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001. 이세계
직업 선택을 마친 인원들은 시녀장의 안내를 받아 각자 방을 배정받았다.
내가 배정받은 순서는 마지막이었다.
"저녁 시간이 되면 시녀를 보낼 테니, 그때까진 편안하게 쉬시길 바랍니다."
안내해준 시녀장이 나가며, 혼자 남게 되었다.
말이 방이지, 어디 호텔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넓은 공간이었다.
각 방마다 화장실도 따로 존재하고.
방 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침대에 풀썩 몸을 뉘었다.
'하…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푹신한 침대에 몸을 맡기자 방금까지 있던 일들을 떠오른다.
그래서 괜히 한번 중얼거려봤다.
"상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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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강정우
직업: 기사
능력: 운전, 탑승물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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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떠오르는 홀로그램 창.
마치 게임을 보는 것만 같았다.
'현실 맞지…?'
불과 몇 시간 지나지 않은 사건이 떠오른다.
평소처럼 인도를 걷고 있었다.
그때 트럭 한 대가 차도를 벗어나 인도로 넘어왔다.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을 만큼 찰나.
온몸이 찢겨나가는 듯한 고통과 함께 내 몸은 하늘을 날았다.
'그리고 이세계에 소환됐지.'
마왕을 죽여야 한다는 대현자의 말에도 난 선택지가 없었다.
싫다면 원래대로 되돌려주겠다고는 하는데… 그렇게 돌아가 봤자 죽음을 바로 앞둔 상황이었다.
뭐, 덕분에 새로 얻게 된 목숨, 마왕을 잡는다라는 선택지도 나쁘진 않았다.
소설이나 만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기도 하고.
내 직업이 '기사(騎士)'가 아닌 운전 '기사(技士)'라는 것만 빼면 말이다.
'자네가 생각하는 그 역할은 용사의 역할이네. 그리고 자네의 역할은 다른 이들을 마왕 앞으로 데려다주는 것이고. 흠… 번역 마법에 이상이 있었나. 왜 그런 반응인지 모르겠구먼…. 상식적으로 비슷한 직업이 두 개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그게 전부 번역 마법 때문이란다.
처음엔 황당하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몇 번이나 대현자에게 되물었다.
이세계까지 와서 마부라니?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쁜 일은 아니었다.
마부라면 힘들게 몸을 쓸 일도 적을 터.
위험을 무릅쓰며 직접 싸울 일도 없을 것 같다.
전투를 여자들에게 모두 맡겨야 한다는 마음 한구석 찝찝함만 없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다.
'다들 예쁘긴 했지.'
나완 다른 직업을 고른 네 명의 여자들.
그들과 파티를 이뤄 마왕을 잡아야 한다고….
문득 어릴 때 읽었던, 하렘물 만화가 떠오른다.
모든 여자 캐릭터가 주인공을 좋아하는, 그런데 남자 주인공 녀석은 우유부단하기만 하던 그런 유치한 만화.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피식 웃어버렸다.
'아서라. 이건 현실이다.'
만화는 어디까지나 만화. 현실이랑 혼동하면 안 된다.
괜히 한번 실수하면 평생 흑역사가 생길 수도 있다.
'하루 이틀 볼 사이도 아닐텐데….'
이 생각 저 생각하며 몸을 뒤척이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똑-
"시녀 소피아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어느새 저녁 시간이 다 된 것이었다.
황급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외쳤다.
"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방에 들어온 소피아라는 시녀는 꽤 미인이었다.
그녀는 각종 음식이 가득 담긴 운반 카트를 끌고 방에 들어왔다.
나 혼자 먹는 양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많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살짝 볼을 붉힌 채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기사님을 담당하게 된 소피아입니다. 식사 차려드리겠습니다."
'기사'가 그 '기사'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꽤 마음에 드는 호칭이었다.
그녀는 침대 옆 테이블로 카트를 끌고 왔다.
힐끗 보니 스프부터 빵과 고기, 생선까지 산해진미가 가득했다.
'밥이 없는 건 아쉽네.'
아무래도 이세계는 유럽의 중세 시대인지, 빵이 주식인 것 같다.
소피아가 음식을 하나씩 테이블로 옮기는 걸 보고 퍼뜩 자리에서 일어났다.
"앗! 기사님, 그냥 앉아 계세요."
"어떻게 그래요. 이런 건 도와드려야죠."
당황해하는 그녀를 무시한 채 음식 옮기는 걸 도왔다.
아니, 도우려 했다.
그녀가 한마디 하기 전까진.
"앗… 기사님…! 그건…."
"네?"
"생선 음식은 그쪽이 아니라 이쪽에 두셔야 해서…."
처음엔 장난인 줄 알았는데, 소피아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그녀는 내가 올려둔 그릇을 굳이 옆으로 다시 배치했다.
'뭐야, 여긴 음식을 놓는 방식이 따로 있어?"
살짝 민망해졌다.
결국, 처음에 그녀가 말했던 대로 자리에 앉아 있기로 했다.
머쓱하며 앉아 있는 동안, 카트에 올려진 음식들은 전부 테이블 위에 올라갔다.
식사 예절은 또 어떻게 하나 고민하던 차에, 단비 같은 얘기가 들렸다.
"식사를 드시고 놔두시면 와서 치워드리겠습니다."
천만다행이었다.
음식 놓는 방법부터 따로 존재한다는데, 옆에서 누가 보고 있다면 편히 먹지도 못할뻔했다.
소피아가 가지고 왔던 카트를 끌고 방을 나갔다.
방문이 닫히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앞에 놓인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어차피 나 혼자 먹을 건데 이렇게 놓을 필요 있었나….'
속으로 투덜거리며 바로 앞에 있는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맛은 썩 괜찮았다.
