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유리온실
1. 1년의 봄
시간은 물처럼 흘렀다.
봄의 벚꽃, 여름의 소나기, 가을의 낙엽, 그리고 겨울의 눈까지.
사계절이 한 바퀴 도는 동안 보윤의 세상은 완벽했다.
기해주와의 연애는 평온했다. 그는 단 한 번도 보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보윤이 야근하는 날이면 회사 앞에서 기다렸고, 보윤이 아플 때면 죽을 사 들고 달려왔다.
보윤의 몸에 남아있던 학대의 기억들은 해주의 다정한 손길 아래 희미해져 갔다.
이제 그녀는 거울을 봐도 '더러운 구멍'이 아닌, '사랑받는 여자'를 보았다.
"보윤 씨, 저 다음 주에 미국으로 출장 가요. 일주일 정도 걸릴 것 같아요."
"아... 진짜요? 보고 싶어서 어떡해요..."
"저도요. 빨리 끝내고 날아올게요. 도착하면 바로 보윤 씨한테 갈게요."
마침 해주의 귀국일은 두 사람의 1주년 기념일이었다.
보윤은 아쉬웠지만, 오히려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받기만 했던 사랑을 돌려줄 완벽한 타이밍.
'서프라이즈 파티를 해주자. 해주 씨가 돌아왔을 때 깜짝 놀라게.'
2. 불청객
귀국 전날 오후. 보윤은 반차를 냈다.
그녀의 양손에는 짐이 한가득이었다. 트렁크에는 미리 주문한 풍선과 케이크, 와인, 그리고 해주에게 선물할 최고급 브랜드의 셔츠가 담겨 있었다.
며칠 밤을 고민하며 쓴 손편지도 가슴에 품었다.
해주의 오피스텔 앞.
보윤은 익숙하게 도어락 커버를 올렸다.
비밀번호는 두 사람의 '첫 데이트 날짜'였다.
해주가 직접 설정해 준 번호였다.
띠리릭- 띠리릭- 띠리리리릭-
경쾌한 기계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현관에 들어서자 해주의 집 특유의 냄새가 났다.
은은한 디퓨저 향과 깔끔하게 정돈된 공기.
보윤은 신발을 벗으며 행복한 상상에 잠겼다.
'여기다가 풍선 달고... 침대에는 꽃잎 뿌려놓고... 들어오면 짠! 하고 안아줘야지.'
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릴 뻔했다.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서려던 찰나였다.
"...으음..."
보윤의 발이 멈췄다.
아주 미세했지만, 분명한 소리였다.
'어? 뭐지? 해주 씨가 티비를 켜놓고 갔나?'
보윤은 고개를 갸웃했다.
꼼꼼한 성격의 해주가 그럴 리 없었다.
혹시 도둑? 아니면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오피스텔은 꽤 넓었다.
거실을 지나 안쪽 복도 끝에 침실이 있었다.
소리는 그 안쪽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3. 벽 너머의 진실
보윤은 숨을 죽이고 살금살금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거실을 지나 복도로 들어서자, 웅웅거리던 소리가 점차 선명한 파동으로 바뀌었다.
"하아... 으응... 아..."
단순한 대화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규칙적이고, 끈적하며, 색기 넘치는 소리였다.
여자의 신음.
그리고 남자의 거친 호흡.
보윤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의 손잡이가 땀으로 축축해졌다.
'아니야. 아닐 거야. 해주 씨는 미국에 갔어. 지금 비행기에 있을 시간이잖아. 이건 그냥... 티비 소리일 거야. 영화 소리일 거야.'
그녀는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머릿속에서 사이렌이 울렸다.
돌아가. 확인하지 마. 여기서 나가.
하지만 그녀의 발은 자석에 이끌리듯 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철썩, 철썩. 찌걱, 찌걱.
살과 살이 부딪히는 마찰음.
체액이 섞이는 질척한 소음. 너무나 익숙한 소리였다.
보윤이 평생을 혐오해왔던, 그러나 해주와 함께하며 아름답다고 느꼈던 바로 그 행위의 소리.
그 소리가, 지금 아무도 없어야 할 내 남자친구의 침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4. 이중주
문틈 사이로 보인 것은 뒤엉킨 두 개의 살색 덩어리였다.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남자, 기해주가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자가 올라타 허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김지은.
