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4. 붙잡혔다
눈앞의 광경은 참혹했다.
땀과 눈물, 그리고 내가 쏟아낸 정체 모를 액체로 범벅이 된 채,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가늘게 떨고 있는 아름다운 엘프.
이건 빼도 박도 못할 범죄 현장이었다.
‘여기는 엘프의 영역일 텐데... 그녀의 동족에게 들키는 날엔...!’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거기다... 저 여자의 눈빛.
마지막에 나를 보던 그 눈빛은 정상이 아니었다.
내가 아는 판타지 소설 속 엘프들은,
한 번 맛을 보면 수컷을 말려 죽일 때까지 놔주지 않는 음란 서큐버스 같은 존재들이었다.
결론은 하나였다.
여기서 더 있다간, 사회적으로도 죽고, 육체적으로도(쥐어짜여서) 죽는다.
‘튀자!’
나는 아직 절정의 여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가늘게 떨고 있는 엘프를 그 자리에 내버려 둔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미친 듯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거대한 몸뚱이가 수풀을 헤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한참을 달리다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나는 거대한 나무 뒤편의 동굴에 몸을 숨겼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 * *
숲속 시냇가.
엘라라는 절정의 여운 속에서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
온몸의 마디마디가 쑤시고 아팠지만,
그 고통마저 달콤하게 느껴질 정도로 생애 처음 느껴보는 충만감에 휩싸여 있었다.
그녀는 수줍게 주변을 둘러봤다.
“왕자님...?”
하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차가운 밤공기만이 그녀의 맨살을 스칠 뿐.
어째서...?
그녀는 처음엔 당황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혹시... 혹시 내가 마음에 안 들었던 걸까?’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어젯밤의 일을 회상했다.
처음에는 분명 어설프고 수줍어하던 왕자님.
하지만 이내 잠들어 있던 야수의 본능을 깨우고, 자신을 거칠게 몰아붙이던 그 모습.
그녀의 저항을 비웃으며, 그녀의 모든 것을 지배하던 그 압도적인 힘.
그는 분명 즐기고 있었다.
자신을 굴복시키고, 지배하는 그 순간에 원초적인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결코 연기가 아니었다.
‘분명 왕자님도... 좋아했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어째서 갑자기 사라진 것일까.
엘라라는 잠시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녀는 자신이 읽었던 수많은 로맨스 소설 속 남자 주인공들의 행동 패턴을 머릿속에서 빠르게 검색하기 시작했다.
‘혹시... 자신의 거친 본능을 드러낸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있는 걸까? 사랑하는 여인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자책하며, 그녀를 위해 조용히 떠나려는... 비운의 남자 주인공처럼?’
아니면,
‘자신의 마음을 시험하기 위해 일부러 사라진 걸까? 내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애태우려는 나쁜 남자 스타일?’
그녀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하지만 어떤 것이 정답이든, 결론은 하나였다.
“어디에 있든... 도망친 왕자님을 다시 내 손으로 붙잡아온다.”
그녀의 입가에 섬뜩하리만치 아름다운 미소가 걸렸다.
그 눈동자에는 순수한 사랑과 함께, 소유욕과 광기가 뒤섞여 기묘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왕자님을 다시 맞이하기 전에, 이 몸에 남은 왕자님의 흔적을 깨끗이 씻어내고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해야 해.”
그녀는 옷을 벗고 달빛 아래 시냇물에 몸을 담갔다.
밤새 정사로 뜨거워진 몸을 식히며,
자신의 몸 곳곳에 남은 붉은 자국들을 소중하다는 듯 어루만졌다.
하얀 어깨에 남은 선명한 손자국.
그가 자신의 머리를 거칠게 휘어잡던 순간이 떠올랐다.
허벅지 안쪽에 남은 희미한 멍.
자신의 한계를 무시하고 억지로 비집고 들어오던 그 압도적인 충만감.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황홀경이 온몸을 지배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멋대로 절정에 이르며 경련하던 몸.
살려달라 애원하던 자신의 목소리.
그리고... 그것을 비웃으며 더욱 거칠게 자신을 몰아붙이던 그의 야수 같은 모습까지.
그 모든 것이, 그가 자신을 얼마나 원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이것이야말로 왕자님이 자신을 원했다는 명백한 증거이자,
자신만의 소유물이라는 낙인이었다.
목욕재계를 마친 그녀는,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몸에 얇은 옷을 대충 걸쳤다.
젖은 천이 몸에 달라붙어 그녀의 완벽한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전보다 훨씬 더 섹시하고 야성적인 모습이었다.
그녀는 사냥꾼처럼 눈빛을 빛내며 중얼거렸다.
“자, 이제 내 귀여운 부끄럼쟁이 왕자님을 사냥하러 가볼까?”
그녀는 주인공이 남긴 체취와 꺾인 나뭇가지를 따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추적을 시작했다.
* * *
나는 동굴 속에서 갓 따온 열매를 씹으며 앞으로의 생존 계획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우선 불을 피우는 법부터 배워야... 밤이 되니 너무 춥고, 짐승들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해야 해. 그다음엔 물... 저 아래 시냇물은 마셔도 괜찮으려나. 젠장, 아는 게 하나도 없잖아.’
야생에서의 생존 지식 따위는 전무했다.
오크로 환생했지만, 주어진 것은 튼튼한 몸뚱이뿐.
이 낯선 세계에서 살아남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막막하고 고독한 일이었다.
“하...”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과 함께 서러움이 터져 나왔다.
‘고작 이렇게 살려고 트럭에 치여 죽었나. 회사 다닐 땐 야근에 치여 살고, 이세계에 와서는 생존에 치여 살고. 내 인생은 왜 이 모양일까.’
