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하이에나의 후각
1. 친절한 포식자
오전 11시 50분.
사무실 벽시계의 초침이 12시를 향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직장인들에게는 하루 중 가장 기다려지는 점심시간이었지만, 보윤에게는 가장 고통스럽고 피하고 싶은 형벌의 시간이었다.
"야, 오늘 점심 뭐 먹지? 저번에 그 파스타 집 갈까?" "좋지. 아, 근데 거기 줄 길잖아. 그냥 쌀국수 먹을까?"
동기들은 삼삼오오 모여 메뉴를 고민하며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파티션 구석에 처박혀 있는 보윤에게는 말을 걸지 않았다.
마치 그녀의 자리에 투명한 유리 벽이라도 세워진 것 같았다.
아니, 보윤 스스로가 세상과 단절된 벽을 쌓고 그 안에 숨어 있었다.
'배고픈데... 식당 가면 마주치겠지. 그냥 편의점 가서 대충 때워야겠다...'
보윤은 동기들이 다 나갈 때까지 숨죽여 기다리다가, 사무실이 텅 비자 그제야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그때였다.
"성보윤 씨, 점심 약속 있어?"
등 뒤에서 들려온 굵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보윤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박민석 차장이 서 있었다.
40대 초반의 나이, 배가 나오지 않고 적당히 관리된 체격, 그리고 항상 허허실실 웃는 인자한 인상.
사내에서 '성격 좋은 상사', '젠틀맨'으로 통하는 그였다.
"아... 아니요. 없습니다. 그냥 편의점에서..."
"잘됐네. 혼자 먹지 말고 나랑 같이 가자. 어제 내가 실수 지적한 것 때문에 기 죽어 있는 것 같아서 신경 쓰이더라고. 맛있는 거 사주려고 기다렸지."
때마침 점심을 먹으러 나가던 다른 팀 직원들의 시선이 쏠렸다.
'박 팀장님이 왜 저런 사고뭉치랑?'
'팀장님 진짜 천사네. 저런 애도 챙겨주고.'
호기심과 동정이 섞인 시선들.
보윤은 당황해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거절하고 싶었지만,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무엇보다 어제 자신의 치명적인 실수를 덮어준다는 말에, 그에게 막대한 부채감을 느끼고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보윤은 구부정한 자세로 헐렁한 검은색 카디건을 여미며 박 팀장의 뒤를 따랐다.
그녀는 최대한 몸을 움츠려 자신의 거대한 가슴을 가리려 애썼다.
하지만 걷는 반동에 따라 육중한 유방이 출렁이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박 팀장은 앞서 걷다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이 보윤의 얼굴이 아닌, 카디건 속에서 묵직하게 흔들리는 가슴팍에 머물렀다.
인자하던 그의 눈매가 아주 잠깐, 가늘고 날카롭게 변했다가 다시 사람 좋은 미소로 돌아왔다.
2. 상담
그들이 도착한 곳은 회사 근처의 고급 일식집이었다.
홀이 아닌, 미닫이문이 달린 조용한 룸으로 안내받았다.
외부와 완벽하게 차단된 밀실.
보윤은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지만, 박 팀장은 자연스럽게 가장 안쪽 자리에 앉았다.
"여기 특초밥 정식 두 개 주세요. 제일 좋은 부위로."
박 팀장은 망설임 없이 가장 비싼 메뉴를 주문했다.
"많이 먹어. 보윤 씨 요즘 너무 말랐어. 안색도 안 좋고, 얼굴이 반쪽이네. 밥은 먹고 다니는 거야?"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음식이 나왔지만, 보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깨작거렸다.
목구멍이 꽉 막힌 듯 초밥이 모래알처럼 느껴져 잘 넘어가지 않았다.
박 팀장은 그런 보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걱정스러운 눈빛이었지만, 그 시선의 끝은 젓가락질을 할 때마다 미세하게 움직이는 보윤의 상체, 정확히는 테이블 위에 올려질 듯한 가슴 부근을 맴돌고 있었다.
"보윤 씨, 요즘 무슨 일 있어? 예전엔 참 밝고 에너지가 넘쳤는데... 요즘은 뭐랄까, 그림자가 져 보여. 보는 내가 다 마음이 아프네."
그 말 한마디에, 꾹꾹 눌러왔던 보윤의 감정이 터질 뻔했다.
아무도 물어봐 주지 않았던 말.
'무슨 일 있냐'는 그 평범하고 다정한 질문이, 고립된 섬에 갇혀 있던 보윤의 가슴을 예리하게 후벼 팠다.
"아니에요... 그냥 좀...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요."
보윤이 울먹임을 참으며 대답했다.
박 팀장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빙그레 웃었다.
"흐음, 개인적인 사정이라. 남자친구랑 헤어졌나?"
보윤이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박 팀장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구먼. 원래 그 나이 때는 사랑 때문에 울고 웃고 하는 거지. 세상이 다 무너진 것 같고, 나만 불행한 것 같고. 나도 다 겪어봐서 알아. 많이 힘들겠네. 혼자 끙끙 앓느라 얼마나 아팠어."
그는 보윤의 사정을 다 꿰뚫어 본다는 듯, 너그럽고 이해심 깊은 어른의 태도를 취했다.
해주와 지은에게 버림받고, 동료들에게 무시당하던 보윤에게, 그의 '이해'는 너무나 달콤한 마약 같았다.
경계심이 스르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 사람은 어른이다. 내 철없는 또래들과는 달라. 내 아픔을 알아주는 진짜 어른이다.'