시각적인 충격이 먼저 뇌를 강타했다.
지은의 몸은 나와 정반대였다.
툭 치면 부러질 듯 가녀린 팔다리, 갈비뼈가 살짝 비치는 마른 몸통. 그리고 무엇보다... 작고 아담한 가슴.
한 손에 쏙 들어오는, 몽우리만 잡힌 듯한 그 작은 가슴 끝에는 옅은 분홍색 유두가 앙증맞게 솟아 있었다.
해주는 지은의 그 작은 가슴을 소중하다는 듯 핥고 있었다.
나에게 해주던 그 '숭배'와는 달랐다. 나에게는 거대한 조형물을 감상하듯 했다면, 지은에게는 깨지기 쉬운 보석을 다루듯 애지중지하고 있었다.
"하아... 오빠, 좋아? 보윤 언니보다 좋아? 내가 더 조여? 거대한 가슴 만지다가 내 거 만지니까 감질나지 않아?" "
지은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왔다.
나는 숨을 멈췄다.
"이게 진짜지... 봐, 이렇게 핑크색에 예쁜데. 보윤이 걔는 멍 투성이에 유두도 커서 징그러워. 걔 벗겨놓으면 무슨 정육점 온 기분이라니까?"
"푸하하! 정육점이래. 하긴, 언니가 좀 무식하게 크긴 하지. 젖소처럼. 그러니까 남자들이 다 걔만 보면 침 흘리고 덤비지. 싸구려처럼."
지은의 말에 해주는 킬킬거렸다.
그 웃음소리가 내 심장을 믹서기에 넣고 갈아버리는 것 같았다.
해주의 목소리였다. 언제나 나에게 "아름답다", "소중하다"고 속삭이던 그 부드러운 저음이, 지금은 칼날이 되어 내 심장을 찔렀다.
"그래도 떡칠 때 떡감 하나는 죽이지. 걔 젖통은 진짜 국보급이긴 해. 잡으면 손맛이 다르잖아.”
보윤의 다리가 후들거려 버틸 수가 없었다. 그녀는 소리 없이 문틀을 잡고 주저앉았다.
사랑이 아니었다. 존중이 아니었다. 그 모든 달콤한 말과 행동이, 지은과 해주의 역겨운 연극이었다.
5. 장난감의 유통기한
두 사람의 행위는 계속되었다.
해주는 지은의 작고 마른 몸을 탐하며, 마치 보윤에게서 느꼈던 역겨움을 씻어내려는 듯 거칠게 몰아붙였다.
해주는 지은의 작은 유두를 입에 머금고 쪽쪽 소리가 나게 빨았다.
"오빠, 그 언니 지금쯤 집에서 오빠 생각하면서 케이크 만들고 있을걸? 1주년이라고 속옷도 야한 거 샀을지도 몰라."
"아, 씨발. 상상하니까 토 쏠린다. 그 거대한 몸으로 야한 속옷 입고 '해주 씨~' 이러고 있을 거 아냐. 진짜 촌스럽고 역겨워."
"왜애~ 그래도 오빠 좆 물려주면 좋아하잖아. 명기라며."
지은이 낄낄거리며 말했다.
"그래, 구멍은 인정. 걔 보지는 진짜 물건이야. 박으면 뇌가 녹을 것 같긴 해. 근데 지은아, 나는 너의 이 좁고 깨끗한 곳이 더 좋아. 너랑 하면 내가 '귀족'이 된 기분인데, 걔랑 하면 내가 '짐승'이랑 뒹구는 기분이야."
“푸하핫, 짐승이래.”
"네가 출장 간다고 뻥 치라고 했을 때 진짜 믿을 줄은 몰랐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멍청하냐?"
"젖소니까 멍청하지. 덕분에 오빠랑 나랑 1년 동안 재밌게 놀았잖아. 언니가 돈도 잘 쓰고, 시키는 대로 다 하고."
"보윤이는 너무 쉬워. 멍청할 정도로 순진해. 내가 그냥 '사랑해요' 한마디만 해주면, 알아서 다리 벌리고 젖 내밀고 다 해줘. 자기가 무슨 비련의 여주인공인 줄 안다니까?"
