푹 쉬고 몸조리 잘해. 괜히 밖에서 엉뚱한 소리 나오게 하지 말고. 어?"
그 말속에 담긴 뼈 있는 경고.
'네가 쓰러지거나 입을 잘못 놀려서 일이 커지면 내가 곤란해지니까, 차라리 집에서 입 다물고 회복해라.'
그는 보윤을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자신의 '장난감'이 고장 나서 탈이 날까 봐 관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내일도 상태 봐서 영 아니다 싶으면 억지로 기어 나오지 말고 미리 연락해. 다 죽어가는 꼴로 와서 사람들 입방아 찧게 만들지 말고. 알았지?"
"네... 알겠습니다... 내일은 꼭 출근하겠습니다..."
"그래, 쉬어라."
뚝.
전화가 끊겼다.
보윤은 다시 침대 속으로 머리를 파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