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새로운 아침
“끄응”
눈을 뜨자마자 느껴지는 강렬한 두통에 얼굴을 찌푸리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 하자 익숙한 감촉의 말랑한 무언가가 손에 잡혔다. 차가운 젤리 같기도 하고 방석같기도한 오묘한 촉감…. 뭐지 이거?
“....안녕”
“아, 어.... 안녕 잘 잤냐?”
잡결에 이상한 걸 잡은 건가 싶어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알몸 상태의 꼬맹이가 자기 가슴 위에 얹어진 나의 손을 감싸며 인사를 건네왔다. 같은 침대에 서로가 알몸인 상태, 슬쩍 내 성기를 확인하자 끈적끈적한 액체가 덕지덕지 묻어있었기에 아마 간밤에 한바탕 거사를 치른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침대까지 온 거지?)”
성기 상태를 보면 몽정이 아닌 이상 분명 꼬맹이랑 한 건 맞는 것 같긴 한데, 기억이 전혀 없었다. 섹스는커녕 어떻게 침대까지 왔는지조차 떠오르지 않는 상황.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 어떻게든 어제의 기억을 끄집어내 되짚어 보려 노력했다.
<내가 움직일게>
<맛있어>
<...주인 괜찮아?>
<언제나 함께>
분명, 쇼핑몰을 나와서 언제나 내 곁에 있을 거라고 말해주던 꼬맹이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안전하게 아파트로 온 것까지는 기억이 났지만, 이후는기억이 엉망진창으로 꼬여있었다. 꼬맹이가 펠라를 해주는 장면이나, 내 위에 올라타 그 작은 엉덩이를 격하게 움직이던 장면 그리고…. 그리고
<...괜찮아…. 나랑....>
침대에서 잠이 들기 전 꼬맹이와 무언가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안된다. 더 이상은 떠오르지 않는다.
“...괜찮아? 어디 아파?”
내가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자 나를 유심히 지켜보고있던 꼬맹이가 내 품에 안겨 왔다. 달콤한 향기와 자그마한 체구의 감촉이 그렇지 않아도 떠오르지 않던 기억을 저멀리 날려버렸다.
“미안 아직 잠이 덜 깼나 보다”
나는 머리를 휘저어 남아있던 생각마저 지워버리며 작게 웃어 보였다. 한시라도 빨리 할인 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급박한 상황에 정신병이 도질 기미가 보여서 기억에 혼란이 생겼을 뿐이겠지.
“그럼 잠도 깰 겸 잠깐 바람 좀 쐘까?”
“...응 헤헤”
더욱더 심해지는 두통에 못 이겨 내가 말을 꺼내자 품 안에 안겨 내 냄새를 맡고 있던 꼬맹이가 손을 맞잡더니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감정이 조금씩 풍부해져 이제 표정만큼은 감염되기 전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에 나 또한 마주 웃어주며 옆에 널브러져 있던 옷가지를 대충 챙겨입고는 꼬맹이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오자 시원한 공기가 우리를 지나가며 아파트 난간 너머로 멸망직전인 세상이 펼쳐졌다.
무너진 빌딩과 불타 재가된 집. 추락한 헬기나 가드레일에 처박힌 자동차를 양분삼듯 뻗어나온 이름모를 식물 등등 좀비들이 활기치기 전이었다면 그림속에서나 봤을 법한 지옥같은 풍경이었음에도 가슴이 아프거나 무섭기는커녕 뭔가 마음이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응? 왜 그래? 내 얼굴의 뭐라도 묻었냐?”
“...아무것도”
멍하니 멸망한 세상의 풍경을 바라보자 어쩐지 가슴 한쪽이 뻥 뚫리는 기분과 함께 머리의 두통도 어느 정도 가라앉았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슬쩍 옆쪽을 바라보자, 눈앞에 펼쳐진 풍경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은 채 나를 줄곧 올려다보고 있던 꼬맹이와 눈이 마주쳤다.
“뭐야 이젠 얼버무리기까지 하는 거야? 이제 조금만 더 빨리 말할으면 완전히 전이랑 똑같네”
“...정말?”
“그럼”
나는 약간 기대하는 표정을 띠는 꼬맹이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어 주고는 겨드랑이에 손을 집어넣어 번쩍 들어 올려 어깨에 올려주었다.
“내 칙칙한 면상보다 이 경치 좀 봐라 죽여주지 않냐? 우리 아파트 다른 건 몰라도 경관 하나만큼은 끝내줬지 앞에있던 다른 건물들이 무너져서 그런가 더 좋아보이지 않냐?”
“...그렇네”
“그…. 럼 배신자 새끼들이 북쪽으로 간 거 기억해? 저쪽으로 쭉 날아갔는데 하얀 머리랑 가슴큰 여자”
내 말에 반응은 해주지만 풍경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건지 꼬맹이는 그저 내 머리를 매만질 뿐이었기에 살짝 어색한 기류가 흘러 나는 황급히 말을 돌렸다.
“...하얀 머리랑 여자... 몰라 기억안나”
“그러냐~ 그건 다행이네! 난 아직도 꿈에서 종종 나오거든 그 개새끼들이 권총 하나 달랑 내려주고 우릴 버리고 도망치던 모습을”
나는 손가락을 헬기가 사라졌던 방향을 가리키며 그날을 생각했다. 그 배신자 새끼들이 헬기를 타고 우리를 버린 채 떠나가던 모습, 형이라고 부르면서 내 뒤통수를 내려지던 그 하얀색의 머리를 가슴만큼 그 걸레 년의 얼굴,
“...알까 모르겠는데 내 몸은 점점 약해지고 있어 언제 죽을지 알 수 없게 돼서 그 연놈들 모가지는 이제 내가 못 딸것같아 씨발 존나게 유감이지 안그러냐?”
