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066. 알리아나(6)
실피드의 형태가 늑대와 같아서 살짝 걱정했는데, 막상 타보니 승차감이 의외로 좋다.
바람의 정령이라 그런지 등도 푹신했고.
"이익, 쓸모없는 마부 녀석…! 너 때문에 자리가 좁지 않느냐!"
앞에서 꿍시렁거리는 엘프 공주만 없으면 참 좋을 뻔했다.
지금 우리는 무작정 남동쪽 방향으로 달리는 중이었다.
정확한 지도는 없던 탓에, 대충 기억을 떠올려 방향만 잡았다.
나름 방향이라도 알려주었건만 계속 툴툴거리는 알리아나에게 한마디 해 준다.
"그건 정령한테 따지시죠. 덩치 좀 더 키우라고."
"그러면 마나가 빨리 소모되지 않느냐!"
버럭 소리 지르는 알리아나.
그 말에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알리아나님?"
"왜 부르느냐."
"정령은 소환할 때만 마나가 필요한 거죠?"
"그렇다."
여기까진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저번에 필립에게 들었던 내용이니까.
그러나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그러면 알리아나님께선 소모한 마나를 회복하려면 얼마나 걸립니까?"
"으음, 실피드를 말하는 거라면 꼬박 하루 정도 걸린다."
"…유지 시간은요?"
"실피드가 얼마나 힘을 사용하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지금처럼 달리는 정도라면 족히 세 시간은 유지할 수 있겠구나."
그녀는 우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나로선 머리에서 경종이 울렸다.
'미친, 그러면 나머지 시간은?'
아직 우리는 마수들의 영역에서 벗어난 게 아니었다.
애초에 마수의 영역이라는 게 존재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도 마수들이 한 번씩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 와중에 우리가 무사할 수 있던 건 오직 이 실피드 덕분.
마수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상급정령의 속도를 따라 오질 못한다.
그런데 만약 이 늑대가 실피드가 사라진다면…?
'바로 마수들의 한 끼 식사가 되겠지.'
카사든 실프든 다른 정령들로 시간을 끌어봤자, 도망칠 방법도 없었다.
심지어 아까 본 악어 마수는 오히려 불사조를 한입에 삼켜버리지 않았던가.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혹시 유지 시간을 늘릴 방법은 없습니까? 예를 들어 마나를 넘겨준다 던지…."
"마나를 어떻게 넘겨준단 말이냐."
말도 안되는 소리를 들은 것마냥 콧방귀를 끼는 알리아나.
하지만 나에겐 방법이 있었다.
"알리아나님, 잠깐 자리 좀 바꿔 주실 수 있겠습니까?"
"흥! 뒤에라도 태워준 걸 감사히 여겨라!"
"아, 쫌! 그냥 비켜보라고요!"
내가 소리를 지르자, 그녀는 어깨를 움츠렸다.
동시에 밑 쪽에서 크르릉-하는 소리와 함께 실피드가 제자리에 덜컥 서버린다.
나름 상급정령이랍치고 주인을 위하는 모양이다.
허나 지금 나도 알리아나를 위해서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내 목숨을 위해서이기도 하고.'
내가 인상을 찡그리고 쳐다보자, 결국 알리아나는 주춤거리며 자리를 비켜준다.
그렇게 알리아나를 밀어내고 강제로 앞자리를 차지하자, 내가 원하던 상황이 이루어졌다.
-탈것에 탑승하셨습니다.
-직업 [기사]의 능력이 발휘됩니다.
이 세상 상식에서 벗어난 이능이 발휘되기 시작한다.
온 몸에서 마나가 솟구치며 그 일부분이 상급정령 실피드에게 흘러 들어간다.
[뭐, 뭐냐?!]
머릿속에 중후한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운전]능력을 통해 실피드의 의지가 전해온 것이었다.
'이런 부가 능력도 있었나.'
말을 탔을 때는 이런 적이 없었는데, 아무래도 정령이라서 가능한 모양이다.
그제야 알리아나도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등 뒤에서 내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무슨 일이냐. 실피드가 당황한 거 같은데…."
"잠시만요."
나는 실피드에게 흘러가는 마나의 양을 인위적으로 늘렸다.
그리고 [운전]능력을 통해 실피드에게 의지를 전했다.
'어때, 이러면 유지 시간이 늘어날 거 같아?'
[이게 너의 능력인가…!]
'능력이고 자시고, 어떠냐니까? 이렇게 내가 마나를 전해주면 더 버틸 수 있겠어?'
내 말에 고민하는 듯 잠깐 침묵하는 실피드.
그리고 잠시 뒤, 진중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이 정도 마나를 십분 정도만 받으면, 내가 이곳에 소환 될 때 지닌 마나만큼 된다.]
소환 될 때 지닌 마나라면….
'그게 세 시간동안 달리는 정도인가?'
[그렇다.]
10분에 세 시간이라니, 연비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썩 훌륭했다.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게 최대야? 초과로 더 채울 수는 없어?'
혹시 잘 때 마수들이 찾아오면 어떡한단 말인가.
실피드는 밤중에도 자리를 지켜줘야만 했다.
[정확히 모르겠다. 이렇게 마나를 받아본 적이 처음이라… 음?]
갑자기 놀란 듯 몸을 움찔거리는 실피드.
덕분에 그 위에 올라탄 우리는 잠깐 지진이 일어난 느낌이었다.
'뭐야? 왜 그래?'
[근원력이, 근원력이 늘어나고 있다…!]
'근원력은 또 뭐야?'
내 의문에 대답한 건 실피드가 아니었다.
"근원력은 정령이 정령으로 남아있을 수 있는 힘이다."
