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메마른 우물
1. 마임
그 지옥 같았던 1주년 기념일 이후, 3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계절은 어느덧 봄에서 여름으로 바뀌어 있었지만, 보윤의 세상은 여전히 한겨울 얼음장 밑이었다.
보윤은 완벽한 연기자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가면을 썼다.
'행복한 여자친구'라는 가면을.
해주를 만나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가 손을 잡으면 깍지를 끼며 마주 잡았다.
그가 "사랑해"라고 속삭이면,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구역질을 삼키며 "나도"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은 영혼이 빠져나간 채 육체만 움직이는 인형극이자,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 마임이었다.
해주는 여전했다.
다정했고, 매너가 좋았고, 완벽했다.
하지만 보윤의 눈에는 이제 그 완벽함 뒤에 숨겨진 악취 나는 실체가 보였다.
해주의 맑은 눈을 볼 때마다, 그 동공 속에 비친 지은의 나신이 오버랩되어 보였다.
해주의 입술이 닿을 때마다, 그 입술이 지은의 유두를 빨고, 지은의 은밀한 곳을 탐했을 장면이 환영처럼 떠올랐다.
'역겨워... 더러워... 토할 것 같아...'
속으로는 하루에도 수천 번 구역질을 하고, 그의 뺨을 때리고 저주를 퍼부었지만, 겉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얌전하고 순종적인 여자친구를 연기했다.
왜냐하면, 이 썩은 동아줄이라도 놓으면 그녀는 다시 우주에 홀로 남겨진 미아가 되니까.
지은이도, 해주도 없는 고립된 무인도.
그 절대적인 고독의 공포가, 썩은 내가 진동하는 이 관계를 억지로 삼키게 만들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속였다.
'내가 모른 척하면 돼. 내가 다 잊으면 돼. 그러면 우리는 다시 행복해질 수 있어.'
2. 고장 난 수도꼭지
습도가 높은 주말 오후.
해주의 오피스텔.
보윤은 그 배신의 장소, 지은과 뒹굴었던 그 곳에 다시 앉아 있었다.
에어컨이 돌아가고 있었지만,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해주는 소파에서 넷플릭스 영화를 보다가,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잡았다.
그의 손이 보윤의 어깨를 감싸고, 목덜미에 뜨거운 숨을 불어넣었다.
"보윤 씨, 이리 와요. 안고 싶어."
해주는 보윤을 자신의 무릎 위에 마주 보게 앉히고, 익숙하게 입을 맞췄다.
그의 혀가 보윤의 입안으로 침범해 들어왔다.
예전 같으면 그의 숨결만 닿아도 아래가 젖으며 몸이 달아오르고, 심장이 터질 듯 뛰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보윤의 몸은 영안실에 안치된 차가운 시체처럼 식어 있었다.
"......"
해주의 손이 보윤의 블라우스 단추를 풀고, 브래지어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가 거칠게 보윤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보윤의 뇌리에 3개월 전 문밖에서 들었던 그 대화가 벼락처럼 스쳤다.
[걔는 그냥... 화장실 변기야. 내가 필요할 때마다 쓰는, 깨끗하게 닦아 놓은 변기.]
[가슴만 큰 젖소잖아. 멍청해서 다루기 쉬워.]
움찔.
보윤의 몸이 반사적으로 튀어 오르며 경직되었다.
트라우마가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하지만 해주는 그녀의 거부 반응을 눈치채지 못한 듯, 아니면 무시한 듯 계속해서 가슴을 주무르고 딱딱하게 굳은 유두를 손가락으로 비틀었다.
"보윤 씨 가슴은 언제 만져도 좋네요. 진짜 부드러워. 이게 내 손맛이지."
'거짓말. 넌 속으로 젖소 같다고, 변기 같다고 비웃고 있잖아.'
보윤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해주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살이 썩어 문드러지고, 구더기가 기어가는 것 같은 환촉이 느껴졌다.
