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키넷 단편야설

한 편 완결 소설

성인소설 목록

최신 단편

야설 읽기
밍키넷 소설
토스트 메세지 나오는곳
텔레그램 공식채널

밍키넷 공식보증업체

6화 가장 완벽한 가면


1. 도피처 백윤겸은 비겁했다. 온라인 불법 도박에 손을 대어 주변 지인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게 되자, 그는 마치 야반도주하듯 군대로 도망쳐버렸다. 그가 떠난 자리에는 폐허만이 남았다. 보윤의 자취방 벽지에 찌들어 빠지지 않는 싸구려 담배 냄새, 폭력이 휩쓸고 지나간 보윤의 몸에 새겨진 시퍼런 멍 자국들. 그리고 캠퍼스에 낙인처럼 찍힌 '백윤겸이 먹다 버린 걸레'라는 더러운 소문뿐이었다. 학교에 가면 수근거리는 시선이 바늘처럼 꽂혔다. 남자들은 그녀의 가슴을 보며 음담패설을 했고, 여자들은 그녀를 피해 다녔다. 결국 보윤은 휴학계를 던졌다. 도망치듯 자취방에 틀어박혔다. 그녀는 미친 듯이 몸을 씻기 시작했다. 하루에 세 번, 네 번. 그것도 모자라 새벽에도 자다 깨서 욕실로 들어갔다. 거친 때밀이 타월로 살이 벗겨져 피가 배어 나올 때까지 문질렀다. 백윤겸의 손길이 닿았던 곳, 그가 침을 발랐던 곳을 모조리 도려내고 싶었다. '더러워... 냄새나... 지워야 해.' 피부가 쓰라릴수록 마음은 조금 편해졌다. 그녀에게 샤워는 세신이 아니라, 과거를 지우는 종교적 의식이었다. '성공해야 해. 아무도 나를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해.' 그녀는 '대기업 입사'를 난파된 인생의 유일한 구명조끼로 삼았다. 높은 연봉, 목에 건 사원증, 세련된 정장, 그리고 '엘리트'라는 사회적 타이틀. 그것들이 자신의 더러운 과거와 천박하다고 손가락질받는 육체를 깨끗하게 세탁해 줄 것이라 믿었다. '대기업에 가면, 사람들이 내 가슴이 아니라 내 능력을 봐주겠지. 나를 짐승이 아니라 사람 대접 해주겠지.' 그녀는 자신의 거대한 가슴을 압박 붕대와 스포츠 브라로 짓누르고, 그 위에 헐렁한 무채색 후드티를 뒤집어썼다. 여성성을 철저히 거세한 채, 도서관 구석 자리에 처박혔다. 그녀는 세상과 통하는 모든 문을 굳건하게 걸어 잠갔다. 오직 취업이라는 좁은 개구멍만이 그녀가 보고 있는 유일한 빛이었다. 2. 복숭아향의 천사 복학 후 들어간 취업 스터디 그룹. 보윤은 그곳에서도 투명 인간을 자처했다. 구석 자리에 앉아 말없이 문제집만 풀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의 가슴에 꽂히는 게 죽기보다 싫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스터디가 끝나고 비가 쏟아지던 밤이었다. 우산이 없던 보윤이 건물 입구에서 쭈뼛거리고 있을 때, 지은이 다가왔다. "보윤 언니, 우산 없으세요?" "아... 응..." "저랑 같이 쓰고 가요! 역까지 데려다 드릴게요." 지은은 보윤의 팔짱을 꼈다. 팔짱. 보윤은 흠칫 놀라 몸을 굳혔다. 남자가 아닌 사람과의 스킨십. 징그럽거나 아픈 게 아니라,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 우산 속에서 지은은 보윤을 보며 생긋 웃었다. "언니, 그거 알아요? 언니 정리 진짜 잘하는 거. 저번 주에 언니가 공유해 준 요약 노트 보고 저 소름 돋았잖아요. 진짜 똑똑하신 것 같아요." 똑똑하다. 평생 듣던 말은 '젖 크다', '몸매 죽인다', '잘 조인다'였는데. 지은은 보윤의 '몸'이 아닌 '능력'을 칭찬해 준 첫 번째 사람이었다. 보윤의 가슴속에서 무언가 뭉클한 것이 올라왔다. 