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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025. 이예지(2)


건물이 떠나가라 소리 질렀던 시녀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곤 허리를 직각으로 숙였다. "죄송합니다! 전 이만, 아니, 예지님도 얼른 나오세요!" 그리곤 멀뚱히 서 있는 이예지까지 끌고 밖으로 나갔다. "응? 으응…." 바지를 엉거주춤하게 잡은 채 하반신을 드러내고 있는 나. 책상에 엎드린 채 치마만 간신히 내려놓은 최유나. 우리 둘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쳐다봤다. "…." "…." 그리곤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진 침묵. 그때, 밖에서 시녀와 이예지의 대화 소리가 얼핏 들렸다. -얼른 따라와요! -왜에에~ 나 저 둘이랑 놀려고 왔단 말이야~. -안돼요!! 하다못해 다음에! 오늘 말고 다음에 놀아요! …이예지를 데려가 준 시녀에게 고마운 마음이 무럭무럭 자라난다. 덕분에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생겼다. "유나씨, 우선… 정리부터 할까요?" 내 말에 최유나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우선 옷을 제대로 입고, 흐트러진 의자 따위를 정리했다. 아까 사용했던 휴지도 한곳에 모아 쓰레기통에 버린다. 정리를 끝낸 뒤, 서로 아무 말 없이 응접실을 나왔다, 그러곤 누가 뭐라 할 것 없이 숙소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서 숙소까지는 거리가 꽤 멀다. 한참 걸어야 하는데 이런 분위기는 영 별로였다. 나는 분위기를 바꿔보고자, 최대한 밝게 웃으며 그녀에게 아무 말이나 걸었다. "하하, 문 잠글 걸 그랬네요." 그러나 화제를 잘못 골랐는지 최유나의 표정이 굳는다. "…미안해요." "네?" "제가 아까 아무도 안 온다고 해서…." 맞다. 그런 말을 했었지. 나도 그때 잔뜩 흥분했던 터라 까먹고 있었다. "에이~ 아니에요. 저도 수긍 했는 걸요. 그게 왜 유나씨 잘못이에요." 나는 손사래를 치며 황급히 수습했다. 그러자 최유나가 울상을 지었다. "왜 매번 이러는 걸까요…." "…그냥 운이 나빴다?" "경험도 없을 때 전남친이 하는 걸 보질 않나, 첫 경험 땐 소피아씨가 들어오질 않나… 심지어 오늘도…!" 확실히 저렇게 들으니 묘하긴 했다. 혹시 이게 전부 최유나 탓이었던가. 그러나 지금 그런 농담을 하면, 최유나는 당장에라도 울 것만 같았다. 별수 있나. 달래 줘야지.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꼭 잡아주며 최대한 다정하게 말한다. "그러면 다음부턴 문 잠그고 하죠." 아차, 잘못 말했다. 날 쳐다보는 최유나의 시선이 싸늘하다. "정우씨…?" 그래도 당장에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던 분위기는 사라졌다. 다행이었다. 내가 빙긋 웃자, 그녀도 이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요, 정우씨. 그러면 다음부턴 문 꼭 잠그고 해요." 서로 웃자 분위기가 한층 풀렸다. 이 기세를 이어가려, 괜히 이야깃거리를 던져본다. "근데 유나씨, 예지랑 친해요?" 나야 뭐 이예지랑 같이 수업도 받았다지만, 최유나는 그녀와 만날 시간이 있었나 싶다. 그렇다고 날 만나러 왔다기에는, 시녀에게 우리 둘과 놀 거라고 외치던 이예지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최유나는 내 질문에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네. 매일 예지랑 같이 점심 먹거든요." 엥? 둘이 같이 점심을 먹는다고? "…어디서요?" "저기, 저 건물 보여요? 저기에 식당 있거든요. 