종류도 다양하고 평소에 먹어보지 못한 음식들이라 대체적으로 만족스러웠다.
굳이 아쉬운 점을 뽑자면 젓가락이 없는 정도?
핸드폰도 없고 대화 나눌 사람도 없다 보니, 먹는 데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덕분에 식사는 금방 끝이 났다.
"와… 배 터지겠다."
워낙 양이 많았던 탓에 꽤 많이 남았다.
아까운 마음에 괜히 스테이크 조각을 몇 개 더 주워 먹는다.
여기 앉아 있다간 계속 먹을 것 같다.
안 되겠다. 샤워라도 해야겠다.
잔뜩 먹은 탓에 무거워진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한다.
아까 시녀장에게 안내를 받을 때 여러 가지로 놀라웠던 게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게….
"중세 시대에 샤워기라니…?"
아까 시녀장에게 듣기론 마법의 힘이라는데, 그래서인지 현대에서 쓰던 샤워기보다 훨씬 뛰어난 것도 있었다.
무려 무선이라는 점.
물을 나르는 호스가 없다.
샤워기라 불리는 이 막대의 어느 지점을 누르면 그냥 물이 막 쏟아져 나왔다.
'이런 게 현대 사회에 있으면 대박이었을 텐데.'
그 외에도 화장실 자체는 현대와 별다를 게 없었다.
분명 들었던 설명으로는 말과 마차, 냉병기가 가득한 중세 시대였는데… 괴리감이 느껴진다.
샤워를 마치고 알몸으로 나와서 시녀가 준비해둔 옷을 들어봤다.
이때는 또 중세 시대라는 게 여실히 느껴진다.
까끌까끌한 옷감이며 부실한 마감처리.
심지어 바지는 고무줄 대신 끈으로 허리를 동여매야 했다.
'에휴… 이걸 입어야 하나….'
마치 삼베옷을 떠올리는 촉감.
거부감이 상당하다.
알몸으로 괜히 옷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하필 이때,
똑똑-
"시녀 소피아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소피아가 다 먹은 그릇을 치우러 들어왔다.
"잠깐…!"
뭐라 말하기도 전에 이미 소피아는 방문을 열었다.
난 아직 알몸인 상태.
들고 있던 옷으로 중요한 부위만 간신히 가린다.
"아…."
소피아의 얼굴은 홍시 같았다.
당황했는지 어쩔 줄 몰라하며 필사적으로 눈을 굴리고 있다.
"죄송합니다!"
쾅!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못 찾았는지, 소피아가 소리치며 문을 쾅- 하고 닫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사고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습관적으로 중요 부위를 가리긴 했는데, 소피아의 얼굴을 봤을 땐 소용없던 일 같다.
'아깐 노크하고 허락 맡은 다음에 들어오더니….'
옷을 안 입고 알몸으로 있던 나도 잘못이란 걸 알지만, 괜히 소피아에게 속으로 투덜댔다.
언제까지 알몸으로 있을 순 없는 노릇.
익숙하지 않은 옷을 어떻게든 입은 뒤, 방문을 열었다.
문 바로 옆에 소피아가 보인다.
약간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얼굴이 새빨갛다.
"그… 저…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인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
뭐라도 한마디 해줘야겠다.
"괜찮아요. 뭐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요."
"으으으… 죄송해요… 보려고 본 게 아니라…."
나름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했던 말인데 허둥대는 모습을 보니 실수였나보다.
'에이, 모르겠다. 그냥 후딱 치우자.'
그녀 앞에 있는 운반카드를 테이블 앞으로 옮기며 물었다.
"이것도 설마 놓는 자리가 따로 있는 건 아니죠?"
"네. 그건 그냥 한곳에 다 쌓으면… 앗…! 제가 치울게요!"
소피아의 말을 무시한 채 내가 먹은 그릇들을 옮겨 담는다.
그녀도 뒤늦게 내 옆에 와서 치우는 걸 도와줬다.
카트에 옮기기만 하면 되는 일이라 금방 끝이 났다.
"그… 전 이만!"
자기 할 일을 마친 소피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카트를 끌고 황급히 방을 나갔다.
그때까지도 그녀의 얼굴은 새빨갰다.
***
한바탕 사건이 일어난 뒤, 난 방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아니, 사실 여유롭다기보단 지루했다.
핸드폰도 없고 인터넷도 없다.
그렇다고 밖을 돌아보기엔 혼자 쏘다니기 눈치 보인다.
아까 시녀장이 필요한 게 있으면 담당 시녀에게 말하라곤 했는데, 하필 소피아랑 그런 일이 있어서 따로 부르기도 뭐하다.
그렇게 한창 침대에서 빈둥거리다가 막 잠에 들려는 무렵이었다.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잠깐의 정적.
'뭐지?'
순간 잘못 들었나 싶었는데, 다시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똑똑-
아까보단 좀 더 선명했다.
"누구세요?"
그러나 여전히 말이 없다.
결국,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누구지? 소피아인가?'
뭐 따로 당부할 말이라도 있는 걸까.
아니면 다른 사람인가.
침대에서 방문까지 걸어가는 잠깐의 시간 동안 이것저것 떠올랐다.
그러나 문을 연 순간, 깜짝 놀라 내가 떠올리던 생각들은 다 사라져 버렸다.
소피아가 맞았다.
분명 맞긴 맞는데….
'복장이….'
아까 봤던 시녀복이 아니었다.
잠옷처럼 하늘하늘하고 얇은 옷이다.
그런데 옷감이 얼마나 얇은지 그녀의 몸매가 전부 비춘다.
속옷만 입은 것보다 야한 느낌.
눈 둘 곳이 없을 지경이다.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당황할 때, 소피아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혹시… 밤 시중 필요하시지 않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