스터디 카페의 공기는 건조했지만, 김지은의 옆자리에서는 항상 좋은 향기가 났다. 그것은 보윤의 인생을 채우고 있던 퀴퀴한 정액 냄새, 자취방의 담배 쩐내, 모텔의 락스 냄새와는 차원이 다른 향이었다. 복숭아 향 섬유유연제와 은은한 샴푸 냄새. 지은은 스터디의 여왕이었다. 예쁘고, 세련됐고, 누구에게나 상냥했다. 남자들은 지은의 환심을 사려고 안달이었고, 여자들은 그녀를 동경했다. 보윤과는 정반대의 세계에 사는 사람이었다. 지은은 보윤의 팔에 자연스럽게 자신의 머리를 기댔다. 닿아오는 머릿결이 비단처럼 부드러웠다. 보윤은 숨을 멈췄다. 남자의 거친 손길이 아닌, 여자의 부드러운 온기. 그것은 공포가 아니라 간지러운 설렘이었다. 그날 보윤은 처음으로 스터디가 끝난 후 도망치듯 집으로 가지 않았다. 3. 거울 속의 다른 여자 그날 이후, 지은은 보윤의 껌딱지가 되었다. "언니, 밥 같이 먹어요." "언니, 이 문제 좀 알려주세요." "언니, 오늘 옷 예뻐요." 지은은 보윤을 세상 밖으로 끌어냈다. 맛집을 데려가고, 예쁜 카페에서 사진을 찍어주었다. 보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자인 친구'와 평범한 일상을 누렸다. 주말 오후, 강남의 번화가. 지은은 보윤을 이끌고 백화점 란제리 매장과 의류 매장을 누비고 다녔다. 보윤은 평소처럼 펑퍼짐한 후드티로 몸을 가리고 있었지만, 지은은 그런 보윤을 탈의실로 밀어 넣었다. "언니, 이 원피스 딱이야. 한번만 입어봐. 응? 내 소원!" 보윤은 주저하며 옷을 갈아입었다. 몸에 딱 붙는 니트 원피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여전히 부담스러웠다. 거대한 가슴이 옷의 라인을 뚫고 나올 듯 솟아 있었다. '징그러워... 사람들은 이걸 보고 야하다고 할 거야.' 그때 커튼이 젖혀지고 지은이 들어왔다. 보윤은 황급히 팔로 가슴을 가리려 했다. 하지만 지은의 눈은 반짝거리고 있었다. "와... 대박." 지은은 보윤의 등 뒤로 다가와 어깨를 감싸 안았다. "언니, 진짜 여신이다. 이거 헐리우드 배우 몸매 아니에요? 왜 이걸 가리고 다녔어?" "너... 너무 야해 보이지 않아...?" "전혀! 고급스러워. 언니, 남들이 쳐다보는 건 언니가 아름다워서 그런 거야. 당당해져요. 언니는 그럴 자격 있어." "아냐... 너무 크고 징그러워... 사람들도 쳐다보고..." 지은은 보윤의 손을 잡으며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누가 징그럽대요? 그건 걔네가 저급해서 그래요. 언니는 여신이에요. 자신감 가져요. 내가 언니 지켜줄게." 내가 언니 지켜줄게. 그 말은 백윤겸에게 유린당하고 엄마에게 버림받았던 보윤의 영혼을 구원하는 성경 구절처럼 들렸다. 보윤은 탈의실에서 지은을 끌어안고 펑펑 울었다. 지은은 보윤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보윤은 생각했다. '신이 나를 버리지 않았구나.' 지은은 보윤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거울 속에서 눈을 맞췄다. "진짜 예쁘다, 우리 언니." 그 한마디에, 보윤의 눈에 맺혀있던 '고기'로서의 자아상이 흐릿해졌다. 거울 속에는 남자들의 성욕 처리기가 아니라, 예쁜 옷을 입고 친구에게 칭찬받는 '보통의 20대 여자'가 서 있었다. 그날 보윤은 지은이 골라준 옷을 샀다. 카드를 긁는 손이 떨렸지만, 그것은 기분 좋은 떨림이었다. 4. 무장 해제 그날 밤, 지은의 자취방. 