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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1. 백마라면 여기 있잖아요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과 함께 눈을 떴다. 가장 먼저 코를 찌른 것은 눅눅한 흙냄새와 퀴퀴한 이끼 냄새,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승의 체취였다. “으... 여기가 어디야...” 목이 잔뜩 쉬어 갈라진 소리가 나왔다. 익숙한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훨씬 굵고, 거칠고, 짐승의 그르렁거림에 가까운 소리. 당황해서 벌떡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며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치 온몸을 흠씬 두들겨 맞은 듯한 근육통이었다. 간신히 팔을 들어 눈앞을 가린 무언가를 걷어냈다. 축축하고 거대한 나뭇잎이었다. 시야가 트이자, 울창한 나무들이 하늘을 가린 낯선 숲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뭐야... 납치라도 당한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월급은 통장을 스쳐 지나갈 뿐이고, 빚은 산더미인 나 같은 사회초년생을 납치해서 얻을 게 뭐가 있다고. 혼란스러운 머리로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 문득, 내 손을 보고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손. 분명 내 손이건만, 그 모습은 끔찍하게도 이질적이었다. 두껍고, 거칠고, 시퍼런 핏줄이 울퉁불퉁 솟아 있었다. 무엇보다 피부색이 문제였다. 짙은 녹색. 마치 슈렉이나 헐크 같은, 인간의 것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색깔이었다. 손톱은 누렇고 두껍게 자라 짐승의 발톱처럼 보였다. “아... 아아...” 비명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떨리는 손으로 내 몸을 더듬었다. 단단하고 두꺼운 흉곽, 통나무처럼 굵은 팔다리, 거친 가죽 같은 피부. 모든 것이 낯설었다. 이것은 내 몸이 아니었다. 문득, 발치에 있는 작은 웅덩이에 비친 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떨리는 몸을 이끌고 웅덩이로 기어갔다. 그리고 그 안에 비친 흉측한 괴물의 모습에, 나는 결국 이성을 놓아버렸다. “으아아아!” 웅덩이 속에는 돼지처럼 뭉툭한 코, 아래턱에서 흉하게 솟아난 한 쌍의 송곳니, 그리고 탐욕과 우둔함이 가득해 보이는 작은 눈을 가진 괴물이.... 나를 마주 보고 절규하고 있었다. 오크. 게임이나 판타지 소설에서 흔히 보던, 가장 약하고, 멍청하고, 추악한 몬스터. 내가 바로 그 오크가 되어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기억을 더듬었다. ‘어젯밤에 퇴근하던 중, 난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어. 그리고 갑자기 웬 트럭이...’ 그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트럭... 이세계 환생... 그런 건가?” 말도 안 돼. 그런 건 소설 속 이야기일 뿐이잖아. 하지만 눈앞의 현실은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증명하고 있었다. 평범한 대한민국 직장인 강성진은 죽고, 이름 모를 판타지 세계의 오크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망연자실한 채로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갑자기 배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허기가 지독하게 밀려왔다. 살아있다는 증거인지, 이 끔찍한 몸뚱이는 본능적으로 식량을 원하고 있었다. “젠장...” 욕설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은 낯설었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힘도 제법 강해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특별한 스킬이 생긴 것도, 강력한 마법을 쓸 수 있게 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맨몸뚱이의 오크 한 마리가 숲속에 덩그러니 내던져졌을 뿐.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먹을 만한 것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뭘 먹어야 할지도 막막했다. ‘오크는 뭘 먹고 사나? 설마... 사람?’ 상상만 해도 속이 울렁거렸다. 한참을 헤매던 중,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향기를 따라가자, 먹음직스러운 붉은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 나무가 나타났다. “살았다!” 나는 환호성을 지르며 나무로 달려갔다. 쉭-! 