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길들여진 짐승
1. 어둠 속의 구조 신호
박 차장과의 통화가 끊긴 후, 보윤은 시체처럼 침대에 누워 있었다.
방 안의 불은 켜지 않았다.
어둠 속에 있어야만 자신의 더러워진 몸뚱이가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하아... 하아..."
숨을 쉴 때마다 갈비뼈가 아려왔고, 다리 사이는 불에 데인 듯 화끈거렸다.
하지만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괴로운 것은 밀려오는 자괴감이었다.
약에 취해 낯선 남자들에게 다리를 벌리고, 여자들과 몸을 비비며 짐승처럼 울부짖던 기억.
그것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사실이 보윤의 목을 졸랐다.
'나 이제 어떡해... 진짜 타락한 건가...'
그때, 침대 맡에 던져둔 휴대폰이 다시 한번 진동했다.
지이잉-
액정에 뜬 이름은 [지은이]였다.
보윤은 망설였다.
지은이 자신을 이런 구렁텅이에 빠뜨렸다는 원망이 들면서도, 지금 이 상황을 유일하게 공유하고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 또한 지은이뿐이라는 모순적인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 여보세요."
"언니! 일어났어?"
수화기 너머 지은의 목소리는 너무나 밝고 명랑했다.
마치 주말 브런치를 즐기고 난 사람처럼 상쾌한 톤이었다.
"나 완전 기절했잖아. 방금 일어나서 마사지 받고 이제 폰 봤어. 연락 안 돼서 걱정했지? 미안해~"
지은의 태평한 목소리에 보윤은 맥이 탁 풀렸다.
"지은아... 나 몸이 너무 안 좋아... 그리고..."
보윤은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나 어제 미쳤었나 봐. 기억도 잘 안 나는데... 내가 막 이상한 짓 하고... 약 같은 거 먹고... 나 무서워, 지은아."
보윤이 공포심을 드러내자, 지은이 부드럽게 말을 받았다.
"에이, 언니. 왜 그래~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지은은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 조곤조곤한 말투로 보윤을 위로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처음에 그 '캔디' 접했을 때 언니처럼 무서웠어. 근데 막상 해보니까 별거 아니더라고. 그냥 술 좀 세게 마신 느낌? 기분만 엄청 좋아지고 뒤끝도 없잖아."
"하... 하지만..."
"언니 그동안 회사 때문에 스트레스 엄청 받았지? 사람이 어떻게 평생 참고만 살아? 가끔은 그렇게 뇌를 싹 비우고 풀어줘야 다시 살 힘이 생기는 거야."
지은은 어젯밤의 집단 난교와 마약 투여를 단순한 '스트레스 해소용 일탈'로 포장했다.
"그거 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파티할 때 가볍게 하는 거야. 안전한 거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나도 요즘 스트레스받을 때마다 가끔 하는데, 하고 나면 오히려 머리가 맑아지더라."
"......정말?"
"그럼. 내가 언니한테 설마 나쁜 걸 권하겠어? 언니가 어제 너무 힘들어 보여서, 딱 하루만이라도 천국 보여주고 싶어서 그런 거지."
보윤의 마음이 흔들렸다.
자신이 범죄를 저지른 게 아니라, 그저 남들 다 하는 '조금 과한 음주'를 했을 뿐이라고 믿고 싶었다.
지은의 말은 그런 보윤의 도피 심리를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그래도... 어제는 좀 너무 과하게 논 것 같아서..."
보윤이 어젯밤의 수위를 떠올리며 웅얼거리자, 지은이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 아 언니. 어제 좀 과하긴 했지? 나도 인정! 우리 다 삘 받아서 미친 듯이 놀긴 했어."
지은은 쿨하게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부끄러운 일이 아닌 '즐거운 추억'으로 치환했다.
"근데 언니, 어제 언니 진짜 매력 쩔었어. 거기 있던 사람들이 다 언니만 쳐다봤잖아."
"......"
"우리가 뭐 죄지었어? 성인 남녀끼리 합의하고 재밌게 논 건데 뭐 어때. 안 그래?"
지은은 보윤이 죄책감을 가질 틈을 주지 않고, 자연스럽게 화제를 전환했다.