맨몸으로 숲을 달리는 것은 고역이었다.
밤이슬에 젖은 나뭇가지가 맨살을 할퀴고, 뾰족한 돌멩이가 발바닥을 찔렀다.
한참을 달리다 지금의 이 동굴을 발견하고서야 겨우 몸을 숨길 수 있었다.
‘가죽 같은 건 어떻게 구하지...?’
나는 내 몸을 가리고 있는 허술한 옷가지를 내려다보았다.
어젯밤, 도망치던 중에 찢겨 나갔던 가죽 바지는 이미 찾을 수 없었다.
급한 대로 질긴 나뭇잎과 칡덩굴을 엮어 겨우 중요 부위만 가린, 원시인이나 다름없는 꼴이었다.
이따위 것으로 밤의 추위나 맹수의 이빨을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막막함에 빠져 있던 바로 그때였다.
동굴 밖에서 물방울이 뚝, 뚝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이전보다 훨씬 더 농염하고 위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자님~? 어디 숨었어요~? 우리 예쁜 왕자님.”
내 심장이 멎는 듯했다.
나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위험하다.
설마, 도망친 자신을 이렇게까지 빨리 쫓아올 줄은 몰랐다.
그녀의 목소리는 꿀처럼 달콤했지만, 내게는 저승사자의 속삭임처럼 들렸다.
그녀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손에 무엇을 들고 있을지 상상만 해도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나는 최대한 몸을 낮추고 동굴 안쪽의 어둠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제발, 제발 그냥 지나가라.
나를 찾지 못하고 그냥 돌아가라.
간절히 기도했다.
“어라...? 이 근처에서 뭔가 강하게 느껴지는 것 같은데...?”
동굴 바깥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에 심장이 바닥까지 떨어지는 것 같았다.
‘뭔가 느껴지다니, 대체 뭐가?! 제발, 그냥 착각이라고 생각하고 지나가 줘!’
나는 속으로 절규하며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음... 다른 것들과는 다르게, 아주 진~하게 느껴지는 이 짐승의 냄새... 혹시 우리 왕자님이 여기 계신 건가?”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미친, 짐승의 냄새는 무슨! 물론, 어젯밤에 그렇게 땀 흘리고 도망친 이후 따로 씻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오크는 원래 냄새가 심한 종족이었나?!’
나는 내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아볼 겨를도 없이 공포에 떨었다.
‘얀데레에게 쫓긴다면 이런 기분일까...’
그녀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동굴 입구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도망칠 곳은 없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쿵.
바로 눈앞에서 무언가 툭,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젖은 흙이 묻은 날렵한 모양의 가죽 신발.
그리고 그 신발을 따라 시선을 올리자,
허리를 숙여 동굴 안을 들여다보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찾~았~다~, 나의 왕자님.”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것을 발견한 듯,
눈을 초승달처럼 휘며 활짝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소름 끼치도록 위협적이었다.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은발은 달빛을 받아 요사스럽게 빛났고,
젖어서 몸에 착 달라붙은 얇은 옷은 그녀의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의 굴곡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어깨너머로 흘러내린 옷 사이로 드러난 새하얀 쇄골 위로,
물방울이 천천히 흘러내려 가슴골 사이로 사라졌다.
참으로 아름다운 외모였다.
하지만 그와 대조적으로,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그 표정이 너무나도 섬뜩했다.
그 눈에는 애정이 아닌, 사냥감을 몰아넣은 포식자의 희열이 번뜩이고 있었다.
나는 온몸으로 위기 의식을 느끼며, 본능적으로 동굴 반대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으아아악!”
“어머, 아직도 부끄러우세요?”
엘라라는 즐겁다는 듯 웃으며 나를 쫓았다.
젖은 몸으로 숲을 질주하는 그녀의 모습은 아름다우면서도 공포 그 자체였다.
나는 살기 위해 나무 위로 올라가고, 강을 건너는 등 필사적인 몸부림을 쳤지만,
야생에서의 생존 능력은 그녀가 압도적으로 뛰어났다.
결국, 거대한 폭포 앞, 막다른 절벽에 몰리고 말았다.
“하아... 후우... 헉...”
폐가 터질 듯이 타들어 갔고, 다리는 비명을 질렀다.
나는 차갑고 축축한 절벽에 등을 기댄 채,
간신히 몸을 지탱하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숨을 헐떡이며 지친 나와 달리, 엘라라는 여유로운 미소를 띤 채 서 있었다.
그녀의 호흡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고,
오히려 추격전으로 달아오른 뺨이 달빛 아래 생기있게 빛날 뿐이었다.
“후훗... 이제... 도망갈 곳 없어요, 왕자님.”
그녀는 천천히, 마치 사냥감을 음미하듯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정말로 안타깝다는 듯이, 연극 배우처럼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왕자님, 자꾸 도망가시면... 어쩔 수 없어요.”
그녀는 허리에 찬 작은 주머니에서, 능숙한 솜씨로 밧줄을 꺼내 들었다.
“안 돼! 오지 마!”
나는 저항했지만, 지칠 대로 지친 몸으로는 그녀를 당해낼 수 없었다.
그녀는 가볍게 나를 제압하고, 능숙한 솜씨로 나를 꽁꽁 묶어버렸다.
‘안 돼... 이제 저 오두막으로 끌려가서 밤새도록 쥐어짜일 거야...!’
절망에 빠진 내 볼에, 그녀가 사랑스럽게 뽀뽀를 했다.
“자, 이제 진짜 우리 집으로 가요, 나의 왕자님.”
그녀는 밧줄을 어깨에 메고, 마치 사냥에 성공한 사냥꾼처럼 나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공포에 질려 질질 끌려가는 내 모습은, 영락없는 그녀의 전리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