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완전한 사육
1. 성역의 완성
"구속됐대. 이제 발 뻗고 자도 돼, 언니."
지은이 건넨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얼음이 짤랑거렸다.
투명한 플라스틱 컵 표면에 맺힌 물방울이 지은의 가늘고 하얀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보윤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지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고, 오직 지은의 목소리만 메아리쳤다.
백윤겸이 체포되었다.
그것도 단순 폭행이나 스토킹 경범죄가 아니라, 특수 주거 침입과 성폭력 처벌법 위반, 그리고 불법 촬영물 유포 협박죄까지 더해져 구속 영장이 발부되었다.
지은의 일처리는 소름 돋을 정도로 완벽하고 치밀했다.
그녀는 보윤이 공포에 떨며 이불 속에 숨어있는 동안, 보윤의 오피스텔 관리실을 찾아가 복도 CCTV 영상을 확보했다.
백윤겸이 도어락을 부수고 강제로 침입하는 장면, 보윤이 끌려나가지 않으려고 문틀을 잡고 버티는 처참한 장면들을 모두 증거로 남겼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은은 방 안에 남아있던 백윤겸의 정액이 묻은 휴지와, 보윤의 찢어진 옷가지, 그가 마셨던 캔맥주에 남은 타액까지 모조리 수집해 경찰에 증거물로 제출했다.
"지은아... 어떻게..."
"내가 말했잖아. 언니 건드리는 놈들은 내가 다 죽여버린다고. 나 빈말 안 해."
지은은 빨대로 커피를 휘저으며 무심하게 말했다.
"언니. 연락 오더라도 합의는 받아 줄 생각도 하지마. 감방에서 썩다 나오면 서른 중반일 텐데, 인생 종친 거지 뭐."
보윤의 눈에 비친 지은의 모습 뒤로, 마치 성녀의 후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단순한 친구가 아니었다.
진흙탕 속에 처박힌 나를 건져 올려준 유일한 구원자였다.
보윤은 테이블 너머로 지은의 손을 덥석 잡고 울먹였다.
"고마워... 지은아, 진짜 고마워... 나 진짜 평생 너한테 갚으면서 살게. 네가 내 생명이야. 너 없었으면 나 진작에 죽었을 거야."
"에이, 갚긴 뭘 갚아. 친구끼리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지은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보윤의 손등을 다른 손으로 토닥였다.
"언니는 그냥 내 옆에 있어 주기만 하면 돼. 건강하게, 예쁘게. 나중에 내가 쇼핑몰 열거나 인스타 키우면 그때 모델이나 좀 해줘. 언니 몸매면 대박 날 테니까, 그때 모델료는 깎아주기다?"
지은의 따뜻한 온기가 보윤의 손등을 타고 심장까지 전해졌다.
얼어붙어 있던 심장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이제 더 이상 현관문 밖의 발자국 소리에 놀라 깨지 않아도 된다.
칼을 베개 밑에 숨기고 자지 않아도 된다.
내 곁엔, 천사 같은 김지은이 있으니까.
2. 갑옷
입사를 일주일 앞둔 주말 오후.
지은은 "출근복 사러 가자"며 보윤을 이끌고 백화점 명품관으로 향했다.
화려한 조명과 대리석 바닥, 우아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매장 안. 보윤은 주눅이 들어 지은의 뒤에 바짝 붙어 걸었다.
옷들의 가격표를 볼 때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지은아, 여기 너무 비싸... 그냥 아울렛 가자..."
"언니, 대기업 입사하면 이제 평범한 옷은 안 돼. '전투복'이 필요해. 언니 몸매를 그따위 후드티로 가리고 다니는 건, 언니를 뽑아준 회사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지은은 단호했다.
그녀가 고르는 옷들은 하나같이 보윤의 육체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감하고 세련되게 과시하는 스타일이었다.
신축성이 좋아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는 실크 블라우스, 허리를 잘록하게 잡아주고 엉덩이와 골반 라인을 타이트하게 감싸는 H라인 펜슬 스커트.
"자, 이거 입어봐. 사이즈 딱 맞을 거야."
지은이 탈의실로 옷들을 밀어 넣었다.
보윤은 떨리는 손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거울 속의 보윤은 압도적이었다.
블라우스 단추가 가슴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터질 듯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그 사이로 거대한 가슴의 굴곡이 적나라하면서도 묘하게 고급스럽게 드러났다.
스커트는 걸을 때마다 엉덩이와 허벅지 라인을 꽉 물고 놓아주지 않았다.
숨을 쉴 때마다 몸의 곡선이 파도처럼 움직였다.
탈의실 커튼을 걷고 보윤이 쭈뼛거리며 나왔다.
"와... 미쳤다."
소파에 앉아 잡지를 보던 지은이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보윤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감탄했다.
"언니, 진짜 대박이야. 이거 봐. 비율 미쳤어. 서양 모델 저리 가라야. 이러고 출근하면 회사 남자 직원들 다 기절해서 실려 나가겠다."
지은은 핸드폰을 꺼내 보윤의 전신사진을 찍어 보여주었다.
액정 속의 여자는 더 이상 움츠러든 스토킹 피해자가 아니었다. 세련되고, 당당하며, 볼륨감 넘치는 커리어 우먼이 서 있었다.
"너무... 야하지 않아? 회사인데... 단추가 너무 벌어지는데..."
보윤이 부끄러워 가슴을 가리려 하자, 지은이 찰싹 소리가 나게 보윤의 손을 쳐냈다.