"아, 그리고 언니. 어제 같이 논 사람들, 그냥 쌩양아치들 아니야. 다들 진짜 대단한 사람들이야."
"대단한... 사람들?"
"응. 태인 오빠 알지? 그 오빠 아버지가 강남에 빌딩만 세 채야. 본인도 사업 크게 하고 인스타 팔로워가 몇만인데. 그리고 설아 언니도 유명한 쇼핑몰 CEO고."
지은은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나열하며 보윤의 허영심을 자극했다.
"그런 사람들이 아무나랑 어울리겠어? 급이 맞고 말이 통하니까 같이 논 거지. 걔네들 입 무겁고 깔끔해. 뒤탈 같은 거 절대 없어."
보윤은 묘한 안도감과 함께 우쭐함을 느꼈다.
자신을 괴롭히던 박 차장이나 윤 대리 같은 '꼰대'들과는 차원이 다른, 세련되고 잘나가는 '상류층'들과 어울렸다는 사실이 보윤의 낮은 자존감을 채워주었다.
"태인 오빠가 언니 진짜 마음에 들어 하더라 조만간 또 보고 싶다던데?"
"진짜...? 나 같은 걸..."
"언니가 뭐 어때서! 언니 대기업 다니는 엘리트잖아. 자부심을 가져."
지은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암튼 언니, 괜히 죄책감 갖지 말고 푹 쉬어. 어제 일은 그냥... 우리끼리의 화끈한 비밀 파티였다고 생각하자. 알았지?"
"응... 고마워, 지은아."
"그래, 내일 또 연락할게. 사랑해 언니!"
전화가 끊겼다.
방 안의 공기가 한결 가벼워진 것 같았다.
'그래... 지은이 말대로야.
별거 아니야.
그냥 술 먹고 필름 끊긴 거랑 비슷한 거야.'
보윤은 지은이 심어준 논리로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박 차장의 노리개가 되어 억지로 당하는 고통스러운 섹스가 아니라, 잘나가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즐긴 '화끈한 파티'였다고.
보윤은 이불을 끌어당겨 덮었다.
여전히 몸은 욱신거렸지만, 마음만은 기묘하게 편안해졌다.
2 .껍데기뿐인 아침
다음 날 아침.
거울 속에 비친 여자는 산송장이나 다름없었다.
퉁퉁 부은 눈, 핏기 없는 입술, 푸석한 피부.
화장으로 아무리 덮어보려 해도,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퀭한 눈동자는 가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차라리 다행이었다.
아프다고 둘러대기엔 완벽한 몰골이었으니까.
보윤은 셔츠의 단추를 목 끝까지 채웠다.
키스 마크와 이빨 자국들이 목덜미와 쇄골 라인에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하아..."
한숨을 쉬며 옷을 챙겨 입던 보윤의 손이 속옷 서랍 앞에서 멈칫했다.
일반적인 직장인이라면 당연히 브래지어와 팬티를 꺼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보윤의 뇌는 순간적으로 다른 계산을 하고 있었다.
'만약... 차장님이 검사라도 하면?'
출근하자마자 화장실이나 비상계단으로 불러내서, "오늘 입고 왔네? 건방지게."라며 윽박지르고 그 자리에서 벗기려 든다면?
상식적인 사고라면 '직장에 속옷을 입고 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야 했다.
하지만 이미 박 차장의 가스라이팅에 절여진 보윤의 뇌는 '덜 혼나는 쪽'을 선택하고 있었다.
탁.
보윤은 꺼냈던 속옷을 다시 서랍에 처박았다.
맨살 위에 까슬한 와이셔츠가 닿자, 어젯밤의 혹사로 잔뜩 예민해진 유두가 쓸리며 찌릿한 자극을 줬다.
아래 또한 허전했다.
슬랙스와 셔츠 차림이지만, 그 속은 언제든 남자의 성기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변기'나 다름없었다.
이 음란하고 비참한 상황에 익숙해져, 스스로 노브라 노팬티를 선택한 자신에게 깊은 자괴감이 밀려왔다.
3. 헛된 기대와 통보
"주임님, 괜찮으세요? 안색이 너무 안 좋은데..."
"아... 네. 몸살기가 좀 있어서요."
