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고립된 섬
1. 갑옷이 벗겨진 자리
월요일 아침 7시 30분, 지옥철이라 불리는 2호선 출근길.
빼곡하게 들어찬 사람들 틈에 낀 보윤은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낯설었다. 아니, 너무나 익숙해서 소름 끼치도록 끔찍했다.
지난 1년 동안 보윤을 화려하게 감싸주던 갑옷, 지은이가 골라줬던 그 '전투복'들은 모두 옷장 가장 깊은 구석에 처박혔다.
대신 보윤은 무릎까지 내려오는 펑퍼짐한 검은색 니트 카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안에 입은 티셔츠도 목이 다 늘어난 헐렁한 것이었다.
그녀는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등을 구부정하게 말고 있었다.
어떻게든 거대하게 튀어나온 가슴을 가리기 위해서였다.
지하철이 흔들릴 때마다 가슴이 출렁이는 것이 느껴져 수치스러웠다.
'보지 마... 아무도 내 몸 보지 마...'
해주와 헤어지고 난 뒤,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예리한 칼날처럼 느껴졌다.
지은이 코디해 준 옷을 입고 당당하게 걸을 때는, 그 시선들이 '부러움'이나 '동경'이라고 착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갑옷이 벗겨진 지금, 보윤은 안다.
그들은 그저 '주인에게 버림받은 젖소'가 어떻게 망가져 가는지, 그 비대한 살덩이가 얼마나 흉물스러운지 구경하고 조롱하고 있을 뿐이라는 걸.
그녀는 고개를 푹 숙여 얼굴을 가리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노래는 나오지 않았다. 배터리는 진작에 방전되어 있었다.
그저 세상의 소음을 차단하고, "저 여자 가슴 봐"라고 수군거리는 환청을 막기 위한 귀마개일 뿐이었다.
2. 시스템 오류
오전 10시, 사무실 보윤의 자리.
모니터 화면 속 엑셀 파일의 숫자들이 하얀 개미 떼처럼 보였다.
글자들이 춤을 추듯 일렁거렸다.
집중이 되지 않았다.
뇌가 물 먹은 솜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아무런 연산도 할 수 없었다.
"성보윤 씨."
옆자리 김 대리가 보윤의 파티션을 볼펜으로 톡톡 쳤다.
신경질적인 소리였다.
"네? 네..."
보윤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김 대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모니터를 가리켰다.
"이거 주간 보고서, 수치가 다 틀렸는데요? 지난달 데이터 그대로 복사해서 붙여넣기 하셨네요. 날짜도 안 바꾸고."
"아... 죄송합니다. 제가 정신이 없어서...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오후 2시 전략 회의, 회의실 예약 안 해놨어요? 팀장님이 아까부터 찾으시던데. 보윤 씨 요새 왜 그래요?"
아차. 까먹었다.
입사 초기, 빠릿빠릿하고 센스 있어서 일 잘한다고 칭찬받던 '에이스 신입 성보윤'은 죽었다.
해주가 떠나면서 그녀의 영혼도 함께 데려가 버렸다.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건 나사가 다 빠져 덜그럭거리는 고철 로봇뿐이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하겠습니다..."
보윤은 고장 난 앵무새처럼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하며 허둥지둥 키보드를 두드렸다.
손이 떨려 오타가 계속 났다.
김 대리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한숨을 푹 쉬고 돌아섰다.
그 한숨 소리가 보윤의 뒤통수를 쇠망치로 때리는 것 같았다.
'쟤 요즘 왜 저래? 실연당했다더니 완전 맛 갔네.'
'원래 저런 애였나 봐. 남자 하나 때문에 공사 구분도 못 하고.'
'일 못하면 얼굴이라도 밝게 하고 다니지, 음침해서 재수 없어.'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보윤은 책상 아래로 기어들어가 숨고 싶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영원히 갇혀버리고 싶었다.
3. 닿을 수 없는 위로
점심시간.
보윤은 동기들과 밥을 먹으러 가지 않고, 아무도 오지 않는 13층 비상구 계단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식욕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녀는 멍하니 핸드폰 화면만 바라보았다.
징- 카톡 알림이 떴다.
[지은]: 언니, 밥 먹었어? 나 오늘 볼일 있어서 강남 넘어가는데, 저녁에 퇴근하고 잠깐 볼까?
[지은]: 내가 진짜 맛있는 거 사줄게! 우리 언니 기분 전환 좀 시켜줘야지. 술도 한잔하고! 콜?
지은의 카톡.
예전 같으면 보윤은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응! 좋아! 빨리 보고 싶어!"라며 꼬리를 흔들고 나갔을 것이다.
지은이 품에 안겨 엉엉 울며, 해주 개자식 욕을 하고 위로받았을 것이다.
지금도 그러고 싶었다.
미치도록 그러고 싶었다.
너무 외로워서, 너무 비참해서, 가슴속에 쌓인 이 썩은 감정들을 누구에게라도 털어놓고 싶었다.
세상에 내 편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는 걸 확인받고 싶었다.
하지만, 지은이의 얼굴을 보는 순간 자신이 와르르 무너질 것 같았다.