"푸흐흡, 맞어. 언니 진짜 단순해. 시키는 대로 다 하잖아.”
"그러니까. 보윤이는 그냥 '다루기 쉬운 가축'이야. 밥 좀 주고 머리 좀 쓰다듬어 주면 충성하잖아. 근데 너는 다르지. 너는 똑똑하잖아. 나랑 말이 통하고."
해주는 지은의 다리를 활짝 벌리고 그 사이로 파고들었다.
"몸은 걔가 더 죽여줄지 몰라도, 내 영혼의 파트너는 너야. 걔는 그냥 심심할 때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고. 그러니까 질투하지 마, 여왕님."
"치... 말은 잘해요. 그럼 약속해. 그년 가슴 만질 때 내 생각하기 없기."
"약속. 걔 젖 만질 때는 그냥 '아, 말랑말랑한 쿠션이다' 생각만 할게. 너는 내 여왕이고, 걔는 그냥... 화장실 변기야. 내가 필요할 때 마다 쓰는, 깨끗하게 닦아 놓은 변기.”
지은의 손이 해주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두 사람은 낄낄거리며 다시 격렬하게 몸을 섞기 시작했다.
"아앙! 오빠, 너무 깊어... 하아, 그럼 걔 언제 찰 거야?"
"이번 프로젝트 끝나고? 적당히 구실 만들어서 헤어져야지. 그때까진 좀 데리고 놀고. 솔직히 걔 몸뚱이는 좀 아깝잖아. 공짜로 쓰기에 가성비가 너무 좋아."
"나쁜 새끼. 적당히 빨아먹고 버려. 나 질투 나니까."
"알았어. 너 인스타 팔로워 10만 찍으면 그때 찰게. 그때까진 보윤이 카드로 명품 좀 더 사. 걔가 너한테 미안해서라도 다 사줄 거야."
보윤은 자신이 들고 있던 쇼핑백을 내려다보았다. 해주를 위해 준비한 명품 셔츠. 그를 기쁘게 해주려고 쓴 편지. 이 모든 것이 '멍청한 년의 재롱잔치' 소품이었다.
나는 사랑받는 여자가 아니었다.
나는 그저, 주인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재롱을 부리는, 젖이 큰 애완견이었다.
"으으... 윽..."
보윤은 입을 틀어막고 헛구역질을 삼켰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너무나 거대한 배신감은 슬픔을 증발시키고, 그 자리에 차가운 허무만을 남겼다.
지은은 쾌락에 젖은 눈으로 문 쪽을 힐끔거리는 듯했다.
마치 누군가 보고 있다는 걸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오빠, 싸줘... 그 젖소 년 말고 나한테 싸줘... 내 예쁜 몸에 뿌려줘..."
"그래, 지은아... 사랑해... 너 밖에 없어..."
철썩, 철썩, 철썩. 방 안 가득 울려 퍼지는 살 부딪히는 소리.
해주는 지은의 작은 몸이 부서져라 껴안고, 보윤에게는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가장 원초적이고 솔직한 욕망을 배설했다.
그들이 절정에 달해 짐승처럼 울부짖을 때, 보윤의 영혼은 소리 없이 바스러졌다.
보윤은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지은이와 해주의 말대로, 셔츠 위로도 숨길 수 없이 튀어나온 거대하고 흉물스러운 고깃덩어리.
나는 사랑받은 게 아니었다. 나는 그저, 맛 좋은 고기였고 쓰기 편한 변기였을 뿐이다.
그녀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네 발로 기어가듯 현관을 빠져나왔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두 사람의 웃음소리와 신음소리가, 닫히는 문틈 사이로 뱀처럼 기어 나와 보윤의 발목을 휘감았다.
현관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 안에서는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아, 진짜 그년 표정 보고 싶다. 오빠 들어오면 서프라이즈~ 할 텐데."
"오면 쫓아내야지. 냄새난다고."
보윤은 엘리베이터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보았다.
화려한 전투복을 입고, 1주년 데이트를 위해 공들여 화장한 여자.
하지만 그 눈동자는 이미 죽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뺨을, 그리고 자신의 가슴을 손톱으로 벅벅 긁어내렸다.
피가 맺힐 때까지.
[2부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