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문명사회
[2부 : 유리온실]
1. 트라우마의 불발
신입사원 연수원의 밤.
낮 동안의 빡빡한 교육 일정을 마친 50여 명의 신입사원 동기들이 커다란 강당에 둥글게 둘러앉았다.
조명은 은은하게 낮춰져 있었고, 바닥에는 맥주 캔과 과자 봉지들이 널려 있었다.
긴장이 풀린 동기들의 웃음소리가 강당을 가득 채웠다.
술병이 돌고, '진실 혹은 대전' 게임이 시작되었다. 보윤은 구석 자리에 앉아 무릎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술자리는 그녀에게 즐거움이 아닌 공포의 대상이었다.
백윤겸과 그의 무리가 지배했던 대학 시절 술자리의 악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걸렸다! 이번엔 성보윤 씨! 보윤 씨 벌칙 당첨!"
사회자의 외침에 보윤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의 하얀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과거 백윤겸이나 그의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벌칙'이란 늘 끔찍하고 모욕적인 것이었다. '러브샷'을 빙자한 강제 스킨십, '상의 탈의하고 춤추기', '가슴골에 초코시럽 뿌려서 핥아먹게 하기', 심지어 '직접 자위하며 신음 소리 내기' 같은 성적인 가학 행위들.
거절하면 "분위기 깬다"며 욕설과 물건이 날아왔다.
보윤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어떡하지... 시키면 해야 하는데... 거절하면 또 왕따 당하는데... 이번엔 뭘 시킬까? 옷을 벗으라고 할까? 가슴을 보여달라고 할까?'
그녀는 마치 사형 선고를 기다리는 죄수처럼, 어떤 굴욕적인 명령이 떨어질지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자, 우리 보윤 씨 벌칙은~! 엉덩이로..."
사회자가 짓궂게 뜸을 들였다.
보윤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제발 너무 심한 것만 아니기를.
"엉덩이로 이름 쓰기! 아님 분위기 띄우게 노래 한 곡?"
"......네?"
보윤이 멍한 눈으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녀의 귀를 의심했다. 벗으라는 말도, 만지게 해달라는 말도 없었다.
"어... 싫으세요? 그럼 그냥 원샷 하실래요?"
사회자가 머쓱한 듯 물었다. 주변 동기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음흉한 욕망이나 조롱이 아닌, 순수한 즐거움과 격려만이 담겨 있었다.
"보윤 씨, 노래 잘할 것 같아요! 한 곡 뽑아주세요!"
"그래요! 엉덩이로 이름 쓰기는 너무 구닥다리잖아. 노래 콜!"
그저 건전하고 유치한, 대학 MT에서도 사라져가는 고전적인 벌칙들뿐이었다.
그녀는 더듬거리며 익숙한 동요 '섬집 아기' 한 소절을 불렀다.
술자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선곡이었지만, 그녀의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강당에 울려 퍼졌다.
그러자 사람들이 "와, 잘한다!", "귀엽다!", "보윤 씨 너무 귀여워!"라며 환하게 웃어주었다.
따뜻한 박수 소리가 쏟아졌다.
그 순간 보윤은 깨달았다.
아, 이곳은 나를 뜯어먹으려는 하이에나들이 득실거리는 '도축장'이 아니구나.
이곳은 배운 사람들이 모인, 상식이 통하는 '문명사회'구나.
그녀는 안도감에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2. 백마 탄 기사
새벽 2시.
연수원에서의 뒤풀이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보윤은 술기운에 비틀거렸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맥주 몇 잔에도 취기가 훅 올라왔다.
지은이 골라준 높은 힐이 익숙지 않아 발목이 위태로웠다.
"어...!"
발목이 꺾이며 휘청거리는 순간이었다.
누군가 단단하고 넓은 팔로 보윤의 허리를 부드럽게 받쳐주었다.
고개를 들자, 훤칠한 키에 배우처럼 잘생긴 남자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신입사원 연수 기간 내내 '얼굴 천재', '사기캐'로 불리며 동기 여사원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던 기해주였다.
"아... 죄송해요. 제가 술이 약해서..."
보윤이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괜찮아요? 많이 취한 것 같은데, 숙소까지 부축해 드릴까요?"
해주는 보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녀의 무거운 가방을 대신 들어주었다.
그리고 보윤의 어깨에 손을 올리거나 허리를 감싸는 대신, 매너 있게 그녀의 팔꿈치 쪽 옷자락을 살짝 잡아 부축했다.
불필요한 신체 접촉을 최소화하려는 배려가 느껴졌다.
보윤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지금까지 만난 남자들은 보윤이 취하면 '기회다' 싶어 가슴을 주무르거나, "쉬었다 가자"며 모텔로 끌고 가려 했다.
그들에게 취한 보윤은 먹기 좋은 고깃덩어리일 뿐이었다.
하지만 해주는 달랐다.
그는 보윤을 '취해서 다루기 쉬운 여자'가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동료'로 대했다.
그의 눈빛에는 욕망 대신 다정함만이 가득했다.
"보윤 씨, 오늘 입으신 블라우스 잘 어울리던데요. 근데 밤공기가 좀 차서... 추워 보이네요."
해주는 걷는 도중 멈춰 서서, 자신의 정장 재킷을 벗어 보윤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따뜻한 재킷이 보윤의 어깨를 감쌌다.
재킷에서 은은한 우드 계열의 향수 냄새가 났다.
백윤겸에게서 나던 쩐 담배 냄새와는 비교할 수 없는 고급스럽고 어른스러운 향기.
보윤은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나... 설레도 되는 걸까? 이런 멋진 사람이 나한테 호의를 베풀어 주다니... 내가 감히?'
