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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멍든 복숭아


1. 생존을 위한 알약 현관 도어락이 '띠리릭' 소리를 내며 잠겼다. 외부와 단절되는 기계음이 적막한 6평짜리 원룸에 울려 퍼졌다. 보윤은 값비싼 가죽 핸드백을 현관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다. 낮에는 커리어 우먼의 상징 같았던 명품 가방이 지금은 그저 무거운 짐 덩어리로만 보였다. 그녀는 구두도 벗지 않은 채,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주방 쪽으로 향했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식탁 위에 놓인 작은 약통을 집어 들었다. 경구 피임약. 28알이 빼곡히 들어차 있던 은색 포장지는 이제 절반 이상 비어 있었다. 이걸 처음 샀던 날을 보윤은 기억한다. 박 차장에게 처음 당하고, 찢어진 스타킹을 신은 채 약국으로 달려가 떨리는 목소리로 달라고 했던 그 날. 약사는 그녀의 흐트러진 몰골을 보고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약을 건네주었었다. 그날은 약을 삼키며 꺽꺽 소리 내어 울었지만, 이제는 달랐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약 한 알을 톡 까서 입안에 털어 넣었다. 물도 없이 꿀꺽 삼켰다. 마치 매일 챙겨 먹는 비타민이나 영양제처럼,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기계적인 행위였다. '이걸 먹어야 안전해. 임신하면... 다 끝이니까.' 보윤에게 섹스는 사랑이나 쾌락이 아니었다. 그것은 갑작스럽게 닥쳐오는 자연재해였고, 처리하지 않으면 썩어서 냄새를 풍기는 오물이었다. 자신의 뱃속에 그 끔찍한 남자들의 씨앗이 자라는 상상을 지우기 위해, 그녀는 매일 밤 호르몬제를 삼키며 자신의 자궁을 척박하고 메마른 사막으로 만들었다. 그것이 이 지옥 같은 사회생활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그리고 가장 적극적인 방어 기제였다. 2. 썩어가는 비너스 보윤은 욕실로 들어갔다. 형광등 불빛이 차갑게 타일 바닥을 비췄다. 그녀는 거울 앞에 서서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윤 대리가 거칠게 잡아당겨 단추가 뜯겨 나간 실크 블라우스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 위로 땀과 타액, 그리고 정액으로 얼룩진 스커트와 속옷이 뱀의 허물처럼 쌓였다.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값비싼 섬유유연제 냄새와 수컷의 비릿한 정액 냄새가 뒤섞인, 그녀의 타락을 증명하는 냄새였다. 보윤은 전신 거울 앞에 알몸으로 섰다. 습기가 차지 않은 깨끗한 거울 속에, 누군가라면 탄성을 내지를 법한 육체가 비쳤다. 잘록하게 들어간 허리, 아이를 잘 낳을 것처럼 넓게 벌어진 골반, 그리고 그 위를 압도하듯 덮고 있는 비현실적으로 거대한 유방. 중력의 법칙을 증명하듯 묵직하게 늘어진 가슴은 그녀의 상체 절반을 가릴 만큼 컸다. 뽀얗고 탄력 있는 피부, 연갈색 유륜. 남자들이 침을 흘리며 탐내는 '빨통'이자 '섹스 판타지'의 결정체. 하지만 보윤의 눈에 비친 그것은 여자의 몸이 아니었다. 그것은 유통기한이 한참 지나 썩어가는 정육점의 붉은 고기이자, 여기저기 멍들어서 상품 가치를 잃고 폐기 처분을 기다리는 물러 터진 복숭아였다. "더러워..." 보윤의 입에서 쇳소리 섞인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하얀 피부 곳곳에는 학대의 지도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박 차장이 쾌락에 겨워 쥐어뜯어서 생긴 가슴팍의 시퍼런 멍, 윤 대리가 젖소 같다며 꼬집고 비틀어서 생긴 유두 주변의 검붉은 피멍, 그리고 허벅지 안쪽에 어지럽게 남은 붉은 손가락 자국들. 