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낯선 환대
1. 공포의 알림음
집으로 돌아온 보유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배게에 머리를 박고 시체처럼 누워있었다.
지잉- 지잉-
정적을 깨고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보윤의 몸이 감전된 듯 튀어 올랐다.
공포가 심장을 조여왔다. 윤 대리가 영상을 벌써 보낸 것일까? 아니면 박 차장이 내일 아침 호출을 미리 보낸 것일까?
확인하고 싶지 않았지만, 확인하지 않으면 더 끔찍한 일이 벌어질 거라는 학습된 공포가 그녀의 손을 움직였다.
액정을 켜자, 의외의 이름이 떠 있었다.
[김지은]
보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김지은] : 언니! 뭐해? 퇴근했어?
[김지은] : 나 오늘 성수동 핫플 갔다가 줄 서서 먹는 소금빵 샀거든. 언니 빵 좋아하잖아 생각나서 샀어 ㅎㅎ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메시지.
오늘 하루 노리개 취급만 당했던 보윤에게, '빵을 좋아하는 언니'로 대해주는 지은의 문자는 눈물겹도록 다정하게 느껴졌다.
경계심이 조금 녹아내린 듯 한 기분이 들었다.
[성보윤] : 어... 퇴근했어. 고마워 지은아 ㅠㅠ 역시 너밖에 없다...
보윤은 코를 훌쩍이며 답장을 보냈다.
[김지은] : 그치? 나밖에 없지? ㅋㅋ 그래서 말인데, 나 지금 언니네 집 근처 지나가는 길이거든!
[김지은] : 빵 식으면 맛없어. 지금 주고 갈게. 잠깐 얼굴 보자!
보윤은 당황했다. 지금 시간은 밤 10시가 넘었다.
게다가 지금 자신의 몰골은 엉망진창이었다. 퉁퉁 부은 눈, 헝클어진 머리, 넋이 나간 표정. 누구를 만날 상태가 아니었다.
[성보윤] : 어? 지금? 너무 늦었는데... 그리고 나 오늘 너무 피곤해서 꼴이 말이 아니야 ㅠㅠ 내일 주면 안 될까?
보윤은 애둘러 거절의 의사를 표했다.
하지만 지은은 물러서지 않았다.
[김지은] : 에이~ 우리 사이에 쌩얼이 무슨 상관이야! 나 이미 언니네 빌라 1층 도착했어!
[김지은] : 올라가긴 좀 그러니까 언니가 내려와. 1분이면 돼! 얼른!
이미 와 있다는 말에, 보윤의 거절 의사는 힘을 잃었다.
자신을 위해 일부러 들렀다는 친구를 그냥 돌려보내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무엇보다 유일하게 자신을 챙겨주는 지은이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하아..."
보윤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입고 있던 옷을 벗고 대신 푹 눌러쓴 모자 위에 후드를 뒤집어썼다.
마스크로 부운 얼굴을 최대한 가리고,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2. 이질적인 무리
1층 공동 현관문을 열고 나가자, 차가운 밤공기가 훅 끼쳐왔다.
"언니! 여기야!"
가로등 아래, 지은이 명품 쇼핑백을 흔들며 서 있었다.
그런데 지은은 혼자가 아니었다.
"야, 김지은. 너네 언니가 이 사람이야?"
지은의 곁에는 낯선 남자 셋과 여자 한 명이 더 있었다.
하나같이 인스타그램이나 패션 잡지에서 튀어나온 듯 화려하고 세련된 차림새였다.
반짝이는 액세서리, 짙은 화장, 몸에 딱 붙는 힙한 의상들.
회색 츄리닝 바람에 슬리퍼를 끌고 나온 보윤과는 완벽하게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 같았다.
"어... 누구..."
보윤이 당황해 뒷걸음질 치려 하자, 지은이 달려와 보윤의 팔짱을 꼈다.
"아, 내 친구들이야! 근처에서 술 마시다가 언니 줄 빵 전해주러 같이 왔어."
지은은 보윤을 무리 앞으로 끌고 갔다.
"인사해. 여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우리 보윤 언니. 대기업 다니는 엘리트야. 언니, 여긴 내 친구들."
"안녕하세요~"
옆에 있던 여자가 껌을 씹으며 보윤을 위아래로 훑었다.
마스크와 모자에 가려져 있어도, 그녀의 초라한 행색을 간파한 듯한 묘한 눈빛이었다.