두 사람은 예쁜 잠옷을 맞춰 입고 침대에 엎드려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맥주 캔과 과자가 널려 있었다. TV에서는 예능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고, 방 안은 온통 노란 무드등 불빛으로 아늑했다. "푸하하! 진짜? 그 남자애가 그랬다고?" 보윤은 배를 잡고 웃었다. 이렇게 소리 내어 웃어본 게 얼마 만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지은은 학교에서 있었던 웃긴 일, 썸 타는 남자 이야기, 교수님 뒷담화를 조잘조잘 늘어놓았다. "언니는? 언니는 좋아하는 사람 없어?" 지은의 질문에 보윤은 잠시 멈칫했다. 남자. 그 단어는 보윤에게 공포였다. 하지만 지금 이 분위기, 이 안전한 공간에서는 그 공포조차 희석되는 것 같았다. "나는... 남자가 좀 무서워. 옛날에 안 좋은 기억이 있어서." 보윤이 조심스럽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깊은 이야기까진 아니었지만, 누군가에게 자신의 상처를 아주 조금이라도 내보인 건 처음이었다. 지은은 웃음기를 거두고 보윤의 손을 꼭 잡았다. "고생했네, 우리 언니. 세상에 쓰레기들이 좀 많아? 근데 언니, 이제 걱정 마." 지은은 맥주 캔을 들어 보이며 윙크했다. "이제 내가 있잖아. 어떤 놈이 언니 괴롭히려고 하면 내가 가서 다 죽여버릴 거야. 나 성격 더러운 거 알지?" "푸흡, 그래... 든든하다." 보윤은 지은의 손을 마주 잡았다. 따뜻했다. 새벽 4시가 넘어가고 있었지만, 잠들고 싶지 않았다. 이 밤이 끝나면 이 마법 같은 행복이 사라질까 봐. 두 사람은 얼굴에 마스크팩을 붙이고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언니, 우리 나중에 같이 여행 가자. 유럽으로. 거기 가서 멋진 외국인들도 만나고 쇼핑도 잔뜩 하는 거야." "그래, 좋아. 꼭 가자." 보윤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낡은 펜션의 천장도, 외로운 원룸 천장도 아니었다. 친구와 함께 미래를 꿈꾸는 희망의 천장이었다. 5. 완벽한 모래성 지은은 잠이 들었는지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냈다. 보윤은 고개를 돌려 지은의 자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천사 같았다. 보윤은 조용히 핸드폰을 들어 갤러리를 열었다. 아까 낮에 지은과 함께 찍은 네 컷 사진. 사진 속 보윤은 활짝 웃고 있었다. 가슴을 가리려고 어깨를 웅크리지도 않았고, 눈치를 보며 억지 미소를 짓지도 않았다. 머리띠를 쓰고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지은과, 그 옆에서 행복해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보윤. '나한테도... 친구가 생겼어.'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솟았다. 그것은 벅찬 행복감이었다. 이 지옥 같은 삶을 버티게 해 줄 단 하나의 버팀목이 생겼으니까. 보윤은 잠든 지은의 이불을 조심스럽게 덮어주었다. 마치 깨지기 쉬운 보석을 다루듯이. "고마워, 지은아. 나한테 와줘서." 보윤은 지은의 옆에 몸을 웅크리고 눈을 감았다. 악몽을 꾸지 않고 잠든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가장 안전한 곳에 있다고 믿었다.

고객센터 Suppo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