“...알고 있어 주인 몸 계속 약해지는 거 느껴져”
“푸핫 무슨 드래곤볼이냐? 그런 걸 느끼게”
내 몸 안에 사라져가는 무언가를 느끼는 걸까? 이제는 점점 슈퍼맨이 다 돼가는 것 같네... 나중에는 내가 필요나 할까?
“...주인?”
“아 미안. 잠깐 딴생각이 좀 들었어.”
내 감정에 반응하는 꼬맹이의 모습에 나는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여전히 공포나 불안감이 느껴지긴 했지만 어째선지 어제처럼 몸이 떨릴 만큼 강하지는 않았다. 뭔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늙은 영감탱이가 된 느낌도 들어 쓴웃음이 나올 것도 같았지만, 꼬맹이가 언제나 내 곁에 있어 준다는 그것 하나가 나를 버틸 수 있게 해주고 있었다.
“뭐, 알고 있으면 설명할 필요도 없겠네. 언제 평범한씹돼지새끼로 돌아갈지 모른다는 게 좀 좆같아야지 그 개 같은 연놈들 얼굴도 못 보고 뒤질지도 모르잖아?”
“....내가 언제나 곁에 있어 주인”
꼬맹이는 내 감정을 읽었는지 양손으로 내 머리를 감싸주었고 나는 그 차가운 온기를 느끼며 담배 연기를 깊게 들이마신 후 내뱉었다. 생각만 해오던걸 직접 들으니 가슴이 격하게 뛰어 말문이 잠깐 막힌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그래. 내가 약해지는 만큼 네가 강해지니까 플러스마이너스 제로, 아니 어쩌면 플러스가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우리 둘 다 지금은 많이 약해 진짜 운이 나쁘면 지나가던 변종들한태 둘러싸여서 뜯어 먹힐 수도 있어”
“....”
“지금까지는 내가 어떻게든 했지만 더 이상은 무리야 이거 한번 봐볼레?”
나는 몸에서 칼을 끄집어내 난간 벽에 힘껏 휘둘렀고, 벽에 부딪힌 칼날은 조금씩 금이 가더니 금세 형태를 유지하지 못한채 재각기 흩어져 바닥에 떨어졌다. 어제보다 더 무뎌졌네 이거….
“....싫어”
꼬맹이는 좀비들에게 둘러싸여 잡아먹히는 우리의 모습을 상상했는지 내 머리에 얼굴을 파묻어 버렸다. 상상하는것도 모자라 공포도 느끼는건가?
“그러니까 적어도 1년, 아니 네가 지금의 나보다 훨씬 더 강해지기 전까지는 누구랑도 엮이지 말고 숨어 살아야 해 최대한 조용하게 좀비나 사람이 보이면 무조건 도망치는 거야. 만약 쇼핑몰에서처럼 소란이 일어나면 차라리 좀비 밭으로 들어가서 도망쳐 그게 더 안전해”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말들이 담배 연기와 섞여 날아갔다. 절대로 사람과 엮이면 안 된다. 차라리 좀비밭을 헤쳐 나가야 할지라도...
“....주인이 원한다면”
지금 내가 꼬맹이를 지켜줄 수 있는 시간, 그 시간 동안은 최선을 다하겠지만 이후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지금과는 반대로 꼬맹이가 나를 지켜야만 한다.
“그래 알아들었으면 됐고 하는김에 다른것도 말해줘야겠네. 원래는 네 상태가 조금 호전되면 북쪽으로 가볼생각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됐으니, 기억도 안 나는 염병할 새끼들을 찾으러 굳이 이동할 필요도 없을 것 같거든 그 연놈들 잊고 지금처럼 살 거라면 말해 복수를 강요할 생각은 없어”
“...주인은 기억해서 힘들잖아? 그럼 나도 도울게”
꼬맹이가 싫다고 한다면 그 배신자 새끼들을 잊으려고 노력했겠지만, 처음 했던 말과는 다르게 곧바로 되돌아온 대답에 뭔가의 유대감 같은 게 느껴져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냐... 그럼 생각을 정리하는것도 이쯤에서 마치고, 오늘은 근처 좀 둘러보면서 물자 좀 찾아볼까? 네가 강해지는 데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 옥상에 만든 화단도 보수해야 하고 씨앗도 좀 찾고 싶은데 어때?”
“..좋아”
나는 꼬맹이의 대답을 들은 직후 담배를 밖에다 던져버리고는 꼬맹이를 어깨에 매단 그대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주인 내가 지켜”
“그래그래 나를 생각해 주는 마음은 진짜 고마운데 아직 그렇게까지 약해진 건 아니거든? 미리 말한 거야 미리. 칼이 좀 무뎌지긴 했지만 적어도 몇 달은 너보다 더 강할 거니까 그때 동안은 얌전히 내 뒤에 있어”
어깨에 걸터앉은 꼬맹이가 가슴을 활짝 편 채 자신만 믿으라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뇌를 만나고 2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 정도로 호전되다니. 가능하면 한 번만 더 찾아보고싶네... 이번에 만나면 100퍼센트 죽겠지만서도