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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첫 모험, 첫 번째 동료


팔레움에서는 눈을 볼 수 없다. 여름에는 따스하고, 겨울에는 선선한 날씨가 계속되는 팔레움에는 거대한 곡창지대와 가축을 기르는 드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대도시의 시민들과 매년 던전을 찾아 몰려오는 수많은 모험가들을 먹여 살리는 식량이 이곳에서 수확된다. 그런 기후이기에 보온을 위해 옷을 입을 필요는 없다. 온난한 지역의 의복은 치장품으로서의 성격이 강하게 발전되었고, 살결을 드러내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여성들을 위한 아름답고 천박한 디자인의 의상들이 많았다. 물론 남자는 예외다. 야겜 속 세상이다 보니 스스로 눈을 찌르고 싶게 만드는 그런 광경은, 게임은 물론 이 세상 어디에서도 등장하지 않는다.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진은 중앙 광장에 우뚝 선 모험가 길드 안에서 접수원과 마주했다. 분명 모험가 길드가 맞을텐데 이상하게 한산했다. 그러고 보니 모험가들이 몰리는 길드의 마석 환전소는 던전과 가까운 서부 대로에 있었지. 희미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모험가 등록을 하고 싶습니다.” “네. 여기에 인적 사항 기입해주세요.” 진은 접수원이 내민 서류에 이름과 출신지 등등을 적어 다시 건넸다. 그러고는 서류에 기입된 사항을 되짚어보는 접수원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테이블에 얹힌 두 덩이의 커다란 유방이 눈에 띄었다. 이 세상에서 여성의 노출은 그저 더위 때문에 유행하는 패션의 일부가 아니다. 문학적인 측면에서 옷이란 신체를 가리는 도구이며, 본모습을 감추는 일종의 가식적인 가면처럼 여겨져 왔다. 즉,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헐벗은 차림새야말로 스스로를 감추지 않고 투명하게 내보이는 상태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의 알몸은 일종의 정장이나 제복처럼 여겨져 왔고,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갖출 수 있는 가장 단정한 복장으로 자리매김했다. 진을 담당하고 있는 접수원뿐만 아니라 다른 창구의 접수원들조차 똑같은 나신이었다.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진은 이런 문화가 가끔 신기하기도 했다. “폴루스투라 마탑에서 마법을 사사 받으셨다고요? 멀리서 오셨네요?” 팔레움은 제국의 동남부에 위치해 있고 폴루스투라 마탑은 북부에 위치해 있으니, 거의 제국 반대편에서 찾아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식견을 넓혀보려고 왔습니다. 마탑에 틀어박혀 있는 것도 좀이 쑤시고요.” “단순히 경험을 쌓으러 왔다기엔 엄청 멀리서 오셨는데요? 그리고 던전이 여간 위험한 것도 아니고요.” “재밌는 모험이 되겠군요. 안 그런가요?” 접수원은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고는 동으로 된 뱃지를 테이블에 올려놨다. “뭐, 마법사시니까 어디서 객사하시지는 않겠죠.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굳이 위험한 던전으로 내려가려는 마법사는 원체 없어서요. 어딜 가서든 환영 받으실 거예요.” “그거 좋은 소식이군요.” 진은 뱃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접수원이 도발적인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모험가 등록비는 은화 스무 닢이에요.” “……비싸군요. 공짜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기껏해야 은화 한두 푼 받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은화 스무 닢을 내면 이제 여웃돈이 없다. 로브 안에서 동전 주머니를 꺼낸 진이 살짝 떨리는 손으로 은화를 꺼내 건넸다. 건네받은 은화를 눈대중으로 감별한 접수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은 로브에 뱃지를 달고 길드를 나섰다. “즐거운 모험 되시길! 모험의 신 에이릭께서 굽어살피실 거예요.” 진은 길드를 나서며 접수원에게 손을 흔들었다. 