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유통기한 만료
1. 식어빠진 커피
주말 오후 2시, 강남의 한 프랜차이즈 카페.
통유리창 너머로는 주말을 즐기는 연인들과 친구들이 쉴 새 없이 지나다녔다.
다들 웃고 떠들며 생기가 넘쳤다.
오직 창가 구석 자리, 보윤과 해주의 테이블만이 흑백 영화처럼 채도가 빠져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납덩이처럼 무거운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
보윤의 컵에 담긴 얼음은 이미 다 녹아버려, 커피는 밍밍하고 맛없는 갈색 흙탕물처럼 변해 있었다.
컵 표면에 맺힌 물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려 바닥에 흥건한 고인 물을 만들었다.
마치 보윤의 속마음처럼.
해주는 등받이에 깊게 기대앉아 팔짱을 낀 채, 보윤이 아닌 창밖의 풍경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미간은 미세하게 찌푸려져 있었고, 손가락은 팔뚝을 톡톡 두드리며 초조함을 드러냈다.
보윤은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플라스틱 빨대만 만지작거렸다.
빨대 끝이 씹혀서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말해야 하는데...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하지만 목구멍이 접착제로 붙은 듯 떨어지지 않았다.
해주의 저 건조한 표정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침묵이 그를 더 짜증 나게 한다는 것을 알기에, 보윤은 쥐어짜듯 입을 열었다.
"해주 씨... 많이 지루하죠? 미안해요. 제가 요즘 통 할 말이 없어서... 회사 일이 바빠서 그런가 봐요."
보윤이 눈치를 보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해주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보윤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 비 오는 날 우산을 씌워주던 그 다정함, 꽃다발을 들고 고백하던 그 반짝임, 호텔 침대 위에서 나를 여신처럼 받들던 그 경이로움은 온데간데없었다.
지금 그의 눈동자에 담긴 것은 오직 지루함, 짜증, 권태, 그리고 깊은 경멸이었다.
마치 상한 음식을 보는 듯한 눈빛.
"보윤 씨."
해주의 목소리가 건조하게 갈라져 나왔다.
"네...?"
"우리, 그만하자."
2. 반품 사유
예상했던 말이었다.
아니, 어쩌면 3개월 전부터 기다려왔던 사형 선고였다.
하지만 막상 귀로 듣고 나니 심장이 발바닥 밑으로 철렁 내려앉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세상이 핑 도는 현기증이 일었다.
보윤은 떨리는 손을 테이블 아래로 숨겨 허벅지를 꼬집으며 물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하려 애썼다.
"...왜요? 갑자기... 제가... 제가 뭘 잘못했나요?"
해주는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푹 쉬며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잘못? 그래, 잘못이라면 잘못이지. 보윤 씨, 솔직히 말해서 요즘 본인 꼴을 좀 봐요. 거울 안 봐요? 매력이라곤 하나도 없어."
"......"
"예전엔 안 그랬잖아. 잘 웃고, 리액션도 좋고, 내 말이면 다 좋아해주고. 같이 있으면 내가 힘이 났어. 근데 요즘은?"
해주는 보윤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비난을 쏟아냈다.
"맨날 세상 다 산 사람처럼 우울한 표정에, 말수도 없고, 툭하면 한숨이나 쉬고. 데이트 나와서도 축 처져 있고. 무엇보다 침대에서는..."
해주는 잠시 말을 멈추고 주변을 의식하더니, 몸을 앞으로 숙여 낮게 속삭였다.
"목석같잖아. 내가 애무를 해도 반응도 없고, 억지로 하는 사람처럼 굴고. 시체랑 하는 기분이야. 같이 있으면 나까지 기분 다운돼서 미칠 것 같아."
해주는 보윤의 가슴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시선을 돌렸다.
"솔직히 말할게. 질려. 사람이 이렇게 음침해서야 어디다 쓰겠어? 내가 연애를 하는 건지, 우울증 환자 간병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나도 지쳤어."
보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입술을 깨물어 피 맛이 났다.
그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나는 우울하다. 나는 음침하다. 나는 그를 즐겁게 해주지 못한다.
하지만 그 원인이 너와 지은이의 배신 때문이라는 말은, 차마 목구멍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말해봤자 뭐 하겠는가.
'그래, 나 바람피웠어. 너도 알았어? 근데 어쩌라고? 너 같은 거랑 자느니 지은이랑 자는 게 백배는 더 낫지. 넌 그냥 가슴만 큰 병신이잖아.'
혹시라도 그 입에서 이런 대답이 돌아올까 봐.
그 마지막 확인 사살을 당하면 정말로 숨이 끊어질까 봐, 보윤은 비겁하게 입을 다물었다.
차라리 내가 못난 여자가 되어 헤어지는 편이 덜 아팠다.
3. 추락하는 안도감
"그동안 즐거웠어. 나쁜 기억만 있는 건 아니니까. 더 좋은 사람 만나. 보윤 씨 그 우울함까지 감당해 줄 수 있는 사람으로."
해주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갑을 챙기는 그의 동작에는 1그램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보윤을 내려다보았다.
"아, 그리고 지은이한테는...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말했다고 할게. 보윤 씨 성격에 차였다고 말하기 껄끄러울까 봐. 내가 나쁜 놈 될게."