"하지 마요... 해주 씨..."
보윤이 작게 저항했지만, 해주는 듣지 않았다.
이미 욕망에 불이 붙은 그는 보윤을 들어 올려 침대로 데려갔다.
3. 메마른 사막
해주는 보윤을 침대에 거칠게 눕히고, 그녀의 다리를 활짝 벌렸다.
그는 평소처럼 다정하게 전희를 하지 않았다.
이미 1년 3개월이나 된 '익숙한 사이'라는 핑계로, 혹은 보윤을 더 이상 '공들여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기 때문인지, 그는 곧바로 자신의 바지를 내리고 보윤의 속옷을 옆으로 젖혔다.
"넣을게요."
해주는 자신의 팽창한 성기를 보윤의 입구에 맞추고, 단숨에 허리를 밀어 넣었다.
하지만 들어갈 수가 없었다. 보윤의 아래는 바싹 말라 있었다.
물 한 방울 없는 사막처럼 건조하고 뻑뻑했다.
윤활액이 전혀 나오지 않아 입구가 닫혀 있었다.
억지로 밀어 넣으려 하자, 마찰로 인해 살이 찢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아윽! 아파요...! 잠깐만요!"
보윤이 비명을 지르며 해주의 어깨를 힘껏 밀어냈다.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해주는 삽입에 실패하자 인상을 팍 찌푸리며 멈췄다.
그의 얼굴에 짜증이 확 스쳐 지나갔다.
"하아... 씨... 보윤 씨. 왜 그래요, 진짜?"
해주는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성기를 빼냈다.
흥분이 식어버린 그는 보윤을 내려다보며 쏘아붙였다.
"요즘 계속 이러잖아요. 저번에도 그러더니. 집중 안 해요? 내가 애무해주고 만져주는데 느끼지도 않고. 뭐 목석이에요?"
"미안... 미안해요. 제가 요즘 피곤해서... 몸이 잘 안 따라주네요..."
보윤은 이불로 자신의 몸을 가리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사과했다.
"피곤하면 다야? 예전엔 안 그랬잖아. 내 얼굴만 봐도 젖던 사람이 왜 이래? 나한테 마음 식었어요? 다른 남자 생겼어요?"
적반하장.
마음이 식은 건 너잖아.
다른 여자랑 뒹굴면서 나를 변기 취급한 건 너잖아.
나를 더럽힌 건 너잖아.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터질 것 같았지만, 보윤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여기서 진실을 말하면 모든 게 끝장이니까.
"아니에요... 그런 거 절대 아니에요. 그냥... 회사 일이 너무 많아서 스트레스받나 봐요... 죄송해요..."
"아, 진짜 김새네. 됐어요. 하지 마요."
해주는 보란 듯이 한숨을 푹 쉬고는 침대에서 일어나 바지를 주워 입었다.
그는 욕구 불만이 가득한 눈으로, 침대에 덩그러니 누워 있는 보윤을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은 연인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고장 난 가전제품, 혹은 맛이 가서 먹을 수 없는 상한 음식을 보는 눈이었다.
'쓸모없는 고기.'
그가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지만, 그의 눈빛은 명확히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섹스 파트너로서의 기능조차 못 하는 젖소는, 그에게 그저 폐기물일 뿐이었다.
4. 주입
해주는 베란다에 나가 담배를 피우고 돌아왔다.
냄새를 빼지도 않고 침대에 털썩 누워 등을 돌렸다.
보윤은 죄인처럼 조심스럽게 그의 등 뒤로 다가가, 손가락으로 그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해주 씨... 많이 화났어요?"
"화난 게 아니라 답답해서 그래요. 답답해서."
해주는 돌아눕지도 않은 채 차갑게 대답했다.