모험가 뱃지 때문인지 괜히 감회가 새로웠다. 아니면 그냥 돈이 아까워서 그런 걸지도. * * * [던전 도시의 예라]라는 야겜이 있었다. 게임성이야 평범하다 못해 널리고 널린 고전 JRPG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던전도시의 예라]는 특이한 설정으로 차별화를 추구했다. 성(性)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기에 역으로 성(性)에 개방적인 세계관. 야겜이란 게 보통 여캐의 노출에 아주 관대하지만, 이 게임의 세계관은 특유의 설정 덕분에 그 관대함의 기준이 아주 널널했다. 그 때문에 반짝 인기를 끌었다. 헐벗다 못해 알몸으로 거리를 쏘아 다니는 캐릭터들은 수많은 딸쟁이들을 만족시켰고, 창작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물론 자신은 호기심에 손댔다가 빙의 당하고 말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솔직히 여기에서 사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 않아.’ 아니, 오히려 전생보다도 즐거웠다. 아무튼. 이 게임의 주인공인 ‘예라’는 여캐다. 세계관이 세계관인 만큼 남캐도 아닌 여캐가 주인공인 것이 의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설정이야 제작자가 덧붙이면 그만 아니겠는가. 설정상, 마왕의 저주는 오직 인간에게만 피해를 끼쳤다. 몬스터는 당연하게도 예외라는 말이다. 게다가 욕구를 일깨우는 미약 성분의 버섯이나 몬스터도 존재해서, 세월에 풍화된 저주를 뚫고 성(性)에 눈을 뜬 씨 없는 수박들이 종종 주인공을 쾌락의 길로 유혹하기도 한다. ‘빼앗길 수는 없지.’ 진은 이미 이 세상의 주인공인 예라를 꼬실 시나리오도 간단하게나마 계획해 두었다. 일단 예라가 이곳 팔레움에 도착했는지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게임에서는 날짜를 표기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간접적인 증거를 가지고 유추해야 했다. 진은 로브에서 낡은 수첩을 꺼냈다. 빙의했을 때 게임에 대한 정보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기억나는 대로 적어둔 수첩이었다. 전부 볼 필요는 없다. 스토리에 대한 것. 그중에서도 시간대에 대한 힌트를 얻을만한 수준이면 충분하다. “……찾았다.” 예라는 팔레움에 도착하고 나서, 모험가 등록을 할 돈이 없어 여러 간단한 의뢰를 수행한다. 던전과 무관한 내용의 의뢰는 모험가 등록 없이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라처럼 무작정 팔레움으로 찾아온 예비 모험가들을 위한 길드의 배려였다. 그중에서 영주의 둘째 아들을 찾아달라는 의뢰가 있었다. 정확히는 수배에 더 가깝다. 목표를 찾아와야지만 돈을 받을 수 있는 의뢰였기 때문이다. 영주의 둘째 아들은 노는 것만 좋아하는 망나니에 검은 잡아본 적도 없는 무능한 인물이었다. 위험에 뛰어드는 성격은 더더욱 아니었기에, 던전으로 들어갔을 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기에 주인공인 예라도 의뢰에 참가하게 되었다. 수첩에 적힌 대로라면 이 의뢰는 꽤 중요한 복선이었다고 한다. 봉인된 마왕을 부활시키려는 악마의 하수인들이 꾸민 흉계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사건을 기준으로 잡으면 될 듯하다. 그럼 누구에게 물어봐야 할까. 영지의 지배자와 관련된 질문을 생각 없이 아무에게나 물어보는 건 여러모로 좋지 않다. 일단 진은 던전으로 같이 내려갈 동료를 구하기로 했다. 친해지고 그때 물어봐도 늦지 않는다. 진은 수첩을 다시 집어넣고 대로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던전과 관련된 모든 인프라는 던전과 밀접한 서부 대로에 몰려 있고, 그중에는 의뢰나 동료를 모집하는 게시판 역시 존재했다. 곧이어 진은 모험가들로 북적이는 모험가 길드의 교환소에 도착했다. 모험가들을 맞이하고 마석을 교환해주는 곳이다 보니 중앙 광장의 길드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거대했다. 교환소 건물 앞에는 여러 게시판이 길게 나열되어 있었다. 진은 게시판으로 다가가 붙어있는 모집 공고를 살펴보았다. 마법사의 공급이 전무하다시피 하기 때문인지 마법사를 구한다는 내용의 공고는 거의 없었다. 애초에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대열의 후미에 설 인원을 구한다는 공고는 몇 있었다. 