거기서 매일 같이 먹어요." 최유나의 손가락 끝을 따라가니, 아까 소피아와 같이 이곳에 오던 길에 그녀를 만났던 장소였다. 어제도 그렇고 매번 어딜 다녀오나 했더니, 점심을 먹고 온 거였었다. 생각해보니까 이상할 건 없었다. 나는 오전 교육이 끝나고 매번 그곳에서 점심을 먹는다. 처음에는 식사 예절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라는 이유가 있었지만, 나중엔 그냥 그게 익숙해져서 매번 거기서 먹었다. '하은은 저번에 보니까 대현자랑 같이 먹는 거 같았고….' 참고로 박채린은 점심을 아예 거른다고 했다. 체력훈련 때, 내가 그녀에게 '밥 먹고 그렇게 뛰면 배 안 아프냐'고 물어봤다가 들었던 답변이다. '그때 진짜 독종이라고 생각했지.' 점심도 안 먹고 하루 종일 훈련이라니… 으으,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아무튼 이예지와 최유나, 둘만 점심을 어디서 먹는지 몰랐는데 이제야 알게 되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최유나는 살짝 첨언을 덧붙였다. "그리고 가끔, 저녁 먹고도 한 번씩 만나요." "…그건 또 어디서요?" "저희 숙소 앞에 정원에서요. 가끔 산책할 때마다 매번 마주쳐요." 전에 봤던 이예지의 꼬질꼬질한 모습이 떠오른다. '그렇게 돌아다니던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구나.' 나야 저녁 먹고 매번 방에서 쉬었으니 몰랐다. "휴우, 아무튼 걱정이네요. 내일 점심 먹을 때 무슨 말을 하게 될지…." 그녀는 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맞잡고 있는 그녀의 손등을, 다른 손 손바닥으로 톡톡 두드려주며 생각했다. '크게 걱정 안 해도 될 거 같은데….' 무책임해 보일까 봐 입 밖으로 꺼내진 못하지만, 이게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소피아 때와는 달랐다. 아니, 애초에 이예지는 우리가 한 행위가 섹스라는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스무 살이나 먹은 여자가 모른다는 게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거였지만… 전에 이예지에게 들었던 그녀의 과거를 떠올려보면, 또 말이 안 되는 게 아니었다. 그것도 그럴 게 이예지는. 어린 시절에 시간이 멈췄던 아이였다. *** 이예지는 이세계에 와서 너무 행복했다. 모든 게 신기하고 꿈만 같았다. 아주 가끔 지구에 두고 온 부모님이 떠오를 때가 있었지만, 그래도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이예지는 어릴 때부터 누워서만 지냈었다. 이제 갓 초등학교에 올라갔던, 여덟 살이라는 어린 나이. 어느 날 그녀에겐 끔찍한 고통이 찾아왔다. 그녀의 부모님은 쓰러진 아이를 데리고 황급히 병원에 달려갔다. 그리고 선고받은 시한부 인생. 불치병이라며, 아무리 길어야 십 년이라는 의사의 말에 부모의 세상은 무너졌다. 그들은 하나뿐인 딸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국내 병원에 모자라 외국 병원을 찾아다니고, 유명한 의사들도 만나고 다녔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다. -마음의 준비를 하세요. 그들이 그 사실을 받아들였을 때는 이미 2년이 지난 후였다. 그리고, 한창 뛰어놀아야 할 나이에 병원에 갇혀 지낸 아이. 부모님이 흘리는 눈물을 보고만 있어야 했던 아이. 그게 이예지의 열 살 시절이었다. 수많은 병원을 돌아다녔지만, 이예지의 건강은 점점 안 좋아져 갔다. 그도 그럴 게, 10년 남은 수명중 벌써 2년이 지났다. 악재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2년간 딸을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부모들의 지갑 사정 또한 나날이 무너져갔다. 