3. 조우
그때, 남자들 무리 뒤쪽에 서 있던 한 명이 앞으로 쓱 나섰다.
큰 키에 날카로운 눈매, 찢어진 청바지에 가죽 재킷을 걸친 남자였다.
잘생겼지만 어딘가 모르게 불량하고 위험해 보이는, 소위 말하는 '양아치 상'의 미남이었다.
그는 보윤을 보자마자 입꼬리를 매력적으로 말아 올렸다.
"오... 지은이가 말한 언니가 이분이시구나."
남자는 보윤에게 다가와 살갑게 고개를 숙였다.
"반갑습니다. 태인이라고 합니다. 지은이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가려도 미인이시네요."
"아... 네, 안녕하세요..."
보윤은 기어들어가듯 대답하며 시선을 피했다.
태인이라 불린 남자의 눈빛이 너무 강렬했다.
호기심과 욕망이 섞인 눈으로 보윤의 마스크 너머를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저희 지금 근처 라운지 바에 2차 하러 가는 길이거든요."
태인이 자연스럽게 본론을 꺼냈다.
"누나도 시간 괜찮으시면 같이 가시죠. 저희끼리만 놀기 좀 심심했는데, 대기업 엘리트 누님도 오시면 딱 좋겠네."
"네? 아, 아니에요. 저는..."
보윤은 손사래를 쳤다.
오늘 겪은 지옥 같은 일들로 멘탈은 가루가 되었다.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건 시끄러운 술자리가 아니라 고요한 어둠 속에서의 휴식이었다.
"저는 오늘 너무 피곤해서... 그리고 내일 출근도 해야 하고..."
"에이~ 내일 연차 쓰면 되죠. 직장인들 원래 술심으로 다니는 거 아닙니까?"
태인 옆에 있던 다른 남자가 낄낄거리며 거들었다.
"딱 한 잔만 해요. 지은이 친구면 우리 친구지. 네?"
보윤이 계속 머뭇거리자, 지은이 보윤의 등을 찰싹 때리며 부추겼다.
"언니! 그러지 말고 가자! 집에 있어 봤자 우울하기만 하지. 기분 전환해야지."
"지은아, 나 진짜 오늘은 좀 그래. 꼴도 이렇고..."
"모자 썼으니까 괜찮아! 그리고 여기 오빠들이 언니 스타일 좋다고 난리잖아."
지은은 보윤의 귓가에 대고 은밀하게 속삭였다.
"저기 태인 오빠가 언니 마음에 드나 봐. 계속 쳐다보는 거 봤어? 저 오빠 팔로워 20만 넘는 셀럽이야. 오늘만 눈 딱 감고 놀자. 응? 내 체면 좀 살려줘."
"야, 김지은. 누나 불편해하시잖아. 너무 그러지 마."
태인이 짐짓 매너 있는 척 지은을 말렸지만, 그의 몸은 이미 보윤의 퇴로를 막고 있었다.
그는 보윤에게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낯선 남자의 향수 냄새가 훅 끼쳤다.
"그래도... 아쉬운데. 그냥 가볍게 칵테일 한 잔 정도는 괜찮으시잖아요? 제가 쏠게요."
태인이 보윤의 어깨를 살짝 감싸 쥐었다.
"가자, 가자! 언니 없으면 우리도 안 가!"
"그래요, 누나. 같이 가요! 저희 나쁜 사람들 아니에요~"
주변에서 바람을 잡으며 보윤을 에워쌌다.
마치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는 조각배처럼, 보윤의 의지는 그들의 환호성에 묻혀버렸다.
거절하면 지은이 실망할 것이라는 두려움, 그리고 이 화려한 무리에 속하면 잠시나마 비참한 현실을 잊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도피 심리가 고개를 들었다.
"......그럼, 딱 한 잔만이야."
보윤이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이자, 환호성이 터졌다.
"역시! 쿨하시네!"
"가자! 태인이 형, 누나 에스코트 잘해!"
지은은 승리감에 도취된 표정으로 보윤의 한쪽 팔을 잡았고, 반대쪽에서는 태인이 보윤의 허리를 자연스럽게 받쳤다.
보윤은 자신이 원했던 소금빵은 지은의 손에 들려 잊힌 채, 원치 않는 화려한 네온사인 속으로 질질 끌려들어 갔다.
4. 물 위의 기름
쿵, 쿵, 쿵.
심장을 때리는 베이스 음악과 붉은 조명이 흐르는 홍대의 라운지 바.