진은 그런 공고를 중점적으로 살폈다. “이게 좋겠네.” 진은 게시판에서 공고를 떼어냈다. 내용은 이러했다. 게시자: 리네 브라이트해머 요구사항: 전위 혹은 후미에 설 인원 1인 세부 사항: 코카트리스를 잡으러 1계층으로 갑니다. 코카트리스를 잡을 실력이 있으신 분으로 부탁드립니다. 관심 있으시면 모루와 망치 여관으로 리네 브라이트해머를 찾아주세요. 코카트리스. 그 거대한 닭대가리는 1계층에 거주하는 최상위 포식자 중 하나다. 7층까지 존재하는 던전에서 1계층은 초보자용 사냥터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던전에 대해 아는 이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진정한 초보자의 일터는 던전 1계층이 아닌 던전의 입구인 고성과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안개의 숲이다. 던전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의 안개를 비롯한, 숲의 몬스터와 고성의 언데드를 뚫고 세계수의 줄기에 도달해야 1계층으로 향하는 포탈과 마주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성까지 돌파할 실력은 갖춰야 초보 딱지를 뗀 모험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진은 실력에는 자신 있었지만 던전에서의 경험이 부족했다. 애초에 팔레움에 입성한 것이 어제이니 별 수 없다. 던전에 관한 공부는 열심히 했지만, 지식만으로는 모든 걸 해결할 수 없는 법이니까. 게다가 전생에 대한 건 많이 잊어버려서, 이젠 이 세상의 주민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았다. 해묵은 소묘처럼 빛바랜 기억만 어렴풋할 뿐이다. * * * 진은 공고에 그려진 약도를 따라 모루와 망치 여관을 찾았다. 여관은 대낮부터 술을 들이키고 있는 드워프들이 테이블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인간은 거의 없었다. 진은 그제야 이곳이 왜 망치와 모루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깨달았다. 애초에 드워프를 위한 술집이었던 것이다. 진은 식은땀이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리네라는 사람이 드워프면 어떡하지?’ 이 세상의 드워프들은 판타지 게임답게 대부분이 전형적인 광부이자 대장장이들이다. 땅딸막하고, 얼굴은 거칠고 마초적이며 팔다리는 근육으로 굵직하다. 남자는 물론 여자도 다를 바 없다. 그렇기에 게임 속에서는 흑막 아니면 개그 캐릭터로 비중이 높았다. 당연하게도 드워프가 그렇고 그런 짓을 당하는 장면은 하나도 없었다. 만약 그런 장면이 있었다면 게임의 평가는 상당히 낮게 책정되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브라이트해머라는 성 자체가 드워프나 쓸 법한 이름이 아닌가. 주의 깊게 생각했다면 충분히 알아차렸을 텐데! 잠시 머뭇거리던 진은 결국 안으로 들어섰다. 드워프와 친분을 맺어서 나쁠 건 없다. 물론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겠지만, 좋은 경험 했다 치면 나쁘지 않다. ‘제발 아니어라. 제발 아니어라. 제발 아니어라. 제발 아니어라.’ 그러면서도 진은 속으로 첫 모험의 동료가 드워프가 아니길 간절히 빌었다. “이봐, 인간 친구. 거기서 멀뚱히 뭐 하고 있어?” 그때 덥수룩한 수염에 거품이 잔뜩 낀 드워프가 진에게 말을 걸었다. “드워프제 맥주라도 맛보려고 왔나? 그럼 옆에 앉아봐. 특별히 한 잔 사주지.” “아뇨. 그게 아니라 리네 브라이트해머라는 분을 만나러 왔습니다.” 그 말에 드워프가 인상을 찌푸렸다. “리네? 네가 리네를 어떻게 알아?” 진은 게시판에서 떼 온 공고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공고를 살핀 그는 박력 있게 맥주를 들이키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코카트리스는 얼어 죽을……. 리네! 이 화상아! 이리 좀 내려와 봐라!” -네? 가요! 드워프 치고는 명랑한 목소리가 답했다. 곧이어 누군가가 계단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하얗고 가느다란 맨다리. 적어도 드워프의 것은 아니었다. 진은 무심코 안도의 한숨을 내뱉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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