"아니! 전혀! 야한 게 아니라 관능적인 거지. 언니, 자신감 가져. 언니는 이제 누구도 함부로 못 대하는 '알파걸' 성보윤이 되는 거야."
지은은 보윤에게 다가가, 가슴 부근에서 팽팽하게 당겨진 블라우스의 가장 위쪽 단추를 하나 더 풀러 주었다.
"어? 지은아!"
"가만있어 봐. 이렇게 입어야 목선이 길어 보이고 더 예뻐. 쇄골 라인 죽이는데 왜 가려? 완벽해."
깊게 파인 V존 사이로 가슴골이 아슬아슬하게 보일 듯 말 듯 했다.
거울 속에서 지은과 눈이 마주쳤다. 지은은 마치 자신의 가장 아끼는 인형을 닦아주고 꾸며주는 소녀처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보며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지은이가 골라준 이 옷은, 나를 세상의 멸시와 폭력으로부터 지켜줄 화려하고 단단한 황금 갑옷처럼 느껴졌다.
3. 맹세의 밤
입사 전날 밤.
우리는 지은의 오피스텔에서 조촐한 축하 파티를 열었다.
지은은 예쁜 레터링 케이크와 로제 와인을 준비해놓고, 조명까지 세팅한 뒤 구도가 완벽하게 잡힌 사진을 여러 장 찍어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우리 언니 대기업 입사 축하해! 꽃길만 걷자❤️ #내사랑 #성보윤 #커리어우먼 #우정스타그램]
"행복하다... 진짜 꿈만 같아."
와인 잔을 기울이며 보윤이 몽롱하게 중얼거렸다. 알코올 기운과 행복감이 섞여 몸이 붕 뜬 것 같았다.
지은이 잔을 부딪치며 싱긋 웃었다. 촛불에 비친 그녀의 눈동자가 유난히 반짝거렸다.
"언니, 우리 약속 하나 하자."
"무슨 약속?"
"언니 이제 회사 들어가면 엄청 바빠질 거잖아. 새로운 사람들도 많이 만날 거고, 멋진 남자들도 대시할 거고. 그래도... 나 잊으면 안 돼?"
지은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내 편 들어주기. 나중에 내가 정말 힘든 부탁을 하더라도, 그게 설령 말도 안 되는 부탁이라도... 언니는 무조건 내 편이 되어주고 들어주기. 약속할 수 있어?"
지은의 눈동자가 진지하게, 아니 절박하게 빛났다.
보윤은 1초도 망설이지 않았다. 백윤겸을 감옥에 보내주고, 나를 이렇게 예쁘게 만들어준 은인이다.
내장이라도 꺼내 줄 수 있는데 부탁 하나 못 들어주랴.
"당연하지. 바보야, 그걸 말이라고 해? 내 목숨도 줄 수 있는데. 난 무조건, 죽을 때까지 네 편이야. 세상이 다 너 욕하고 손가락질해도 난 네 앞에 서서 막아줄 거야."
"진짜지? 맹세했다?"
지은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보윤은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걸고, 엄지손가락으로 도장까지 꾹 찍었다.
"응. 맹세해. 하늘이 두 쪽 나도."
지은은 만족스러운 듯 활짝 웃으며 테이블을 넘어와 나를 와락 껴안았다.
지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에서 나는 달콤한 복숭아 향기.
나는 지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너무나 평온하고 아늑했다.
이것이 천국이구나 싶었다.
4. 낙원으로
다음 날 아침.
서울 도심의 심장부. 거대한 유리 빌딩 앞. 출근하는 직장인들의 물결 속에서, 보윤은 지은과 함께 서 있었다.
지은은 굳이 아침잠을 설치며 보윤의 첫 출근을 배웅해주겠다며 여기까지 같이 왔다.
보윤은 지은이 어제 사준 타이트한 베이지색 실크 블라우스와 검은색 펜슬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지은이 선물한 킬힐까지.
출근하는 수많은 사람의 시선이 보윤에게 꽂혔다.
단추가 터질 듯한 압도적인 가슴, 잘록한 허리, 걸을 때마다 흔들리는 엉덩이 라인.
남자들은 곁눈질로 훔쳐봤고, 여자들은 수군거렸다.
따가운 시선이었지만, 오늘은 움츠러들지 않았다.
내 옆엔 김지은이 있으니까. 지은이가 "언니가 제일 예뻐"라고 해줬으니까.
"가자, 언니. 잘할 수 있지? 기죽지 말고, 어깨 펴고!"
지은이 내 옷매무새를 마지막으로 꼼꼼하게 다듬어 주었다.
마치 무대에 오르는 배우를 점검하는 매니저처럼.
"응. 잘하고 올게. 이따 봐."
"파이팅! 내가 뒤에서 응원하고 있을게. 오늘 저녁에 후기 낱낱이 들려줘야 돼! 알았지?"
지은은 핸드폰을 들어 회전문을 향해 또각또각 걸어가는 내 뒷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었다.
나는 회전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지은이 환하게 웃으며 머리 위로 크게 손하트를 그려 보였다.
그 모습이 너무 예뻐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거대한 유리 회전문을 밀었다.
윙-
차가운 에어컨 바람과 향긋한 커피 향기, 그리고 수백 개의 구두 굽 소리가 섞인 로비의 소음이 나를 반겼다.
가슴이 벅차게 두근거렸다. 이제 진짜 시작이다.
나는 당당하게 사원증을 리더기에 찍었다. [성보윤]이라는 이름이 초록색 불빛과 함께 반짝였다.
내 인생에서 가장 완벽하고,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1부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