가서 뭐라고 할까? "해주가 나 찼어. 내가 우울해서 질린대. 매력 없대." 그 말을 하면 지은이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겉으로는 "어머, 그 새끼 미친 거 아니야? 언니가 얼마나 예쁜데!"라며 같이 욕해주고 슬퍼하는 척하겠지.
하지만 속으로는? '거봐, 병신 같은 년. 주제 파악 못하더니 꼴좋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해주 오빠는 이제 내 거야.' 라며 쾌재를 부르고 비웃지 않을까.
보윤은 그 이중적인 시선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혼자 썩어가는 게 나았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답장을 썼다.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다 가장 건조한 문장을 골랐다.
[보윤]: 미안... 나 요즘 야근이 너무 많아서 시간 안 될 것 같아. 당분간 좀 바쁠 듯. 다음에 보자.
[전송] 버튼을 누르자마자 눈물이 핑 돌았다.
보윤은 스스로 유일한 친구를, 세상과의 마지막 연결 고리를 끊어냈다.
이제 진짜 혼자다.
이 넓은 서울 하늘 아래, 1,000만 명이 사는 이 도시에서, 성보윤의 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완벽한 고립이었다.
4. 무채색의 귀가
퇴근길. 강남의 거리는 네온사인으로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람들의 옷차림은 알록달록했고, 가게마다 흘러나오는 최신 유행가는 경쾌했다.
하지만 보윤의 눈에는 모든 풍경이 채도가 빠진 흑백 영화처럼 보였다.
벚꽃색이었던 사랑도, 형광색이었던 우정도 다 불타 사라지고, 남은 건 시커먼 재뿐이었다.
그녀는 편의점에 들러 컵라면 하나와 소주 한 병을 샀다.
계산대 알바생인 남자가 펑퍼짐한 카디건 속에서도 감춰지지 않는 보윤의 거대한 가슴을 힐끔 쳐다봤다.
노골적인 시선이었다.
예전 같으면 불쾌함에 몸을 떨거나 가방으로 가렸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힘조차 없었다.
'봐라, 봐. 어차피 고깃덩어리인데. 맘껏 봐라. 침이라도 뱉어주던가.'
집에 돌아와 불도 켜지 않고 바닥에 앉았다.
전기포트에서 라면 물이 끓는 소리만 적막을 채웠다.
방 안을 둘러보았다. 해주가 사줬던 목걸이, 지은이가 골라준 원피스들.
방 안 곳곳에 그들의 흔적이 지뢰처럼 깔려 있었다.
어디를 밟아도 터질 것 같았다.
"하아..."
보윤은 소주병을 따서 종이컵에 따르지도 않고 병째 들이켰다.
쓴 알코올이 식도를 타고 내려갔지만 취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무릎을 끌어안고 웅크렸다.
거대한 가슴이 무릎에 눌려 찌그러지고 짓이겨졌다.
무거웠다.
이 징그럽게 큰 몸뚱이도, 자신의 비참한 삶도, 배신의 기억도.
모든 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웠다.
누군가 자신을 이 늪에서 좀 꺼내줬으면 좋겠다.
아니, 차라리 누가 와서 자신을 완전히 부서뜨려 줬으면, 가루로 만들어 바람에 날려줬으면 좋겠다.
그럼 차라리 편해질 텐데.
5. 포식자의 발소리
그때였다. 바닥에 널브러진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징-
보윤은 기대하지 않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지은이의 답장일까? 아니면 혹시 해주가 다시 연락한 걸까? 하지만 액정에 뜬 이름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사내 메신저 알림 - 박민석 차장]
[박민석 차장]: 성보윤 씨, 늦은 시간에 미안해. 아까 보니까 안색이 많이 안 좋아 보이던데... 오늘 실수한 거 때문에 마음 쓰이지? 너무 걱정 마. 누구나 그럴 때가 있는 거야. 나도 신입 때는 더 많이 실수했어.
[박민석 차장]: 자책하지 말고 푹 쉬어. 내일 점심이나 같이 하자.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힘내고.
박민석 차장.
입사하고 나서 복도에서 몇 번 마주쳤지만, 팀이 달라 인사만 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최근 인사 이동으로 보윤네 팀 팀장으로 부임한 사람이었다.
사람 좋기로 소문난 평판, 항상 넉살 좋은 웃음.
그의 프로필 사진 속, 등산을 하며 환하게 웃고 있는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가 눈에 들어왔다.
평소라면 상사의, 그것도 팀장의 사적인 연락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하고 선을 그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고립된 섬에 갇혀 굶어 죽어가던 보윤에게 그 메시지는 하늘에서 내려온 구조 신호처럼 보였다.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는데, 모두가 나를 비웃는데, 유일하게 나를 걱정해 주는 어른.
'내 실수를... 혼내는 게 아니라 덮어주려는 건가? 나를... 걱정해 주는 건가? 나 아직 쓸모없는 인간은 아닌 건가?'
보윤의 메마른 마음에 아주 작은 파동이 일었다.
그것은 희망이라기보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생존 본능이었다.
보윤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답장을 보냈다.
[보윤]: 감사합니다, 팀장님... 신경 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그것이 구조선이 아니라, 그녀의 남은 영혼마저 약탈하러 오는 해적선이라는 것을 알기에는, 보윤의 영혼은 너무나 허기지고 지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