다행히 원래 집이 좀 살았기 때문에 당장엔 괜찮았지만, 다달이 나가는 병원비가 천문학적인 수준이었다. 희귀 병이라 보험도 안 되는 병원비에, 그들의 얼굴엔 하루가 지날 때마다 수심이 깊어졌다. 그리고 이걸, 그들의 곁에서 쭉 지켜본 이예지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냥 죽을까.' 이렇게 살 바엔 그냥 죽는 게 낫지 않을까. 겨우 열 살이 된 아이는, 문득 그런 생각을 하다가 울컥했다. 어째서 나만 이래야 하는지. 다른 사람들은 밖에서 뛰어노는데 자기는 이게 대체 뭔지. 억울했다. 그래서 버텼다. 그렇게 의사가 처음 말했던 10년에 추가로 2년. 이예지는 총 12년을 버텨냈다. 그리고, 그 끝에 기적이 찾아왔다. 그건 바로… 이세계로 소환이었다. 이세계로 넘어오며 아팠던 몸은 건강해지고, 움직이지 않던 육체는 마음대로 움직였다. 앙상하게 말랐던 몸과 얼굴 역시, 보기 좋게 살이 올라왔다. '키는 그대로지만….' 병원에서만 지낸 탓에 작은 키가 아쉽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인가. 걸을 수 있고, 뛸 수 있다. 더 이상 아프지도 않았다. 심지어 새로운 친구들도 생겼다. 조용한 하은이. 엄청 예쁜 채린 언니. 친절하고 다정한 유나 언니. 그리고…. '잘생긴 마부 오빠.' 그래서 이예지는 이세계가 참 좋았다. 여덟 살에 멈춰있던 그녀에겐 모든 게 아름답고 신비해 보였다. 모든 일들이 재밌고 행복했다. 필립이라는 선생에게 배운 '궁술'이라는 것도 너무 재밌었다. "이렇게?" "오~ 대단한데? 저걸 맞춰? 자, 다시 한번 쏴보자." 재차 필립이 돌맹이를 던져봤지만, 이예지가 쏜 화살에 박살이 났다.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고 했던가. 그녀는 무슨 물 빨아들이는 스펀지처럼 필립의 궁술을 전부 흡수해버렸다. 필립은 사실, 처음엔 그녀에게 많이 가르칠 생각도 없었다. 돈을 받은 만큼 대충 가르치는 척만 하려 했는데, 재밌어서 하나씩 알려주다 보니 순식간에 밑천이 털려버렸다. 그렇게 겨우 2주도 안 된 시점에, 필립은 더 이상 이예지에게 가르칠 게 없어졌다. 뭐, 그렇다고 이예지가 필립만큼 강해졌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냥 가르칠 게 없어졌을 뿐이지, 이젠 스스로 단련하고 노력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근데 쟤가 노력을?' 하지만 필립이 본 그녀는, 열심히 노력하는 스타일이 절대 아니었다. 마음이 내키면 열심히 하지만, 마음이 식으면 절대 안 하는 스타일. 그리고 필립의 눈은 꽤나 정확한 편이었다. 무언가 훈련을 시켜보려 할 때마다 이예지는 싫다며 도망 다녔고, 필립의 입장은 난처해졌다. 큰돈을 받고 교육자로 온 입장에서 무언가 가르치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데, 배워야 할 학생이 저런 태도라니. 한참 고민 끝에 필립은 그냥 즐기기로 했다. '에이, 모르겠다. 그냥 노가리나 까자. 막말로 얘네가 진짜 마왕을 잡을 것도 아닐 텐데….' 이예지의 실력이 빠르게 늘긴 했다지만, 그래 봤자 인간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마왕을 잡는다고? 필립이 생각할 때 가당치도 않았다. 신탁을 받은 성녀를 제외하면, 다른 이들도 같은 생각이지 않을까. 굳이 조급해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예지야, 오늘은 내가 던전에서 있었던 일 말해줄까?" "응? 던전?" 다행히 이예지도 필립의 무용담에는 관심을 가졌다. '누가 보면 이것도 수업의 일종이라고 우기지 뭐.' 그렇게 수업을 진행하던 어느 날. 강정우도 오후에 함께 수업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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