팀원들의 걱정에 보윤은 힘없이 웃어넘겼다.
내심 기대도 했다.
이렇게까지 아파 보이는데, 설마 인간이라면 오늘은 건드리지 않겠지.
오늘은 온전히 일만 하다가 퇴근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 기대는 오전 10시, 사내 메신저 알림음과 함께 산산이 조각났다.
[박민석 차장] : 점심 같이 먹게 12시에 팀장실 말고 지하주차장으로 바로 내려와.
내 차로 이동한다.
보윤은 모니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거부? 회피? 그런 선택지는 애초에 없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조건반사적으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성보윤 주임] : 네, 알겠습니다.
탐색을 위한 점심
박 차장의 차는 회사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국밥집으로 향했다.
그는 보윤의 상태를 살피듯 힐끔거리며 숟가락을 들었다.
"어제 대체 윤 대리랑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애가 하루 만에 완전 맛이 갔네."
걱정보다는 탐색에 가까운 질문이었다.
윤 대리가 무리한 요구를 해서 보윤이 탈이 난 건지, 아니면 다른 사고가 있었던 건지 '리스크'를 확인하려는 태도.
보윤은 국밥을 깨작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냥... 업무가 좀 많아서 피곤했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진짜 아픈 거 맞아? 꾀병 아니고?"
"아닙니다... 진짜 몸이 좀..."
어젯밤 약에 취해 난교를 벌였다는 사실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보윤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박 차장은 보윤이 얌전히 대답하자, 별일 없다는 듯 안심한 표정으로 식사를 마쳤다.
식사가 끝나자마자, 박 차장의 차는 자연스럽게 핸들을 꺾었다.
보윤은 묻지 않았다.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하러 가는지.
차는 회사 근처의 낡고 싼 대실 모텔의 주차장 가림막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익숙했다.
키를 받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복도를 지나 304호 문을 여는 그 모든 과정이.
마치 출근 카드를 찍고 자리에 앉는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럽고 기계적인 흐름이었다.
보윤은 반항은커녕 박 차장의 보폭에 맞춰 얌전히 따라 걷고 있었다.
4. 길들여진 짐승
철컥.
문이 닫히자마자 박 차장은 재킷을 벗어 던지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후우, 피곤하네."
그는 보윤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벗으라고 명령하지도, 씻으라고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보윤의 몸은 이미 '학습'되어 있었다.
그녀는 박 차장의 눈치를 보며,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툭, 투둑.
단추가 풀리고 셔츠 자락이 벌어졌다.
속옷을 입지 않은 탓에, 아무런 방해물 없이 보윤의 가슴이 그대로 드러났다.
"......"
보윤은 방 안의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셔츠 사이로 쏟아져 나오듯 드러난 거대하고 육덕진 유방.
어제오늘의 혹사로 인해 유두는 퉁퉁 부어올라 있었고, 뽀얀 가슴 피부 위에는 붉은 실핏줄이 비칠 정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F컵에 육박하는 묵직한 유방은 중력에 따라 출렁이며 아래로 처졌지만, 그 무게감이 주는 압도적인 볼륨감은 오히려 더 야릇하고 음탕해 보였다.
박 차장의 시선이 보윤의 가슴에 꽂혔다.
그의 눈빛이 탐욕스럽게 번들거리는 것을 보며, 보윤은 셔츠를 어깨 아래로 완전히 흘러내리게 했다.
두 팔을 뒤로해 셔츠를 벗자, 거대한 두 덩어리가 탄력 있게 튀어 올랐다가 다시 묵직하게 출렁거렸다.
"하..."
보윤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혼나기 싫어서, 빨리 끝내고 싶어서.
제 손으로 옷을 벗고, 상사에게 가슴을 내보이며 다리를 벌릴 준비를 하는 자신.
강간에 무뎌지고, 성 노리개가 된 현실에 완벽하게 적응해 버린 자신의 모습이 거울 속에 있었다.
박 차장이 피식 웃으며 손짓했다.
"이리 와."
보윤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박 차장에 대한 공포보다, 길들여진 짐승처럼 꼬리를 치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억울함과 분노가 치밀어 올라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그녀의 발은 이미 침대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