보윤은 소파 가장 구석진 자리에 몸을 구겨 넣고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수십만 원짜리 샴페인과 과일 안주가 화려하게 세팅되어 있었지만, 보윤의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물 위에 뜬 기름 방울 같았다.
지은과 친구들은 가죽 재킷, 노출이 심한 드레스, 풀 메이크업으로 무장한 채 음악에 맞춰 리듬을 타고 있었고, 보윤은 회색 후드 집업에 모자를 푹 눌러쓴 초라한 행색이었다.
누가 봐도 어울리지 않는 조합.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질감이 보윤을 이 무리의 주인공으로 만들고 있었다.
"언니, 대기업 다니면 진짜 힘들죠? 드라마처럼 막 상사가 서류 집어 던지고 그래요?"
지은의 친구인 여자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
보윤은 샴페인 잔을 만지작거리며 힘없이 대답했다.
"...그냥, 버티는 거죠."
오늘 하루, 서류가 아니라 자신의 몸이 집어 던져졌던 기억이 떠올라 목이 메었다.
보통의 술자리라면 분위기가 가라앉았겠지만, 이곳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와... 대박. '버티는 거죠'래. 진짜 쿨하다."
"역시 멘탈이 다르네. 우리 같았으면 벌써 때려치우고 인스타에 저격 글 올렸을 텐데."
친구들은 보윤의 무기력하고 건조한 태도를 '어른의 여유'나 '시크함'으로 멋대로 해석하고 소비했다.
지은도 옆에서 의기양양하게 거들었다.
"내가 말했잖아. 우리 언니가 원래 속이 깊고 진국이라니까. 너네랑 레벨이 달라."
보윤은 씁쓸한 미소를 지을 힘조차 없었다.
자신은 그저 영혼이 다 타버린 재에 불과한데, 이들은 그것을 보고 '분위기 있다'며 손뼉을 치고 있었다.
"누나, 왜 그렇게 구석에 쳐박혀 있어요?"
어느새 태인이 자리를 옮겨 보윤의 바로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허벅지가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
그는 보윤의 뒤쪽 소파 등받이에 팔을 턱 하니 걸쳤다. 마치 보윤을 가두는 듯한 자세였다.
"이거 한 잔 마셔요. 여기 시그니처인데 달달해요."
태인이 보윤의 잔에 칵테일을 따라주며 피식 웃었다.
"근데 누나 오늘 컨셉이 뭐예요? 노숙자?"
"......네?"
"농담이에요, 농담. 다들 힘 빡 주고 꾸미고 왔는데, 누나만 이러고 있으니까 오히려 튀고 좋은데? 내추럴하고."
태인의 말투는 친절한 듯하면서도, 묘하게 선을 넘나드는 가벼움이 있었다.
그는 보윤을 존중해서 말을 건다기보다, 신기한 구경거리를 탐색하는 어린아이 같은 태도였다.
"제가 원래 진한 화장 싫어하거든요. 저기 쟤네들 봐요. 다 똑같이 생겼잖아."
그는 턱짓으로 지은과 친구들을 가리키며 킬킬거렸다.
"근데 누나는 좀 다르네. 쌩얼인데도 뭔가... 사연 있어 보이고."
태인은 보윤의 모자 챙을 검지로 톡톡 건드려 살짝 들어 올렸다.
보윤이 놀라 고개를 뒤로 빼자, 그는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눈이 되게 슬퍼 보이네. 오늘 무슨 안 좋은 일 있었어요? 남자친구랑 헤어졌나?"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회사에서 깨졌어? 아까 버티는 거라고 했잖아."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지만, 태인의 어조는 너무나 가볍고 장난스러웠다.
마치 남의 불행을 가십거리로 소비하려는 듯한 태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보윤은 그 가벼움에 조금 안도했다.
박 차장이나 윤 대리의 끈적하고 집요한 폭력성보다는, 차라리 이런 의미 없는 가벼움이 숨 쉬기 편했다.
"누가 괴롭히면 말해요. 내가 가서 아주 묵사발을 내줄 테니까."
태인은 허세를 부리며 잔을 부딪쳐 왔다.
"짠. 마시고 털어버려요. 여기선 아무 생각 안 해도 되니까."
보윤은 홀린 듯 잔을 들어 입에 댔다.
달콤하고 독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근데 누나, 술 들어가니까 볼 빨개지는 거 귀엽다."
태인이 보윤의 어깨를 툭 치며 귓속말을 했다.
"오늘 집에 가지 마요. 나랑 좀 더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