모두 그녀가 '사회생활'이라는 명목하에 묵인하고 받아들인 흔적들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풍만한 가슴을 양손으로 들어 올려보았다. 묵직하고 물컹한 감촉. 손바닥을 가득 채우고도 넘쳐흐르는 이 살덩이. 이것 때문에 남자들이 파리 떼처럼 꼬였고, 이것 때문에 그녀는 직장 동료가 아닌 암컷 짐승 취급을 받았다. 보윤은 손톱을 세워 가슴의 멍 든 부위를 긁어내듯 문질렀다. 벅, 벅. 거친 소리가 욕실에 울렸다. 마치 썩은 껍질을 벗겨내면 그 안에서 깨끗하고 순결한 새살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긁을수록 하얀 피부에는 붉은 생채기만 늘어갔고, 쓰라린 통증만 더해질 뿐이었다. 거울 속 보윤의 눈동자가 점차 초점을 잃고 텅 비어갔다. 그리고 그 까맣고 공허한 눈동자 너머로, 아주 오래된, 그러나 단 한 번도 잊힌 적 없는 기억 하나가 늪처럼 수면 위로 떠올랐다. 3. 착한 아이는 거절하지 않는다 그것은 보윤이 7살 때의 기억이었다. 빛 바랜 필름처럼, 하지만 감각만은 어제 일처럼 생생한 그 날의 저녁. 어린 보윤은 식탁 앞에 뻣뻣하게 굳은 채 앉아 있었다. 식탁 위에는 그녀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오이소박이와 오이냉국이 가득했다. 특유의 비릿한 냄새가 어린 보윤의 비위를 건드렸다. 엄마는 엄격했다. 아니, 엄격을 넘어선 통제광이었다. 엄마에게 자식은 자신의 소유물이자, 자신의 완벽함을 증명해야 할 트로피였다. "보윤아, 다 먹어야지. 편식하면 나쁜 어린이야. 엄마는 나쁜 어린이 제일 싫어해." "엄마... 나 이거 냄새나서 싫어... 먹으면 토할 것 같아... 먹기 싫어..." 어린 보윤이 생전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숟가락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거절이었다. 자기 의사 표현의 첫걸음이었다. 그 순간, 설거지를 하던 엄마가 뒤를 돌았다. 엄마의 표정은 무섭게 화를 내는 얼굴이 아니었다. 차라리 소리를 지르거나 엉덩이를 때렸으면 나았을 것이다. 엄마의 눈에서 온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것은 내 자식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쓸모없는 물건, 혹은 불량품을 바라보는 듯한 무감각하고 싸늘한 시선.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듯한 그 눈빛에 어린 보윤은 숨이 턱 막혔다. "그래? 엄마 말 안 듣는 아이는 필요 없어. 우리 집에는 착한 아이만 살 수 있어." 엄마는 아무런 감정도 없는 손길로 보윤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현관 밖, 차가운 복도로 아이를 밀어내고 문을 잠가버렸다. 철컥. 육중한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보윤의 세상과 단절되는 소리처럼 들렸다. "엄마! 엄마! 잘못했어요! 문 열어주세요! 으앙!" 복도는 어둡고 추웠다. 센서등은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했고, 옆집 개 짖는 소리가 괴물 소리처럼 들렸다. 7살 보윤은 맨발로 차가운 시멘트 복도 바닥을 뛰며 문을 두드렸다. 손바닥이 빨개지도록, 목이 쉬도록 울부짖었다. 공포가 엄습했다. 이 문이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 같았다. 엄마가 나를 버리고 이사 가버릴 것 같았다. 세상에 나 혼자 남겨졌다는 원초적인 공포. 유기의 공포. 세 시간 뒤, 찰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엄마는 현관에 서서, 오줌을 지리고 탈진해 쓰러져 있는 보윤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 "이제 말 잘 들을 거야? 착한 아이 될 거야?"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보윤은 고개를 미친 듯이 끄덕였다. 살기 위해서였다. 