"네... 좀 힘들어서... 그래서 자꾸 실수하고, 업무에도 지장을 줘서 죄송해요.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에이, 죄송하긴. 사람인데 그럴 수 있어. 기계도 고장 나는데 사람은 오죽하겠어. 내가 다 커버해 줄 테니까 너무 걱정 마. 보윤 씨는 원래 능력 있잖아. 잠깐 지친 것뿐이야. 내가 기다려 줄게."
'내가 다 커버해 줄 테니까.' 과거, 지은이가 보윤에게 했던 말과 비슷했다.
그때는 구원인 줄 알았지만 파멸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지금 보윤은 판단력을 잃은 상태였다.
거센 파도 위에서 표류하던 난파선이, 눈앞에 나타난 거대한 바위에 닻을 내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바위가 암초일지라도.
3. 시선의 감촉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박 차장이 물을 마시며, 테이블 너머로 보윤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숨기지 않고 노골적으로.
"근데 보윤 씨, 왜 그렇게 덥게 입고 다녀? 밖은 30도가 넘는데. 그 두꺼운 가디건, 안 더워?"
"아... 제가 추위를 좀 타서요. 그리고 그냥 이게 편해서..."
보윤은 본능적으로 가디건 깃을 더 꽉 잡았다.
"그래? 내가 보기엔 너무 답답해 보여서 그래. 보윤 씨는... 가진 게 많은 사람이잖아. 좀 더 당당하게 다녀도 되는데. 왜 자꾸 감추려고 해?"
가진 게 많은 사람. 그 말이 업무 능력을 뜻하는 건지, 아니면 카디건 속에 억지로 구겨 넣은 이 지긋지긋하고 육중한 육체를 뜻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박 팀장의 시선이 보윤의 목덜미를 지나, 쇄골 아래, 카디건 단추 틈새로 비집고 나오려는 하얀 가슴골에 꽂혔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크게 오르내리는 것이 느껴져 얼굴이 화끈거렸다. '보고 있어... 내 가슴을 보고 있어.'
보통이라면 불쾌함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했다.
소름이 끼쳐야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거부감보다 안도감이 먼저 들었다.
비틀린 안도감이었다.
'적어도 이 사람은 나를 무시하지 않아. 투명 인간 취급하지 않아. 나를 여자로 쳐다봐 주고 있어.'
보윤은 지은과 해주에게 '쓸모없는 고기' 취급을 당하며 자존감이 바닥을 친 상태였다.
그래서 이 끈적하고 음흉한 시선조차, 자신을 향한 '관심'과 '인정'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가디건을 여미던 손에 힘을 아주 살짝 풀었다.
4. 밀실의 공모
계산을 마치고 룸을 나오는 길.
박 팀장은 좁은 복도에서 자연스럽게 보윤의 등 뒤로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힘내. 너무 기죽지 말고.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나한테 와서 털어놓고. 알았지? 나는 항상 열려 있어."
그의 손이 보윤의 어깨에 머무르는 시간이 묘하게 길었다.
단순한 격려의 토닥임이 아니었다.
두툼하고 뜨거운 손바닥의 열기가 얇은 가디건 너머로 생생하게 전해졌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보윤의 브래지어 끈이 지나가는 견갑골 부근을 지그시, 마치 근육을 풀어주듯 주물러 눌렀다.
"으힉..."
보윤은 움찔하며 몸을 굳혔다.
척추를 타고 전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이거... 좀 과한 거 아닌가? 스킨십이 좀...' 하지만 그녀는 피하지 않았다.
어깨를 빼면 그가 무안해할까 봐, "팀장님 호의를 무시하냐"며 화를 낼까 봐, 그래서 다시 자신을 미워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네... 네... 정말 감사합니다, 팀장님."
"그리고 오늘 밥 먹은 건,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하자. 다른 직원들이 알면 편애한다고 질투할라. 내가 보윤 씨 특별히 아끼는 거 알면 곤란하잖아."
박 팀장이 검지 손가락을 자신의 입술에 대며 윙크했다.
비밀.
둘만의 비밀을 공유한다는 것.
그것은 두 사람 사이를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특별하게 묶어주는 끈 같았다.
보윤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비밀로 할게요."
사무실로 돌아가는 엘리베이터 안.
점심시간이 끝나가 사람들로 북적였다.
박 팀장은 자연스럽게 보윤의 뒤에 섰다.
사람들에게 밀려 두 사람의 몸이 닿을 듯 가까웠다.
보윤은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상을 보았다.
박 팀장의 시선이 보윤의 뒷모습을, 펑퍼짐한 옷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그녀의 잘록한 허리와 골반 라인, 그리고 엉덩이를 집요하게 훑어보고 있는 게 보였다.
하지만 보윤은 모른 척했다.
아니, 모른 척하고 싶었다.
이 좁고 차가운 회사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실수를 덮어주고, 비싼 밥을 사주고, "특별히 아낀다"고 말해준 사람이다.
그가 자신을 조금 쳐다본다고 해서, 어깨를 조금 주물렀다고 해서, 그걸 성추행이라며 밀어낼 수 있을까?
그러면 내 편은 정말 아무도 남지 않는데?
보윤은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자신의 굽은 등을 보며 생각했다.
'다행이다... 그래도 나를 챙겨주는 사람이 있어서. 아직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의 검은 그림자가 자신의 몸을 완전히 덮치고, 서서히 집어삼키고 있다는 사실을, 보윤은 애써 외면하며 사무실로 발을 내디뎠다.
늑대의 소굴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양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