"보윤 씨, 요즘 너무 우울해 보여요. 알아요? 만날 때마다 표정도 어둡고, 말수도 줄고, 리액션도 없고. 같이 있어도 하나도 안 즐거워요. 내가 알던 그 밝고 사랑스러운 성보윤 어디 갔어요?"
그 밝고 사랑스러운 여자를 죽인 게 누군데. 네가 죽였잖아.
네가 내 영혼을 난도질하고, 내 자존감을 밟아 으깨버렸잖아.
내가 왜 우울해졌는데.
하지만 해주는 끝까지 자신을 '변해버린 여자친구 때문에 힘들어하는 피해자'로 포장했다.
전형적인 가스라이팅이었다.
"노력 좀 해봐요. 연애는 혼자 해요? 나만 노력하면 뭐 해. 보윤 씨가 계속 이러면 나도 지쳐요. 우리가 무슨 권태기 부부도 아니고."
"네... 노력할게요. 제가 더 잘할게요. 미안해요... 화풀어요."
보윤은 이불을 끌어당겨 자신의 처량한 알몸을 가렸다.
거대한 가슴이 중력에 의해 옆으로 퍼졌다. 과거엔 그의 찬사를 받던 가슴이, 이제는 흉물스러운 살덩이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사과했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상처받은 사람이 상처 준 사람에게 "미안하다"고 빌고 있었다.
'내가 잘못한 거야. 내가 티를 내서 그래. 더 완벽하게 속였어야 했는데.'
보윤의 자아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우울하고, 매력 없고, 기능이 고장 난 불량품이라고 스스로 믿게 되었다.
해주와 지은이 주입한 독이, 그녀의 혈관을 타고 온몸에 퍼져 뇌까지 마비시켜 버린 것이다.
5. 부패의 냄새
그날 밤, 보윤은 잠든 해주의 옆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해주는 코까지 골며 세상 편하게 자고 있었다.
그가 뒤척일 때마다, 이불 속에서 미세한 향수 냄새가 올라왔다.
그의 체취가 아닌, 낯설지만 익숙한 복숭아 향. 지은의 향수 냄새였다.
내 상상이 만들어 낸 환취일까, 아니면 진짜일까.
보윤은 코를 막았다.
그 향기가 시체 썩는 냄새처럼 느껴졌다.
협탁 위에 올려둔 해주의 핸드폰 화면이 잠깐 켜졌다.
무음 모드였지만, 어둠 속에서 빛은 선명했다.
보윤은 홀린 듯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잠금 화면에 뜬 카카오톡 미리보기.
[거래처 윤 부장]: (사진) 오빠, 이거 봐. 나 오늘 새로 산 속옷인데 어때? 섹시해? 보윤 언니는 자?
보윤의 동공이 흔들렸다.
거래처?
지은이를 '거래처'라고 저장해 둔 치밀함.
그리고 새벽 2시에 보낸 속옷 사진.
보윤은 핸드폰을 확인하지 않았다.
굳이 열어볼 필요도 없었다.
안 봐도 그 사진이 얼마나 야할지, 그들이 무슨 대화를 나눴을지 뻔했으니까. 더 이상 확인 사살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해주의 등에서 조금 떨어져 몸을 웅크렸다.
침대 끝, 벼랑 끝으로 몰렸다.
이 관계는 이미 죽었다.
뇌사 상태를 넘어 부패가 진행되고 있었다.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을 하는데, 보윤 혼자 코를 막고 "아직 살아있어요", "우린 괜찮아요"라고 우기고 있는 꼴이었다.
창밖으로 희미하게 푸르스름한 동이 트고 있었다.
새벽빛이 방 안으로 들어와 보윤의 얼굴을 비췄다.
그녀의 눈동자는 그 빛을 반사하지 못하고, 죽은 생선의 눈처럼 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유통기한이 끝났다.
그녀는 직감했다.
폐기 처분될 시간이 머지않았음을.
그리고 그 처분은, 그녀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잔인한 방식으로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