"예?"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그러자 심각한 듯 표정을 굳히고 있는 알리아나의 얼굴이 바로 보인다.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한 것이더냐. 인간이 정령의 근원력을 늘릴 수 있다니…!"
아무래도 나와 실피드의 대화를 전부 엿들은 모양이다.
뭐, 딱히 문제될 건 없었지만….
'그래도 근원력이 뭔지는 알려줘야 할 거 아니야.'
내가 속으로 툴툴대자, 이번엔 또 실피드가 답변을 해온다.
[말 그대로 우리 정령들의 힘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렇게 근원력이 계속 늘어날 경우 나는 최상급 정령으로 진화할 수 있다.]
'응? 마나랑은 다른 거야?'
[마나는 어디까지나 소모되는 자원. 하지만 근원력은 그런 게 아니다.]
이어지는 실피드의 말에 의하면, 일시적인 마나와 다르게 근원력은 영구적이라고 한다.
이걸 쉽게 표현하자면….
'근원력이 최대MP고, 마나가 그냥 MP라는 거지?'
[MP…? 그게 무엇이더냐?]
'아냐, 됐어. 무슨 말인지 알았으니까.'
굳이 MP가 아니더라도 그냥 경험치나 레벨 정도로 생각하면 될 거 같다.
그리고 나로선 신기한 일도 아니었다.
'나랑 잔 여자들도 그랬으니까.'
[응? 여자들이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이더냐?"
문제가 있다면, 내가 속으로 떠올린 생각이 또 두 사람… 아니, 한 정령과 한 엘프에게 그대로 들렸다는 점이다.
젠장, 함부로 생각도 못하게 생겼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쨌든 돌아가서, 유지 시간은 어떻게 되는 거야?"
[네가 원하는 건 안전한 장소에 도착할 때까지 내가 역소환 당하지 않는 것일 테지. 그 정도는 들어줄 수 있다.]
"무슨 소리야. 들어준다니?"
[근원력을 소모하면 마나가 없어도 며칠 정도는 유지할 수 있다.]
"오, 그래?"
불행 중 다행이었다.
하지만 옆에서 듣던 알리아나가 경악해서 외친다.
"근원력을 소모하는 건…!"
[괜찮다. 이 녀석에게 그 이상의 근원력을 받아낼 테니.]
치밀한 계산을 마치고 한 말인 듯 하다.
짐승치고 똑똑한 녀석이었다.
[너, 방금 몹시 실례되는 생각을 한 거 같은데?]
…감도 좋은 녀석이었다.
"됐고, 아무튼 그러면 당분간 이렇게 움직이도록 하자. 아! 굳이 시시콜콜하게 따지고 싶진 않지만, 하루에 최소 몇 시간 정도 이렇게 마나를 전해줘야 할까? 그건 알아야 할 거 같은데."
[하루 두 시간이면 충분하다.]
"…두 시간?'
진짜 연비가 좋은 녀석이었다.
당분간 하루 종일 등에 타있어야 할 텐데, 겨우 두 시간동안 마나를 제공하는 걸로도 충분하다면….
"아! 아니지! 차라리 능력을 더 발휘할 순 없겠어? 이게 최대야?"
[아까 네가 말한 덩치를 키우는 것 말이냐?]
"그것도 좋고, 속도나 뭐 그런 것도 좋고. 어쨌든 내가 이렇게 마나를 전해주면, 마나 걱정은 없다는 거잖아?"
내가 거기까지 말하자, 갑자기 실피드의 덩치가 확 커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엄청난 속도로 앞으로 치고 나간다.
[이 정도면 되겠나.]
이전에 비해서 두 배 쯤 빨라진 속도.
내가 끌던 마차랑 비교하면 네다섯 배는 빨라 보인다.
'이 정도면 시간을 확 단축할 수 있겠는데?'
아까 국경에 들어섰을 때 기준으로, 목적지까지 대충 마차로 7일 쯤 남았었다.
그런데 지금처럼 네다섯 배 쯤 빠르게 움직인다면?
'잘하면 내일 밤, 조금 무리하면 내일 낮에도 도착할 수 있겠는데…?'
여기서 무리한다의 기준은 밤새 잠을 안 잔다는 거였다.
마차를 운전할 땐 혹여나 졸음 운전을 하거나, 밤길이 어두워 내가 길을 잘못 볼 수 있는 게 문제였다지만….
'지금은 그런 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지 않나?'
실피드는 어디까지나 상급정령.
굳이 내가 운전하지 않더라도 자동 주행 기능이 탑재되어있었다.
"그거 좋은 생각 같구나! 한시라도 빨리 가도록 하자!"
알리아나가 또 실피드를 통해 내 생각을 훔쳐보고 소리를 친다.
하지만 나에게도 나쁜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안 그래도 식량도 없었는데….'
"하루 쯤은 굶어도 상관 없다!"
"아, 거참! 남의 생각 좀 그만 들여다 보시죠!"
"그냥 들리는 걸 어떻게 하느냐!"
어쨌든 알리아나의 허락도 받았겠다, 강행군을 유지한다.
해가 떨어지고 캄캄해진 시간.
졸음이 몰려올 때마다, 마수들의 시뻘건 눈을 한번 씩 보게 되면 잠이 싹 달아난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실피드의 속력은 한층 빨라졌다.
깜짝 놀란 탓에 나도 모르게 내 마나를 실피드에게 흘려보낸 까닭이다.
[근원력이 또 늘어났다.]
그렇게 몇 번의 가속이 반복되고 아침 태양이 천천히 떠오른다.
사물이 분간될 정도가 되자, 알리아나가 기쁜 목소리로 외쳤다.
"여기서부턴 내가 길을 알고 있다!"
다행히 목적지에 도달할 순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