그 순간,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무언가가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뺨에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손으로 만져보니 끈적한 피가 묻어 나왔다. “거기 서라, 이 더러운 녹색 괴물!” 청아하지만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내가 지금까지 본 그 어떤 존재보다 아름다운 여인이 서 있었다. 달빛을 엮어 만든 듯한 은발, 에메랄드처럼 빛나는 눈동자, 뾰족하고 긴 귀. 정교한 문양이 새겨진 경갑을 입고 손에는 날렵한 활을 든 그녀는, 한눈에 봐도 엘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얼굴에는 경멸과 혐오가 가득했다. 그녀는 나를 벌레만도 못한 존재로 취급하고 있었다. “아니, 난 아무것도...!!” 변명이라도 해보려고 입을 열었지만, 엘프는 내 말을 들을 생각도 없다는 듯, 다시 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 날카로운 화살촉이 정확히 내 심장을 겨누고 있었다. 죽는다. 본능적인 공포가 온몸을 휩쌌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기 시작했다. “어딜 도망가!” 등 뒤에서 엘프의 외침과 함께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다행히 숲은 나무와 수풀이 무성해서 화살을 피할 엄폐물이 많았다. 하지만 이 거대하고 둔한 몸은 내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았다. 나뭇가지에 얼굴이 긁히고, 튀어나온 뿌리에 발이 걸려 넘어지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헥... 헥...” 폐가 터질 것처럼 숨이 찼다. 얼마나 달렸을까. 잠시 추격이 뜸해진 틈을 타 뒤를 돌아봤다. 다행히 엘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따돌렸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잡았다! 이 더러운 괴물!” 차가운 목소리가 바로 앞에서 터져 나왔다. 눈앞의 풀숲이 거칠게 흔들리더니, 은빛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엘프가 뛰쳐나왔다. 그녀의 손에는 어느새 활 대신, 날카롭게 빛나는 단검이 들려 있었다. 살의로 가득 찬 눈빛으로 그녀는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아... 이건 죽었다. 온몸의 힘이 쭉 빠져나갔다. 지칠 대로 지친 몸으로는 이 맹렬한 돌진을 피할 수 없었다. 하... 한심한 내 인생. 현실에서도 별 볼 일 없는 인생이었는데, 기껏 이세계로 와서도 고작 이런 식으로 사냥당해 죽는구나. 씁쓸한 자조감이 밀려왔다. 나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슬픔을 참지 못하며 그대로 두 눈을 감았다. 마지막 순간만큼은 고통을 보지 않고 맞이하고 싶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투드득. 둔탁하게 무언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입고 있던, 허리의 가죽끈이 격렬한 추격전을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끊어져 버렸다. 스르륵. 내 몸을 가리고 있던 유일한 가림막이 힘없이 흘러내려 발치에 떨어졌다. 하반신에 싸늘한 밤공기가 와 닿았다. “...!” 예상했던 칼날의 차가운 감촉 대신, 기묘한 정적이 찾아왔다. 살며시 눈을 뜨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맹렬하게 달려들던 엘프가 내 한 뼘 앞에서, 단검을 든 채 그대로 굳어 있었다. 나 역시 흘러내린 가죽을 내려다보며 그 자리에서 돌처럼 굳어버렸다. ..... ..... 시간이 멈춘 듯했다. 살의를 번뜩이던 엘프와 죽음을 각오했던 오크.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본 채, 이 기괴하고도 어색한 정적 속에서 그저 얼어붙어 있었다. 차라리 죽고 싶다. 아니, 그냥 빨리 찔러줬으면 좋겠다. 죽는 것보다 더한 굴욕감이 온몸을 지배했다. 그때였다. 방금 전까지 나를 찢어 죽일 듯한 기세였던, 엘프의 눈에서 살기가 거짓말처럼 스르르 사라졌다. 단검을 쥔 손에 힘이 풀리더니, 그녀는 그대로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풀썩. “......?” 뭐지, 이건...?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엘프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땅바닥에 주저앉아, 아무 말 없이 내 하반신만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어... 어?!” 그 노골적인 시선에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방금 전까지의 살의는 온데간데없고, 마치 진귀한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한 뜨거운 시선이 내 가장 은밀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죽음의 공포보다 더 원초적인 수치심이 온몸을 덮쳤다. 