다시 그 추운 복도로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 "네... 네, 엄마. 다 먹을게요. 시키는 거 다 할게요. 제발 버리지 마세요... 제발요..." 그날 밤, 보윤은 헛구역질을 하면서 식탁 위의 오이 반찬을 모조리 씹어 삼켰다. 위장이 뒤집히고 토사물이 올라왔지만 꾹꾹 눌러 담았다. 엄마는 그제야 빈 그릇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보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옳지. 우리 보윤이 착하네. 엄마는 이렇게 말 잘 듣는 보윤이가 제일 좋아." 그 따뜻한 손길. 안도감. 그때 그녀의 어린 뇌리에 깊고 단단한 공식 하나가 인두처럼 박혔다. 거절하면 버림받는다. 버림받으면 죽는다. 수락하면 사랑받는다. 사랑받으면 살아남는다. 그 왜곡된 생존 공식은 사춘기가 되어 가슴이 비정상적으로 커지면서 더욱 견고하게 강화되었다. 교복 블라우스가 터질 듯 부풀어 오르자, 세상의 시선이 변했다. 또래 남자아이들의 음습한 희롱, 여자아이들의 질투와 따돌림. 보윤이 그 지옥 같은 학교생활에서 왕따가 되지 않고 살아남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착한 아이'가 되는 것. 그들이 시키는 대로 매점에 가서 빵을 사 오고, 숙제를 대신해주고, 때로는 남자 선배들이 "한 번만 만져보자"며 교복 위로 손을 댈 때 거부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 주는 것. "보윤이는 부탁하면 다 들어줘서 좋아." "야, 성보윤 가슴 진짜 쩐다. 한 번 만져봐도 돼? 우리 친구잖아." 그녀는 혐오스러워서 토가 나올 것 같았지만, 입꼬리를 억지로 올려 웃으며 말했다. "응... 그래... 친구니까..." 거절하면 다시 그 차가운 복도에 혼자 남겨질까 봐. 무리에 끼지 못하고 도태되어 혼자가 될까 봐. 그녀에게 '타인'은 소통과 사랑의 대상이 아니었다. 비위를 맞추고 봉사해서, 나를 버리지 않게 붙잡아둬야 할 '주인님'들이었다. 4. 씻겨지지 않는 얼룩 "하아..." 다시 현재. 욕실 안. 보윤은 샤워기 물을 가장 뜨겁게 틀었다. 쏟아지는 물줄기가 수증기를 내뿜으며 그녀의 멍든 몸을 때렸다. 박 차장에게 모텔로 끌려가 처음 다리를 벌렸을 때도, 오늘 윤 대리에게 머리채를 잡히고 영상이 찍혔을 때도, 그녀는 7살의 그 복도에 서 있었다. '안 돼, 싫어'라고 말하는 순간 회사의 문이 닫힐 것이다. 책상이 치워질 것이고, 사람들은 나를 투명 인간 취급할 것이다. 사회라는 거대한 집에서 쫓겨나 그 차가운 복도 바닥에 나뒹굴게 될 것이다. 그 공포가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수치심을 마비시키고, 다리를 벌리게 만들었다. 그녀는 타올에 바디워시를 잔뜩 묻혀 거품을 냈다. 그리고 가슴을 벅벅 문질러 닦았다. 살갗이 벗겨질 듯 세게 문질렀다. 하얀 거품이 윤 대리의 타액과 정액, 그리고 보윤의 눈물과 섞여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검은 하수구 구멍이 그 오물들을 꿀꺽꿀꺽 삼켰다. "안 지워져... 씨발, 안 지워진다고..." 아무리 닦아도 살갗 깊숙이 스며든 굴욕감과 더러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거울 속의 거대한 가슴이 물에 젖어 번들거렸다. 붉게 부어오른 유두와 가슴의 멍 자국들이, 마치 '나를 마음대로 쓰세요', '24시간 대기 중'이라고 적힌 네온사인 간판처럼 보였다. 보윤은 힘이 풀려 샤워기 아래 쭈그리고 앉았다. 무릎을 끌어안고 웅크리자, 거대한 가슴이 허벅지에 닿아 눌렸다. 자신의 신체 부위지만 너무나 짐스럽고 거추장스러운 살덩이. 뜨거운 물이 계속해서 정수리로 쏟아졌지만, 그녀는 뼈가 시리도록 추웠다. 덜덜 떨리는 몸을 감싸 안았다. 그녀는 물 섞인 울음소리를 토해냈다. 좁은 욕실에는 물 떨어지는 소리만이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그녀는 오늘 밤도 혼자였다. 철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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