끝까지 착한 척. 끝까지 배려하는 척.
그는 자신이 보윤과 지은 사이를 갈라놓는 원흉이 아니라, 오히려 두 사람의 우정을 걱정해 주는 제3자인 척했다.
이미 둘이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걸 뻔히 아는데도.
아마 어젯밤 침대에서 지은이와 뒹굴며 "내일 내가 깔끔하게 정리할게."라고 약속했을 것이다.
보윤은 그 역겨운 위선에 구토감이 치밀었지만,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어요. 그동안... 고마웠어요. 해주 씨."
"잘 지내요."
해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카페를 나갔다.
통유리창 너머로 그가 걷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카페를 나서자마자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심각했던 표정이 순식간에 환하게 밝아졌다.
입이 귀에 걸릴 듯 웃으며 통화를 했다.
아마 지은이겠지.
'아. 자기야. 드디어 처리했다. 앓던 이 뺀 것 같아. 속이 다 시원하다. 오늘 파티할까? 호텔 예약해 놨어.' 그런 통화를 하고 있을 것이다.
보윤은 해주의 등 뒤로 사라지는 자신의 1년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플 줄 알았는데, 오히려 명치 끝에서부터 서늘한 안도감이 피어올랐다.
'이제... 연기 안 해도 된다.'
'이제 억지로 웃지 않아도 되고, 사랑받는 척하지 않아도 되고, 비위 상한다는 눈빛을 받으며 다리를 벌리지 않아도 된다.'
그 숨 막히는 인형극이 막을 내렸다.
하지만 안도감 뒤에는 거대한 공허가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사랑은 끝났다.
구원도 끝났다. 나를 지켜주던 방패도, 안아주던 안식처도 모두 가짜였다. 이제 진짜, 완벽하게 혼자다.
4. 폐기물 처리
집으로 돌아온 보윤.
도어락을 열고 들어선 텅 빈 방 안에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해주가 올까 봐 청소해 둔 흔적이 남아 있었다.
보윤은 가방을 바닥에 툭 떨어뜨리고, 옷장 문을 활짝 열었다.
지은이 골라준 화려한 원피스들, 가슴이 깊게 파인 블라우스들.
그리고 서랍장 안에는 해주에게 잘 보이기 위해 샀던 야한 레이스 속옷들, 그가 선물했던 목걸이와 향수.
그 모든 것이 패전의 잔해처럼 널려 있었다.
보윤은 전신 거울 앞에 섰다.
해주가 떠난 후, 거울 속에 남은 것은 '사랑받는 여신'이 아니었다.
그저 영혼은 이미 난도질당해 사라지고, 오직 남자의 욕망을 위해 소비되다 비참하게 남은 껍데기,
'가슴만 무식하게 크고, 쓰임새가 다해 버려진 고깃덩어리' 뿐이었다.
"다... 썼네."
그녀는 사막처럼 메마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싱싱할 때는 맛있게 뜯어먹히고, 이제 맛이 가고 냄새가 나니 가차 없이 폐기 처분되었다.
유통기한이 지난 통조림. 상해버린 우유.
그것이 지금의 성보윤이었다.
그녀는 핸드폰을 켜 갤러리에 들어갔다.
해주와 찍었던 수백 장의 사진들. 벚꽃 아래서 찍은 사진, 한강에서 찍은 사진, 침대에서 찍은 사진. 그녀는 손가락을 움직여 사진들을 삭제했다.
사진이 사라질 때마다 벚꽃색이었던 세상이, 금빛이었던 세상이, 다시 칙칙하고 죽어있는 회색빛으로 되돌아갔다.
징-
적막을 깨고 카톡 알림이 울렸다.
보윤은 흠칫 놀라 화면을 보았다.
[지은]: 언니... 해주 오빠한테 연락받았어. 헤어졌다며? ㅠㅠ (곰돌이가 울고있는 이모티콘)
[지은]: 세상에, 웬일이야. 그렇게 좋아 죽더니 왜 그랬대?
[지은]: 언니 괜찮아? 지금 갈까? 내가 술 사줄까? 오늘 밤새 마시자.
지은에게서 온 카톡.
이것조차 완벽한 연기였다.
위로해 주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해주의 전화를 받고 쾌재를 부르고 있을 것이다.
'꼴좋다. 주제 파악 못하고 나대더니 결국 버림받았네. 병신 같은 년. ㅋㅋㅋ'
그녀의 비웃음 소리가 음성 지원되는 것 같았다.
보윤은 답장을 하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그 역겨운 연극에 장단을 맞춰줄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는 핸드폰의 전원을 꺼버렸다.
화면이 까맣게 죽었다.
이제 세상과 연결된 모든 끈이 끊어졌다.
누군가에게 위로받을 자격도, 힘도 없었다.
보윤은 옷을 벗지 않은 채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갔다.
그녀는 무릎을 가슴까지 끌어당기고, 그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태아처럼 웅크린 자세.
세상으로부터 가장 작아지는 자세.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껍질 속으로 숨어들었다.
보윤은 숨죽여 울지도 않았다.
그저 멍하니 카페의 벽면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녀는 이제 누구도 찾을 수 없는, 지도에서 지워진 고립된 섬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