숙소 앞에 도착했을 때, 해주는 보윤이 들어가는 것을 끝까지 지켜봐 주었다.
"조심해서 들어가요. 내일 봐요, 보윤 씨."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밤공기에 녹아들었다.
보윤은 숙소 문을 닫고 기대어 서서, 터질 듯 뛰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지은이가 말했던 '새로운 세상'이 정말로 존재하고 있었다.
3. 전투복의 효과
본사 발령 첫 주.
보윤은 지은이 코디해 준 옷들을 매일 바꿔 입고 출근했다.
터질 듯 팽팽한 실크 블라우스, 라인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H라인 스커트, 그리고 아찔한 하이힐.
효과는 확실했다.
사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남자 선배들의 시선이 보윤에게 쏠렸다.
하지만 그 시선은 예전처럼 노골적이고 천박하지 않았다.
효과는 확실했다. 아니, 폭발적이었다. 보윤이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사무실 복도를 지날 때마다, 정수기 앞에서 잡담하던 남자 선배들의 시선이 자석처럼 그녀에게 쏠렸다.
타닥타닥 울리던 키보드 소리가 잠시 멈추고, 회의실 유리창 너머로 시선들이 꽂혔다.
하지만 그 시선은 예전처럼 노골적이고 천박한 희롱이 아니었다.
"성보윤 씨, 오늘 스타일이 참 좋네. 우리 팀 분위기가 다 환해진다."
"보윤 씨는 자기 관리 철저한가 봐. 핏이 모델 같아. 부럽네."
그들은 보윤의 압도적인 몸매를 훔쳐보면서도, 겉으로는 점잖게 칭찬했다.
그것은 '대기업'이라는 울타리가 주는 예의이자 품격이었다.
물론 그들의 눈빛 깊은 곳에 숨겨진 수컷의 욕망을 보윤이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대놓고 "만져봐도 되냐"고 묻거나 침을 흘리는 짐승들은 없었다.
보윤은 그 시선들을 즐기기 시작했다.
'지은이 말이 맞아. 이건 내 무기야. 내 약점이 아니라, 남들을 압도할 수 있는 힘이야. 내가 당당하니까 아무도 나를 함부로 못 해.'
그녀는 일부러 허리를 더 꼿꼿이 펴고 가슴을 내밀며 복도를 걸었다.
출렁이는 가슴과 걸을 때마다 리드미컬하게 흔들리는 골반.
그 움직임에 맞춰 남자 사원들의 고개가 무의식적으로 돌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자신이 이 공간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과거의 '더러운 걸레' 성보윤은 죽었다. 여기 있는 건 '알파걸' 성보윤이다.
그녀는 자신의 육체가 주는 권력을 마음껏 만끽했다.
4. 보고
퇴근 후, 씻고 나온 보윤은 가장 먼저 지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제 하루의 일과를 지은에게 보고하는 것은 그녀의 가장 중요한 루틴이 되었다.
"지은아! 나 오늘 대박이었어! 오늘 점심시간에 구내식당에서 해주 씨랑 같이 밥 먹었어!"
보윤이 들뜬 목소리로 재잘거렸다.
"어머, 진짜? 그 연수원에서 부축해 줬다는 잘생긴 동기? 와, 언니 벌써 썸 타는 거야? 능력 좋다!"
수화기 너머로 지은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니야, 썸은 무슨... 그냥 동기니까 같이 먹은 거지. 근데 해주 씨가 나보고 오늘 입은 원피스 색깔 잘 받는다고 칭찬해 줬어. 진짜 매너 좋지 않아?"
"오~ 그린라이트네, 그린라이트. 야, 부럽다. 우리 언니 회사 가더니 인기 폭발이네."
"아니야~ 여기 사람들 진짜 다 나이스해. 아무도 나한테 이상한 농담 안 하고, 일도 친절하게 알려주고. 다들 배운 사람들이라 그런가 봐."
"그치? 내가 뭐랬어. 언니는 그런 대우 받을 자격 있다니까. 옷은? 내가 골라준 거 입었어?"
"응! 오늘 그 베이지색 원피스 입었어. 다들 예쁘대. 지은아, 진짜 고마워. 네가 내 인생을 바꿨어. 나 요즘 꿈만 같아. 아침에 눈 뜨는 게 행복해."
보윤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곰팡이 핀 자취방의 눅눅한 천장이 아닌, 자신이 대출받아 들어온 깨끗한 오피스텔의 하얀 천장.
간접 조명이 은은하게 비추는 그곳은 천국 같았다.
하지만 행복에 젖은 보윤의 귓가에, 지은의 목소리가 낮고 차분하게 파고들었다.
"언니, 근데 명심해. 남자들은 다 늑대야. 겉으로는 점잖은 척해도 속으로는 무슨 생각 하는지 몰라. 해주 씨도 아직 모르는 거야. 잘생긴 놈들이 더 위험한 거 알지?"
"으응... 알지."
"그러니까 혼자 판단하지 말고, 무슨 일 있으면 항상 나한테 먼저 물어봐. 사적인 만남 가질 때도 나한테 컨펌받고. 알았지? 언니 또 상처받으면 나 진짜 속상해서 죽어."
지은의 목소리에는 걱정을 가장한 통제가 깔려 있었지만, 보윤은 그것을 깊은 애정으로 받아들였다.
"응, 알았어. 넌 내 코치잖아. 네 말만 들을게."
"그래, 우리 언니 착하다. 내일 입을 옷도 내가 카톡으로 골라줄게. 푹 자고 내일도 파이팅!"
전화를 끊은 보윤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이불을 끌어당겼다.
지은이가 있으니까 괜찮아. 지은이가 다 알려줄 거야.
그녀는 안심하며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백마 탄 기사 해주와 손을 잡고 꽃이 만발한 정원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