본능적으로 손으로 가리고 싶었지만, 몸은 여전히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다. 살기 위해선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파악해야만 했다. 나는 다시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잠깐... 엘프의 저 표정, 어디서 본 적 있는데? 처음의 경악은 사라지고, 그 자리엔 기묘한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가쁜 숨이 새어 나오고,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동공이 한껏 확장된 채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뺨은 홍조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것은 순수한 탐욕과 황홀경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무언가를 갈망하다 못해, 보기만 해도 정신이 녹아내리는 듯한 그런 얼굴. 아, 이거 그거다... 야한 만화에서 본 적 있는 표정이다! 속칭 가버린 얼굴. 절정의 쾌감과 욕망으로 이성이 마비된 캐릭터들이 짓던 바로 그 표정과 흡사했다. 설마..?! 내 시선은, 그녀의 시선을 따라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이 모든 비현실적인 상황의 원흉. 내 몸뚱어리로. ....그리고 나는 보고야 말았다. ‘와..! 씨...! 뭔 사이즈가...!!’ 나 자신마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크기와 위용이 상식을 아득히 벗어나 있었다. 평범한 한국 남자 강성진였을 때는 상상도 못 해본, 그야말로 전설 속의 거물이었다. 오크가 크다는 설정이 있는 건 어디서 주워들어서 알았지만, 이건 그 차원을 넘어섰다. 이건... 흉기 아닌가? 내 것이지만 내 것 같지 않은 이질감과 원초적인 경외감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내가 내 물건을 보며 충격과 경악에 빠져 있는 사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지금 뭘 하는 거지? 정신을 번쩍 차린 나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내 앞에 주저앉아 있던 엘프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나는 보고야 말았다. 그녀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던 경갑의 끈을 풀고 있는 광경을. 찰칵, 찰칵. 금속 갑옷이 풀려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숲의 정적을 깼다. 이어서 그녀는 안에 입고 있던 얇은 옷가지마저 거침없이 벗어 던졌다. 달빛 아래, 눈처럼 새하얗고 완벽한 그녀의 나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풍만하게 솟아오른 가슴과 잘록한 허리, 그리고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엉덩이까지.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는 모든 것을 벗어 던진 알몸으로 성큼성큼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렁그렁한 눈망울에는 아까와는 전혀 다른, 뜨거운 욕망과 헌신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아, 이 표정 뭔지 알 것 같다... 이거 그거잖아. 만화에서 자주 보던 하트눈. 캐릭터가 무언가에 완전히 매료되었을 때, 눈동자에 하트가 그려지는 그 연출. 지금 내 눈앞의 엘프가 딱 그랬다. 살의와 경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오로지 나를 향한 열망과 숭배만이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하트 모양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이게 실제로 느껴지는 거였구나. 내가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는 사이, 그녀가 꿀처럼 달콤하고도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드디어 찾았습니다. 저의... 백마 탄 왕자님.” 백마 탄 왕자...? 뜬금없이 무슨... “무슨.. 여긴 백마도 왕자도 없는데...” 이 으슥한 숲속에 백마는커녕 조랑말 새끼 한 마리 없었다. 그리고 내 모습은 누가 봐도 왕자와는 거리가 먼, 추악한 오크일 뿐이었다. 내 혼란스러운 표정을 읽은 것일까, 엘프는 요염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그대로 부드러운 이끼 바닥 위로 스르르 드러누웠다. 달빛을 받아 빛나는 새하얀 알몸이 숲의 어둠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녀는 양손으로 자신의 완벽한 몸을 가리키며, 속삭이듯 말했다. “백마라면, 여기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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